■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신라 소판 경주이공 사단 비명

야촌(1) 2009. 9. 12. 12:26

■ 신라 소판 경주이공 사단 비명/국역
  (新羅 蘇判 慶州李公 祀壇 碑銘/國譯)

 

이땅에 민생이있으면 하늘이 신성한 임금을 반드시 낳으시며, 현철 충량한 보필도 반드시 있게 되어 국가를 세우고 정치를 이루나니, 이는 천하만세의 통하는 의리인 것이다.

 

저 옛날 진한(辰韓) 유민들이 육부촌을 만들고, 각. 각 촌장을 두어 다스리다가 박혁거세의 신성함을 보고 임금으로 세웠으니, 겸양하는 풍토를 볼수 있도다.

 

이때 양산촌장 휘 알평(謁平)께서, 선두에서 주장 하였으니 바로 우리경주이씨의시조이시다.

경주 표암에서 태어나 신성 문무 겸전하여, 나라를세우고 임금을 도와 민생을 보살피었으니, 지극한 덕망은 하늘과 사랑의 도움을 얻어, 높은 벼슬과 긴 수명을 모두 누리게된 것이다.

 

유리왕 구년에 이씨의 성을 받았고, 대대로 진골(眞骨)이 되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그러나 초창시대의 문헌(文獻)이 남아있지 않아 계보를 찾지 못하고, 신라 끝에 이르러 휘(諱) 거명(居明)에서 부터, 족보의 계대를 세우게 되었으니, 이 어른이 우리 이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된 것이다.

 

족보에 이르기를 벼슬이 소판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소판은 신라때 높은벼슬인 즉 공(公)의 덕업과 행실이 풍부하였을 것인데, 자취를 찾을수 없고, 배위 생졸 묘소 모두가 실전되었으니, 연대가 멀어서 자연 그렇게 된 것이다.

 

아들 금현(金現)은 병부령이고 승자(陞資) 금서(金書)는 고려개국을 도와 삼한공신이 되었고, 증손 윤홍(潤弘)은 병정이고 현손 승훈(承訓)은 시랑。 승겸(承謙)은 판이부사이다.

 

십사대 손에 이르러 휘(諱) 핵(翮)의 호(號)는 열헌(悅軒)이고, 문하평리이며。휘 강(康+羽)은 판전객 시사이다. 십오대손에 휘 인정(仁挺)의 호는 성암(誠菴)이고, 문하평리이며, 진(瑱)은 호가 동암(東菴)이고, 임해군으로 시호(諡號)는 문정(文定)이며, 세기(世基)는 호가 송암(松巖)으로 대제학이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신유는 예의판서다.

 

십육대 손에 부(榑)는 양시(兩試) 장원으로 사인이고. 규(樛)는 양시 장원으로 헌납이고, 관(琯)은 호(號)가 이암(怡菴)으로, 양시 장원으로 가락군이고 제현(薺賢)은 호가 익재(益齋)로 양시 장원으로 일곱 임금에 걸쳐 정승을 네번이나 역임하였고, 시호(諡號))는 文忠이다, 

 

천(蒨)은 호가 국당(菊堂)이며, 양시 장원으로 대제학이고 시호 문효(文孝)이다. 매(邁)는 부정이고. 과(薖)는 상서이며, 수(蓨)는 사인이고。원무(元茂)는 보승낭장이다.

 

십칠대손에 원선(元善)은 전서。의반(依班)은 군기감。수득(壽得)은 밀직상서이고。천주(天柱)가 있고, 서종(瑞種)은 부령。달존(達尊)은 호가 운와(雲窩)로 문과 직제학이고。창로(彰路)는 밀직사。경중(敬中)은 월성군으로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배중(培中)은 문과 판서이고 달충(達衷)은 호가 제정(霽亭)으로 계림부원군으로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성중(誠中)은 대제학으로 시호는 정순(靖順)이다.

 

경지(敬之)는 대제학으로 오성군이고, 경원(敬元)은 수찬。 원보(元普)는 지인주사。숙로(淑魯)는가선。처중(處中)이있고. 원경(元敬)은 첨정이다.

 

십팔대손에 양오(養吾)는 직장。존오(存吾)는 호가 석탄(石灘) 문과 정언으로 신돈(辛旽)을 논박 고려충신으로 유명하고。존중(存中)은 진사。존사(存斯)는 문과교감 이다. 그 외에도 신우(申佑)시랑이 있고, 후손에 지수(之秀)는 월성군이다.

 

공의 후손이 천년이 넘는 동안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분적종도 합천. 우계. 아산. 재령. 원주. 진주 등의 성씨가 전국에 펴져있으며 도학 문장과 현상양파와 문재덕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는이도 다 기록할수 없으므로 공의 현손까지만 기재하고 이하는고려이상에 특별 한이만 기록 하였다.

 

아! 하늘이 이처럼 보답함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손이 공을 추모하는 사업이 없었으니 어찌 통한이 아니리오 지난해 평리공파에서 추모사업을 발논하여 소요(所要) 대지를 안성군 원곡에 확보하고 중앙화수회에 상의(相議)해온, 종문의 찬동을 얻고 그 종회장 준호(埈鎬)와 각파대표(各派代表)가 찾아와 글을 청 하였다.

 

그윽히 생각건대 옛 사람이 묘를 잃으면 부득이 설단 하였으니 이제 분묘와 제단의 차이와 거리의 멀고 가까움은 논할것이 없도다. 자손의 기운이 바로 선조가 남긴 기운이므로 지성으로 제사하면 선조가 감응함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

 

우리 일가들은 서로 정성을 다해 위로는 선조의 영령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후손의 사모하는 마음을 펴서 천년 동안 못했던 일을 이루면 선조의 영혼이 반드시 나도 후손이있었구나 하면서 무궁한 복록이 내리도록 하시리라 명(銘)에 이르되

신라보다 먼저 육부촌장 있었으니 표암공 신명하여 백성들 모여들었네.

박씨임금 옹립하니 공로지대 진골 되었구나.

 

신라말에 소판공 일어나 중시조 되었는데 자손들온 나라에 가득하나 유적은 없어졌네.

이를 개탄  제단 모시니 정리에 맞는구나.

큰비석 원곡에 세워 이글을 천추에 보이련다.


檀紀四千三百二十七年 得姓一千九百六十三年(서기 1994년)  甲戊  四月二十三日에 세우다.


尙書公派 白沙文忠公 十二世孫 國會議員 鍾贊 國譯(상서공파 백사문충공 12대손 국회의원 종찬 국역) 


蘇判公 祀壇 建立推進委員長  評理公派 埈鎬 謹竪(소판공 사단 건립추진위원장 평리공파 준호 건립) 


菊堂公派 相千 謹刻(국당공파 상천 근각)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2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