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85

송와 이종윤 묘지명 병서

제주목사 송와 이종윤 묘지명 병서 (濟州牧使 松窩 李從允 墓誌銘 倂叙 [생졸년] 1431년(세종 13)~1495년(연산 1)/향년 65歲 이제주묘지명병서(李濟州墓誌銘 倂叙) 옛날 조선왕조가 융성할 때, 인재들이 등용되어 크고 작은이가 모두 그 능력을 발휘하였으니 선비가 이러한 때에 출생하여 쓰임이 되었으면 멀고 가까움과 큰 벼슬 작은 벼슬 따질 것이 없으며, 비록 백집사(百執事)의 끝이라도 족히 남에게 자랑할 수 있도다. 아! 훌륭하여라! 옛날 제주목사 이공은 영릉(英陵 >세종의 릉) 때에, 출생하여 광릉(光陵 >세조의 릉), 선릉(宣陵 >성종의 릉)의 즈음에 입신양명하여 대각(臺閣)에서 드날리고 세자서연에도 모시었으며 나가서는 한 지방을 맡아 다스려서 바다가 편안하였으니 비록 그 연대는 이미 오래되어 ..

매산공 이인혁 묘지명

■사복시 정 매산공 이인혁 묘지명 (司僕寺 正 梅山公 李寅爀 墓誌銘) ◇생졸년 : 1634년(인조 12)∼1710년(숙종 36). 이유원 찬(李裕元 撰) 숙종(肅宗) 기사년(己巳年,1689/숙종 15/기사환국으로 남인 집권)에 인현왕후(仁顯王后>閔氏)가 폐비되어 사택으로 물러나자 오양곡(吳暘谷=吳斗寅)과 박정재(朴定齋=朴泰輔) 제현이 상조(相助)로 대항하다가 죄를 당하였는데 이때 이름을 상소 밑에 참여하여 정재(定齋)를 노강(鷺江=지금의 의정부 장암동)에서 일곡하고 역곡(晹谷)을 파관(坡舘)에 쫓아서 병을 간호하며 상사를 치르고 고향산천으로 돌아와 과거를 폐지하고 발자욱이 서울 성문에 이르지 않은 이가 있으니 그 오직 매산(梅山) 이공이다. 공의 휘(諱)는 인혁(寅爀)이요. 자는 중장(仲章)이요. 경주인..

성오당 이개립 유허비명(省吾堂李介立遺墟碑銘)

성오당 이개립 유허비명 (省吾堂李介立遺墟碑銘) 후학 영가 권숙 찬(後學 永嘉 權璹 撰) 예천은 영남 명승지로서 금당 실[오늘날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 금곡리를 말함]이 손꼽는 고을은 우리나라 팔승지(八勝地)의 하나로서, 산천의 정기가 사람에게 뭉쳐서 뛰어난 사람을 낳게 된다. 옛적은 상고하기 어려우나 근대 일을 보건데, 당대 이름난 선비 성오당(省吾堂) 이 선생이 나신 터이다. 선생의 이름은 개립(介立)이요, 자는 대중(大仲)이요,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다. 배우는 사람이 역봉선생(櫟峰先生)이라고 하였다 이 씨는 관향이 경주요, 신라 때 휘 알평(謁平)이 시조로 상하 천여 년 간에 이름난 정승과 훌륭한 분이 많이 났었다. 고려 말에 휘는 달충(達衷)이요,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세상이 제정선생(霽亭先生..

繕工監 監役官 李松福 先生墓誌 / 동생 항복 찬

■ 선공감 감역관(繕工監監役官) 장사랑(將仕郞) 이공(李公) 묘지(墓誌) 이송복『李松福, 1550년(명종 5)~1592년(선조 25) ※백사 이항복 선생 중씨(仲氏)임. 동생 항복(恒福) 撰 아, 우리 선대부(先大夫)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몽량(夢亮)인데, 가정(嘉靖) 연간에 세 조정을 내리섬기어 훌륭한 업적이 있었고,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마치었는데, 훌륭한 덕을 쌓아서 후손에게 광영을 남기었다. 아들 4인을 두었는데, 그 셋째 아들의 이름은 송복(松福)이고자는 모이며 가정 29년(1550, 명종 5)에 태어났고, 그 막내는 바로 나이다. 선대부가 작고하자 우리들은 선부인(先夫人) 최씨(崔氏)의 집에서 자랐다. 우리는 어려서 서로 즐겁게 장난을 하며 노닐었는데, 형은 온량(溫良)하고..

경주이씨 시조 경모비(慶州李氏 始祖 景慕碑)

경주이씨 시조 휘 알평 경모비 (慶州李氏 始祖 諱 謁平 景募碑) 지은이 :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신라의 2천 년 역사는 꿈같이 지나갔건만 월성 옛터에는 돌 한 덩이 풀 한 포기마다 조상의 숨결이 배여 있고 축복받은 자손들이 대대로 그 전통, 그 문화 이어내려 오늘을 누리는 것 생각해보면 어찌 느껍지 아니하냐.(마음에 북받쳐 참거나 견뎌 내기 어렵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동경지와 가승 등 옛 문헌을 상고하건대 신라는 본시 진한의 땅으로서 거기 여섯 마을이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마을은 알천 양산 촌이며 그 마을의 어른은 알평 이신대 처음에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곳을 박 바위라 부르니 우리 겨레의 옛 신앙인 밝음을 뜻한 것임은 물론이다. 한 선제 지절 첫해 임자 기원전 69년 3월 초..

梧川 李相國 宗城 龍灣紀惠碑 幷序

梧川李相國 宗城 龍灣紀惠碑 幷序 (오천이상국 종성 용만기혜비 병서) 豊山 洪良浩 撰 龍灣。兩國之門戶也。荷戈擊柝者。晨夕於待變。故薄其徭賦。蠲其力役。以綏懷之。然壤地褊而冠蓋交。邑入不足以待賓旅養軍校。於是有息債之政。業商者貸輕而賭厚。始皆便之。久則錢益滋而民不加。積至七十萬緡。家授而口分。人散而籍存。於是有族隣之徵。邊民遂大病。英廟乙丑。梧川李相國按西節。行部徑入灣。召掌簿者。悉收債券來。公曾以御史巡邊。威聲讋一路。令下闔境皆戰沸。時權公一衡爲府尹。亟入問曰。今索債券將急之耶。答曰。然。權公曰。信如是。死者多矣。願少寬焉。公曰。是不難。卽令取火來。權公大驚遽止之。公笑而不應。促燒之盡。權公曰。邊門將悴矣。公何以善其後耶。曰。吾有一策耳。夫皮革者。我國之所贏。而中國之所須也。若使灣人挾入柵。以易燕貨。民獲其利。官征其稅。較諸債息。所謂日計不足。而歲計有餘者也。况我之貨於燕者。..

박거실 처 원씨묘지명-익재공 계배(系配) 춘천박씨 어머니.

졸고천백 제2권/최해(崔瀣) 著 ◇최해(崔瀣) 선생은 이제현(李齊賢). 민사평(閔思平)과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 삼아 가까이 사귀며 당대의 문호 (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 평원군 부인(平原郡夫人) 원씨(元氏) 묘지(墓誌). 최해(崔瀣) 撰 고려의 대신(大臣) 가운데 휘가 항(恒)인 분이 있어 세조황제(世祖皇帝) 때에 태사(太師) 충렬왕(忠烈王)의 재상을 지냈으니, 성은 박씨(朴氏)요 지위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아들 광정(光挺)이 처음으로 본국의 자제로 선발되어 원나라 궁궐을 숙위(宿衛)하고, 천자의 명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소신교위(昭信校尉) 고려서경등처수수군부만호(高麗西京等處水手軍副萬戶) 겸(兼) 광정대부(匡靖大夫)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졸하였다. 그 아들..

李正字墓誌銘 幷序[27世 이휘음(李徽音)]

[세계] 국당공 후 제정공파 丹谷先生文集卷之五(곽진>郭瑨) 李正字墓誌銘 幷序(李徽音) 有李公諱謁平。降于慶州瓢巖峯。佐命新羅始祖。積德基慶。世襲冠紳。麗末有諱達衷。門下侍中封雞林君號霽亭。剛直文章。山斗于世。有識鑒。我康獻大王微時。一見跪飮曰異人。忤旽歸第考終。入本朝有諱興商。事我光廟。襲封雞林君。是正字七代祖。子孫至今被蔭焉。至諱善童。爲正字曾大父。諱爲大父。諱介立卽皇考。早登進士。隱居行義。宣廟朝以孝廉選。屢調察訪縣監。皆不赴。除山陰宰。棄官歸田。踐履篤實。慈孝愿謹。稱省吾堂先生。先生伯氏中立名文學冠進士。不幸早世。先生執兄之喪。一從禮制。娶進士閔雲瑞之女生二男。長卽公也。諱徽音。汝翕其字。生而岐嶷。六歲學字。七歲屬文。沉厚精敏。於書過眼輒記。十六入鄕試。考官得製券歎服。俱中兩試。名聲燀爀。不以技藝自多。持己若虛。對人必恭。好善嫉惡。與所親者善謔。以寓規風。人不厭聞。不爲..

우의정 이완장군 묘지명 병서/국당공후 정순공파

[세계] 국당공후 정순공파 ■ 25世 右議政李公墓誌銘 幷序 古語云。將門出將。信斯言也。宜若家孫,吳世廉,李。而歷考前史。踵武者蓋寡。至於用干城任鼎軸者尤鮮。唐之李西平。宋之曹武陽父子。名位非不極。而論道則皆未也。至如我朝勳戚外。亦蔑蔑焉。若今右議政李公之代爲名將。終致三事者。豈不艱哉。豈不休哉。謹按狀。公諱浣。字澄之。慶州人。有諱謁平。事新羅始祖。爲佐命大臣。厥後簪纓不替。七代祖誠中。入我朝。位左議政。諡靖順。又四世而至成均生員諱自琛。贈左贊成。生諱鸞。蚤世。贈純忠積德補祚功臣,領議政。以公考忠武公之貴也。忠武公諱守一。魁偉仁厚。自宣廟朝。已爲宿將。逮仁祖甲子。有大勳勞于王室。官至輔國崇祿大夫鷄林府院君。兼刑曹判書。妣貞敬夫人李氏。恭靖大王五代孫。長原都正貴年之女。以萬曆壬寅七月二十三日。生公。甲子登武科。卽選宣傳官。丙寅。拜工曹佐郞。丁卯。除永柔縣令。陞祥原郡守。己巳。陞肅川..

찰방 이홍각 묘지명 병서(察訪 李弘愨墓誌銘 幷序).

이홍각『李弘愨, 1537년(중종32) ~ 1605년(선조 38)』 22世 호계공 이을규 세째 아들이다. ■ 봉직랑(奉直郞) 행 성현 찰방(行省峴察訪) 이공묘지명(李公墓誌銘) 병서(幷序) 조호익(曺好益,1545~1609) 撰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대대로 성(姓)씨가 드러나서 산동(山東)의 최씨(崔氏)와 노씨(盧氏)에 비하기도 한다. 공의 휘(諱)는 홍각(弘慤)이고 자는 여성(汝誠)이다. 시조(始祖) 알평(謁平)은 신라의 시조를 보좌하여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 뒤에 자손들이 창성하여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증조부의 휘(諱)는 구산(龜山)이고 조부의 휘(諱)는 한주(漢柱)인데, 모두 덕을 숨긴 채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고(考)의 휘(諱)는 을규(乙圭)인데 한 조각의 곤옥(崑玉)과 같아서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