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85

이한교 묘지명(李漢喬 墓誌銘) - 백사공파

작성일 : 2007. 07. 22 ■ 이한교(李漢喬, 1759년(영조 35) ~ 1808년(순조 8) [문과] 정조(正祖) 14년(1790)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위(11/47) [생원] 정조(正祖) 7년(178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2등(二等) 9위(14/100) ------------------------------------------------------------------------------------------------------- [가족사항] ◈부(父) : 이명집(李命集) ◈조부(祖父) : 이종한(李宗翰) ◈증조부(曾祖父) : 이동좌(李東佐) ◈외조부(外祖父) : 남범수(南凡秀) /본관 : 의령(宜寧) ◈처부(妻父) : ◈거주지(居住地) : 포천..

이경 처 인동장씨 묘지명(李瓊妻仁同張氏墓誌銘)

유인 인동장씨「孺人仁同張氏, 1719년(숙종 45) ~ 1776년(정조 1)」 聘母孺人張夫人墓誌銘 夫人姓張氏。仁同人。玉城府院君諱晩五世孫。大父諱世光通德郞。父諱學龍。仕爲陰城縣監。夫人以肅宗己亥生。年十九。歸于學生李公。公諱瓊。鷄林府院君謚忠武公諱守一六世孫。議政府右議政謚貞翼公諱浣五世孫。曾大父諱仁倜。仕爲直長。大父諱燽。父諱重泰。仕爲參奉。學生公素高㓗。不肯徇俗俯仰。夫人佐之四十年。惠順寬裕。可以楷法。其在室也。事繼母務盡愉婉。得不失其慈。其宜家也。族黨甚衆而皆得其懽心。其爲母也。婦女皆順敎訓。罔有諐違。正宗卽位之歲丙申六月二十四日。以疾卒于京都北里之第。越三月葬于驪州南大街村之原。貞翼公墓兆之北。又十九年學生公卒。葬其右。二男長師漢擧生員。仕爲井邑縣監。季頤漢學生早卒。二女長嫁原城元景肅。季嫁昌山成海應。內外孫男女若干人。海應居甥舘纔五月餘。將覲先君子雲山任所。往辭..

고마운 형수님의 추억 - 정약용(丁若鏞)

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2020. 06. 02(화) 15 : 10 [위클리서울=박석무] 아무리 냉철하고 이지적인 학자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따뜻한 인정이 서려 있기 마련입니다. 다산처럼 비판적이고 굳은 이성(理性)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많은 글을 보면 인간미가 철철 흐르는 대목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그가 귀양 살던 오랜 기간에 고향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엄한 스승의 모습도 많이 보이지만, 편지의 내면에 흐르는 다산의 인정미와 자식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숨길 수 없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젊은 큰 형수의 돌봄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다산은 큰형수의 무덤에 넣은 ‘묘지명(墓誌銘)’이라는 글을 통해, 형수의 인품과 행실을 찬양하는 글을 남겨, 형수의 은혜에 보답하는 정성..

성균진사 이응춘 묘지명(成均進士李應春墓誌銘)

성균진사 이공 묘지명(成均進士李公墓誌銘) – 백사 이항복 이응춘『李應春, 1545년(인종 1) ~ 1600년(선조 33) / 백사공파 생각하건대, 우리이씨는 대서(代序)가 멀리서 내려왔으니, 그 보첩(譜牒)과 사서(史書)에 드러나서 명백히 기록하여 전할 만한 것이 있다. 평장사(平章事) 알평(謁平)은 육부(六部)를 규합하여 신라시조를 도와 추대해서 맨 처음 신라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좌복야(左僕射) 핵(翮)은 덕을 전하고 아름다움을 이었으며, 명성을 드높이어 전대(前代)를 빛내고, 뒤에서 서업(緖業)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아주 드러난 두어 겨레가운데서 반드시 이씨를 으뜸으로 치는 바이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는 휘 성무(成茂)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증조이고, 그 아우인 성..

선조 비 증 정부인 경주이씨 묘지명-회재 이언적 조모

선조 비 증 정부인 경주이씨 묘지명 (先祖 妣 贈 貞夫人慶州李氏 墓誌銘) 손자 이언적 찬 부인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니,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지낸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조부는 휘가 지대(之帶)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고는 휘가 점(點)으로 생원(生員)이다. 생원이 주부(主簿) 최중운(崔仲雲)의 딸에게 장가들어 선덕(宣德) 계축년(1433, 세종15) 모월 모일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고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었다.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여주 이씨(驪州李氏) 휘 수회(壽會)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반듯하고 엄격하게 지켰으므로 종족들이 흠모하였다. 성화(成化) 정미년(..

숙인 해평윤씨 묘지석

인천부사 이성곤 배위 숙인 해평윤씨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 묘지석은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찬한 것이다. 1749년(영조 25) 찬함 묘지석이란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후세에 길이전하기 위하여 죽은 이의 덕이나 공적을 돌이나 자기에 새겨 무덤에 넣은 글을 말합니다. 본 묘지석은 일제시대 도굴 되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 인천도호부사 이성곤의 배위 숙인 해평윤씨[1664년(현종 5) ~ 1716년(숙종 42)] 묘지석이다. 본 묘지석은 총 4매로 4각 백자에 청화로 글씨를 새긴 것이다. 일본인 다카하시 마코토(高橋 眞) 씨가 2010년 4월 13일(화) 국립 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숙인 해평윤씨(淑人海平 尹氏)는 영의정 문정공 윤두수(尹斗壽)의 5대손으로 참찬 대제학 윤순(尹順)의 증손이며..

仁川府使 李成坤 配位 淑人尹氏墓誌銘

인천부사 이성곤 배위 숙인 해평 윤씨 묘지석(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仁川府使 李成坤 配位 淑人尹氏墓誌銘 淑人尹氏 생졸년 : 1664년(현종 5)~1716년(숙종 42) 윤순(尹淳) 撰 吾先子無他兄弟。獨與從父弟處士公。同宮而居。實有骨肉同氣之愛。其有子女。互視以己出。子女亦皆父母之。不知其異出也。內而諸姊妹。外而諸昆季。齒隊相逐。歡笑盈屋。然退而聽於閨梱之評。未甞不以處士公長女。李淑人爲之眉目焉。雖余晩出穉迷。亦敬愛淑人。以事吾姊者事之。中經憂戚分離。不復見兒時事。而淑人遽又不幸。兩家昆弟姊妹若干人。死喪自淑人始。則余之爲痛。又無間於喪吾姊矣。今淑人季子上舍君。袖所自爲狀。徵余以隧誌。嗚呼。文非吾有。若求其詳於淑人者。余又何辭焉。然淑人懿德喆行。旣咸且備。彰灼於內外。尊章諸親之頌久矣。顧何待於余言。盖淑人端溫柔婉。動止有則。生八九歲。已通內範諸書。粹然有女士風。大..

숙인 평성박씨 묘지명(淑人平城朴氏 墓誌銘) /창평공 이공린 선생 배위.

■ 숙인 평성박씨 묘지명(淑人平城朴氏 墓誌銘) (사육신 박팽년의 둘째 딸) [생졸년] 1440년(세종 22) 11월 9일 ~ 1523년(중종 17) 11월 27일 / 84歲 자식(子息)으로서 그 어버이를 후(厚)하게 장례를 모셔 드리려고 하는 것은 정(情)이요. 장사 지내고 묘지(墓誌)가 있다는 것은 예(禮)라 하겠다. 삼가 생각건대 선비 박씨(先妣 朴氏)는 계(系)가 평성(平城)에서 나왔는데 고려(高麗)의 대족(大族)이었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원상(元象)인데 나라 초기(初期)에 출사(出使)하여 관(官)이 가선대부 공조전서(嘉善大夫工曹典書)에 이르고 전서공(典書公)은 의영고시직 안생(義盈庫侍直 安生)을 낳았고 시직공(侍直公)은 공조판서 중림(工曹判書仲林)을 낳았으며 판서공(判書公)은 형조참판 팽년..

성균 진사 이공 휘 응춘 묘지명(成均進士李公諱應春墓誌銘)/상서공파

성균 진사 이공 휘 응춘 묘지명 (成均進士 李公 諱 應春 墓誌銘) 생각하건대, 우리 이씨는 대서(代序)가 멀리서 내려왔으니, 그 보첩(譜牒)과 사서(史書)에 드러나서 명백히 기록하여 전할 만한 것이 있다. 평장사(平章事) 알평(謁平)은 육부(六部)를 규합하여 신라 시조를 도와 추대해서 맨 처음 신라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좌복야(左僕射) 핵(翮)은 덕을 전하고 아름다움을 이었으며, 명성을 드높이어 전대(前代)를 빛내고, 뒤에서 서업(緖業)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아주 드러난 두어 겨레 가운데서 반드시 이씨를 으뜸으로 치는 바이다.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는 휘 성무(成茂)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증조이고, 그 아우인 성달(成達)은 통진 현령(通津顯令)을 지냈다. 현령이 병절교위(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