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성오당 이개립 유허비명(省吾堂李介立遺墟碑銘)

야촌(1) 2017. 10. 14. 11:41

성오당 이개립 유허비명

(省吾堂李介立遺墟碑銘)

 

후학 영가 권숙 찬(後學 永嘉 權璹 撰)


예천은 영남 명승지로서 금당 실[오늘날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 금곡리를 말함]이 손꼽는 고을은 우리나라 팔승지(八勝地)의 하나로서, 산천의 정기가 사람에게 뭉쳐서 뛰어난 사람을 낳게 된다. 옛적은 상고하기 어려우나 근대 일을 보건데, 당대 이름난 선비 성오당(省吾堂) 이 선생이 나신 터이다.

 

선생의 이름은 개립(介立)이요, 자는 대중(大仲)이요, 호는 성오당(省吾堂)이다. 배우는 사람이 역봉선생(櫟峰先生)이라고 하였다 이 씨는 관향이 경주요, 신라 때 휘 알평(謁平)이 시조로 상하 천여 년 간에 이름난 정승과 훌륭한 분이 많이 났었다. 고려 말에 휘는 달충(達衷)이요,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세상이 제정선생(霽亭先生)이라 했다.

 

일찍이 동북방 도순문사로 돌아올 때 태조가 아버지 환조(桓祖)를 모시고 뒤에 섰는데, 환조(桓祖)가 술을 권할 때 선생이 서서 받아 마시고, 태조가 술을 권할 때 선생이 꿇어앉아 자시니, 환조(桓祖)가 묻기를

『내가 준 술은 서서 자시고, 자식(子息)이 주는 술은 어찌하여 그리 받는가?』

하니 선생의 대답이

『자네 자제는 자네 집을 크게 성하게 할 것이라.』

하였다.
문정(文靖)의 손자가 휘는 흥상(興商)인데 이조판서로 계림 군이요, 계림의 손자가 휘는 숙정(肅靖)이니 남부령(南部令)이요, 아들 휘는 욱(昱)이니 대호군(大護軍)이요, 아들 휘는 선동(善童)이니 부호군(副護軍)으로 서울에서 용궁 대죽리(龍宮大竹里)로 낙향하였고 아드님인 휘 해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이며 그 배위(配位)는 예천 권씨(醴泉權氏) 종사랑 예(從仕郞 禮)의 따님이라.


선생은 명종(明宗) 병오(1546년) 8월 12일에 태어나서 형상과 모양이 우뚝하였고, 눈과 얼굴이 맑고 순수하여 뛰어나게 거인(巨人)의 풍채가 있어, 성장하여 소고(嘯皐) 박선생[朴承任]에게 배움을 받아 크게 칭찬을 받았다.

 

명종(明宗) 정 묘년(1567,명종 22)에 진사에 무진년에는 어모공(禦侮公) 병환으로 6일간 하늘에 비는 그 효성이 지극하였고, 상고를 당하야 물과 간장을 자시지 아니하며, 장사 후에는 두 형과 같이 묘하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복을 벗은 후에 어머니를 금당실로 모시어 봉양하는 절차가 부잣집과 같았다.


정해 년에 모친상을 당하니 연기가 50이 넘어도 집상함이 부친상과 같았고, 그 외에 실덕의행(實德懿行)은 다 들어 말할 수 없으나, 그 문사(文詞=문장속의 말)에 있어서도 다 그러하나 넉넉하고 아담하여 침착하고 여유가 있어서 책이 가득한 방에 혼자 단정히 앉아 마음을 가다듬어 글의 뜻을 생각하여 어진 이와 착한 이를 대한 듯 평상시에도 큰 병이 아니면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고, 위로는 공맹유학(孔孟儒學)의 근원을 찾고, 아래로는 성리학(性理學)을 사모하여 깊이 연구하고, 몸소 행하지 아니하지 못함은 굶주린 자가 발을 얻고 꼴 먹는 입에 즐거움이 같아야 성국 하여 밝고 넓음을 얻은 즉 그 나아감을 어찌 요량할까. 


만약 그 걷고 밟는 실상과 제행의 경계를 말 한 즉, 효우로서 기초를 삼고 충신으로 근본을 하여, 부모의 병에 똥을 맛보고 하늘에 비는 행실을 본받고, 초상을 당하여 여묘 3년간 정성을 지켜 집상함에 지나친 슬픔을 伯兄의 훈계를 힘써 따르니 형제 사이가 돈독함이요,

 

임란이 일어남에 한 고을을 격동하여 의병을 일으킴은 나라에 갚는 충성이요, 일찍이 소고(嘯皐=朴承任의 號) 한테 배우고 늦게 학봉에게 따름은 학문 길의 바름이요, 쌓은바 많으나 공부에 가벼이 보지 아니한 것은 천성의 높음이로다.

 

이로부터 선생께서 강(講)하신 바 본뜻이 높고도 먼 것을 우러러 생각이 강하여, 한 번이라도 스스로 겸손하고 공경함을 살피지 아니해도 늘 관심을 가짐이 진실로 옛날 책을 읽고 외우는데 있어 옛말과 과거의 행적을 많이 알아서 일에 따라 힘껏 행하야 항상 미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그 나이 80에 이르매 도가 더욱 크고 덕이 높은 즉, 더욱이 재지(才知)와 학식을 갖춰서 훌륭한 명성이 날로 드러나서 벼슬의 부름이 자주 내리니, 이것이 천작(天爵)을 닦으니 인작이 스스로 이르는 게 아니랴?

 

그러나 선생의 포부가 크게 넓음으로써 큰칼을 시험하였으나, 마침내 그 쌓은바 만분의 하나도 되지 못하였으니, 그 평일 덕(德)을 세우고 가르침의 멀리함이 심히 높고 낮음이 있으나, 백옥을 팔리지 못함은 세도의 한스러움이 없으랴?

 

그러나 선생의 도는 일시에 펴지 못하였으나 실덕과 제행이 남의 이목과 구비에 두루 알게 됨은 산악의 얽힌 뿌리와 일월이 천지에 밝게 함과 같았으니 어찌 쉽게 말하겠는가?

 

들으니 선생의 집은 대죽리(大竹里,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서 금당실(金塘室,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 중간에는 감천(甘泉)에, 나중에는 영주 갈산(榮州 葛山)으로 세 번이나 옮겼으니, 금당실에서 평리공(評理公) 후(後) 동거공(東渠公=榮門)과 익재선생(益齋先生) 후(後) 양서공(瀼西公=光胤)과 같이 우연히 한 마을에 계셔서 삼가계(三家契)를 모았고, 또 팔영문(八詠韻) 중 급월정(汲月井)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감천(甘泉)에는 봉산서당(鳳山書堂)을 창건하여 학도(學徒)가 많이 모였으며, 오 죽유(吳竹牖, 吳澐의 號), 이 양서(李瀼西,李光胤의 號), 김 성극당(金省克堂, 弘微의 號) 등 여러 선배의 차 운이 있고, 갈산(葛山)에 양졸당(養拙堂)이 있어 팔 영문(八詠韻)이 있으니, 모아서 보면 처음 근거는 금당 실이다.

 

그런고로 만년까지도 여기서 돌아가셔서 갈산으로 안장되고 배위는 영천 민씨(榮川閔氏) 헌납 휘 인(獻納 諱 寅)의 후손이며, 친사(進士) 휘(諱) 운서(雲瑞)의 딸로 선생보다 16년 먼저 돌아가셔서 묘는 선생의 묘 좌(墓左) 이다. 

 

아! 슬프다. 선생의 뛰어난 시문(詩文)이 이같이 적지 안 할 것인데, 세대 간 멀어지고 중간에 병란도 겪어서 거의 잃어버렸고, 다만 남은 두 권 책에 행장과 묘비명과 부록 문자(文字)가 모두 어진 분 큰선비의 저작(著作)이라 글자마다 천금(千金)이요, 만대(萬代)에 가도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터이니, 자손의 영세무궁한 보장이 되리라.

 

어느 날 후손 재현(宰賢)씨가 춘호(春頀), 창호(昌頀)와 같이 와서 유허비(遺墟碑)를 세운다고 해서 유고(遺稿)의 안본(按本)을 살펴서 서(敍)를 우(右)와 같이 쓰고 이어서 명하니
가로되, 아! 빛난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우리 동국(東國)의 거족(巨族)이라

신라로부터 조선조까지 명현이 연달아 많이 나셨네.

 

이에 조선조에 들어와서 많은 가운데도 앞섰느니라.
선생께서 일어나시니 큰 나무에 새싹이 돋았네.

 

타고난 성품이 밝고 바르며 얼굴이 빼어나게 맑았도다.
지혜와 기운이 넉넉함에 배움은 몸과 같이 자라났네.

 

즐거움이 있는 가정에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다.
부친의 환후(患候)에 있어 侍病(시병)하신지 몇 달이랴

 

대변(大便)의 달고 씀을 맛보아 병의 가감(加減)을 점쳤도다.

곧 상고를 당하여서는 슬픔과 파리함이 끊어질 것이다 

 

물과 식혜를 받지 아니하니 몸이 말라서 뼈만 남았소

백중씨(伯仲氏) 두 형과 같은 여막(廬幕) 한 집안에서

상 옷을 벗지 아니하고 피눈물로 또 3년을 지냈다.

 

향내 이웃도 감탄하지만 길가는 자도 흐느껴 하네.
자평의 효성이요 춘진(椿津)의 우애로다.

 

고금이 다르다 해도 세상에 뛰어난 일이로다.
네 간상을 당하여서도 앞의 상고와 같이 하였네

 

백리 되는 장사 길에 도보로 따르셨고
소리를 나라에서 듣고 참봉벼슬 내려왔도다.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일으켜서
적군의 길을 차단하여 한 지방이 평온하였다.

 

세 번이나 이사하였으나 금당에서 돌아가셨네.
삼가 계(三家契)을 모은 것이 오늘날까지 수계한다.

 

계첩에 있는 선현시가 더욱 오래되어도 빛이 나네.
금당 실 팔영시(八詠詩)는 속세의 잡념을 쓰셨도다.

 

급월정(汲月井)은 지금도 옛일 생각하여 크게 열어놓았다.
표석을 삼가 세웠으니
마음 쏟아 힘쓰는 일 한 지방의 자손이로다.

 

옥돌을 다듬어 새겼으니 우러러 생각함이 더욱 깊어 네.
누군들 자랑하지 않을까 이것은 후손의 정성 일세

 

오르내리는 영혼께서 즐거워 복을 줄 것이다.
천년만년이 지나도록 이 비와 같이 벗을 하리다.

 

내가 옥돌에 명(銘)을 하여 천년토록 밝게 보이리라.

을해 오월 일 후학 영가 권숙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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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