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사 송와 이종윤 묘지명 병서
(濟州牧使 松窩 李從允 墓誌銘 倂叙
[생졸년] 1431년(세종 13)~1495년(연산 1)/향년 65歲
이제주묘지명병서(李濟州墓誌銘 倂叙)
옛날 조선왕조가 융성할 때, 인재들이 등용되어 크고 작은이가 모두 그 능력을 발휘하였으니 선비가 이러한 때에 출생하여 쓰임이 되었으면 멀고 가까움과 큰 벼슬 작은 벼슬 따질 것이 없으며, 비록 백집사(百執事)의 끝이라도 족히 남에게 자랑할 수 있도다.
아!
훌륭하여라! 옛날 제주목사 이공은 영릉(英陵 >세종의 릉) 때에, 출생하여 광릉(光陵 >세조의 릉), 선릉(宣陵 >성종의 릉)의 즈음에 입신양명하여 대각(臺閣)에서 드날리고 세자서연에도 모시었으며 나가서는 한 지방을 맡아 다스려서 바다가 편안하였으니 비록 그 연대는 이미 오래되어 물과 구름과 함께 막연하지만 공의 풍채와 재능은 조금 상상할 수 있도다!
공의 휘(諱)는 종윤(從允)이고 자는 가정(可貞)이니 경주이씨다. 선계는 급량부(及梁部)에서 비롯되었으니 시조 휘 알평(謁平)이 신라시조를 도와 나라를 열었고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그 후로 유명한 사람이 많았으니 휘 천(蒨)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中書門下省의 正二品 벼슬)로 월성부원군이고 시효가 문효공(文孝公)이니 익재 문충공(益齋文忠公)이 바로 종형제(從兄弟=4촌간의 형제) 간이다.
이가 바로 공의 五대조이고 증조는 육(毓)이니 장작소감(將作少監=고려시대 將作監의 종4품 벼슬)이고 할아버지는 정견(廷堅)이니 첨서밀직사(簽書密直司=中樞院의 正三品 벼슬) 월성군(月城君)이고 아버지 형(衡)은 현감(縣監)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니 동정(同正=고려시대에, 육품이하의 문관과 오품 이하의 무관에게 주던, 정직(正職)에 준하는 명예직.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는 경우에 주었으며 정직 이름 밑에 붙여 썼다) 명리(明利)의 따님이다.
공은 선덕신해(宣德辛亥=1431년 세종 13)에 출생하여 32세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38세에 대과에 급제하니 성화무자(成化戊子=1468년 세조 14)년이었다.
영창전 참봉(永昌殿 參奉-경복궁에 세조의 혼전을 관리하는 종9품직)에서부터 예빈시 경력(禮賓寺經歷=빈객의 연향(燕享)과 종실 및 재신(宰臣)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관장하는 관서의 종4품 벼슬)과 내자시 주부(內資寺注簿=왕실의 각종 물자를 관장하는 관서의 종6품 벼슬)를 거쳐 사간원(司諫阮)에 들어가서 두 차례나 정언(正言=正五品 벼슬)이 되고 헌납(獻納=正五品)도 한번 역임하였다.
바른 말로 장기현감(長鬐縣監-경북포항의 옛지명)으로 폄직(貶職=벼슬이 전보다 낮아지거나 면직됨) 되기도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장령(掌令=正四品)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는 보덕(輔德=從三品)을 지냈고 그사이에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 정랑(正郞=正五品)과 제용감 첨정(濟用監 僉正=왕실의 의복이나 식품 공급을 관리하는 正三品 당하관 벼슬)과 봉상시(奉常寺), 사옹원(司饔院)에서 부정(副正=從三品)을 맡기도 하였다.
마침 탐라목사(耽羅牧使=正三品)가 죄로 파직되고 그 후임을 찾다가 드디어 계급을 승진시켜 통정대부(通政大夫=正三品의 품계)를 삼아 보내었다. 섬 풍속이 본래 사납고 거칠었다.
공이 인도하기를 예법으로 하고 정사를 지성으로 하니 치적이 이루어졌다. 고을 사람들이 글을 올려 더 유임을 청하고 특별히 중국 옷감 한 벌을 하사하며 2년 동안 더 머물게 하였는데 마침내 관아에서 돌아가니 향년(享年) 64세이다. 청송속현(靑松屬縣)의 문거역(文居驛) 북쪽 산에 장사 지냈다. 경주김씨에게 장가들었으니 관찰사(觀察使) 자행(自行)의 손녀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큰 아들은 계세((繼世)이고 다음은 계선(繼先)이다. 후손들이 대대로 경주 북쪽 단구리에 살았으니 승관한 어른이 겨우 십명 되며 공의 제사를 받든 사람은 10세손 의번(宜蕃)씨이다. 나를 찾아와서 묘지 문을 청한 이는 의번의 족제로서 이름이 의환(宜煥)이다.
공이 이미 돌아감에 자손들도 쇠약해서 좋은 사적이 날마다 인몰되다가 홀로 표남계 연말(表藍溪 沿沫)이 공의 묘문을 쓰면서 성대한 칭술이 있었고 동경인물지에는 이르되 「성질이 청검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으며 옛 사람의 풍도가 있다.」
제주명환기(濟州濟州名宦記)에는 정사는 맑고 간소함을 숭상하니 아전(衙前)이 사모하고 백성이 기뻐했다 하였다. 마침내 관아에서 돌아가시니 사람들이 매우 한탄하고 아까워했다. 청송 사람들이 공이 여막 살이 하던 곳을 가리키며 일컫기를 「이 효자의 초빈막사 했던 골짝이다 한다.」하니 이것이 족히 백세의 아래까지도 전할 수 있는 일이로다. 드디어 명(銘)을 하여 이르되,
그 사람을 모르거든 그 세상을 의론하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하면 그 후손을 보라 하였는데 돈독하고 후한 풍도는 효도와 삼감이 쇠퇴하지 않았도다.
공이 실상 내려준 것이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공의 무덤에 새겨야 하겠도다.
통정대부 전 행 돈령부 도정 목만중(睦萬中)은 짓다.
옮긴이 :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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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濟州墓誌銘 倂叙(이제주묘지명병서)
公諱從允字可貞。姓李氏慶州人也。鼻祖謁平。佐麗祖開國。官平章事。後世多名人。有諱蒨益齋文忠公之從父兄弟也。官平章事月城府院君謚文孝公。公之五代祖也。曾祖諱毓將作少監。祖諱廷堅簽書密直事月城君。考諱衡縣監。妣安東權氏司直明理之女也。生於 世宗辛亥。三十二擧司馬兩試。三十八登 世祖戊子第。是榜式年也。而除講用賦表取士於慶會池邊 殿。再試發策以問。公居乙科第七人。由永昌殿參奉。轉內資主簿禮賓經歷。諫院再爲正言一爲獻納。言事貶長鬐。憲府爲掌令。春坊爲輔德。間移春官佐郞正郞濟用監僉正司甕院副正。會耽羅守罪免。難其代。遂進公階通政以遣。及瓜島民上書願留。 璽書褒嘉。賜唐表裏一襲。特令仍任。居二年卒于官。得年六十四。歸葬于靑松屬縣文居驛北山。距其考墓火峴十餘里。娶鷄林金氏監司承友女。有二男。長繼世次繼先。今其子孫居慶州者。勝冠僅數十人。奉公祀者十世孫宜蕃。而其後屢絶。來求誌者宜蕃之族弟宜煥也。公生逢盛際。所自樹立如此。朝廷所以嚮用亦如此。而惜乎位未大闡。裔孫又無顯者。名蹟日就湮沒也。然表藍溪沿沬銘其碣。盛有稱述。且東京人物志曰性質淸儉。不爲表襮。有古人風。淸白見稱。濟州名宦記曰政尙淸簡。吏愛民悅。竟卒于官。人甚惜之云。斯足以徵信於百世之下也。始公委禽於金氏。其舊宅尙傳李濟州奠鴈廳。喪自耽羅還。靑松人指其停柩之地。爲李濟州殯幕洞。至今三百年猶然。其爲鄕人所艶慕又如此。銘曰。
徵於家而言行莫傳。詢諸人而名蹟亦湮湮。攷其時則。成宗盛際。藹藹朝多吉人。斯焉顯敭。其賢可知。我記其隧。据而詩之。<끝>
여와집 > 餘窩先生文集卷之二十 > 墓誌銘[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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