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書. 간찰. 시(詩) 62

이석규 선생 간찰(李錫奎先生 簡札)

이석규 선생 간찰(李錫奎先生 簡札) ↑크기는 41cm(가로) x 22.6(세로) 이고 피봉이 같이 배접된 상태이다. [이석규(李錫奎)] 이석규(1763-1842)선생의 자는 치성(穉成)호는 동강(東江) 본관은 경주이다. 항복의 7대손으로 경관(敬寬)의 아들이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한뒤 참봉,군수 등을 지내고 180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織)을 거쳐 1818년 대사성이 되었다. 1820년 대사간, 이듬해 공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1825년 형조·이조·공조의 판서를 역임, 이듬해 예조판서 ·우참찬이 되었다. 1827년 좌부빈객·예조판서,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우참찬에 재임,1830년 판의금부사,1882년 광주부 유수가 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이경억(李慶億) 간찰

↑크기 : 45㎝(가로) x 25㎝(세로) ● 이경억(李慶億) 1620(광해군 12)∼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이(錫而), 호는 화곡(華谷). 서울출생. 아버지는 판서 시발(時發)이며, 어머니는 승지 신응거(申應榘)의 딸이다. 7세에 아버지가 죽고 편모슬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재지가 출중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수재였다. 1644년(인조 22) 25세의 젊은 나이로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사서가 되었다. 1672년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천성이 밖으로는 엄격하였으나 내부로는 따스한 인정이 넘쳤다. 수염이 길고 풍채가 아름다워 일견 미남자였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명백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사의가 간..

이회경(李晦慶) 간찰(簡札)

●34世 이회경(李晦慶)/경주이씨 교감공파 1784년(정조 8) - 1866년(고종 3) 때인 조선 말의 유학자. 자(字)는 서구(敍九), 호(號)는 학남(鶴南).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양덕(養德)의 아들이다. 그는 경주(慶州)에서 태어나, 19세에 호곡 유범휴(柳範休)를 사사하여 더욱 연학에 힘써 일체의 명리(名利)를 끊고 정사체인(精思體認)하여 8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그를 두고 이른바 독신호학(篤信好學)의 군자라 하겠으나 성문(聲聞)이 나타나지 못하여 임하(林下)의 독서인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서로는 《학남집(鶴南集)》·《조문록(朝聞錄)》·《이학총도(理學總圖)》·《홍범도설(洪範圖說)》·《천화도(天花圖)》·《연우문답(蓮友問答)》·《이문록(異聞錄)》·《원시(原..

이광윤(李光胤) 간찰(簡札)

↑크기는 28㎝(가로) x 28.5㎝(세로)이다. ●이광윤(李光胤) ◇익재공 후 한당공파(閑堂公派) [문과] 선조(宣祖) 27년 (1594) 갑오(甲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8년 (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55위 ------------------------------------------------------------------------------------------------------------------------------------------- 1564(명종 19)∼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 창평현령(昌平縣令) 곤(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복시..

이광자(李光佐)의 간찰(簡札)

↑크기 : 59㎝(가로) x 31㎝(세로)이다. ● 이광자(李光佐) 1674(현종 15)∼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상보(尙輔)이다. 호는 운곡(雲谷)이다. 항복(恒福)의 현손이다. 성남(星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시현(時顯)이다. 아버지는 장령(掌令) 세구(世龜)이며, 어머니는 박장원(朴長遠)의 딸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697년 부수찬이 되었다. 1703년 수찬·부교리·교리를 거쳐 사헌부헌납·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08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의가 되었다. 1712년 부제학·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15년에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숙종이 소..

이조판서 이경휘에 대한 만사 - 이원정(李元禎) 撰

■ 挽 李判書 慶徽(벽오 이시발의 아들) 지은이>이원정(李元禎) 美璞崑丘瑞。靈芝太室花。業承詩禮學。名竝弟兄誇。蟾殿初攀桂。龍墀旋草麻。東曹郞宿煥。西掖繡氈奢。駿步超騏驥。神光淬鏌鎁。儒林望益顯。師席寵仍加。試按邦畿節。重開選部衙。宰衡推郾鄯。際會佇勛華。大閥能垂訓。諸郞克稱家。典刑猶在室。門巷可容車。薄劣叨聯派。高明幸棄瑕。蓬心賴正直。風節仰脩姱。世道期無曲。人生愴有涯。一哀秋景迫。泉路轉幽遐。 귀암집(歸巖集) 卷之一>詩 -------------------------------------------------------------------------------------------------------------------------------------------- [지은이소개] ●이원정(李元禎) 이원정(李元禎, 1622년 - 16..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화곡 이경억에게 보낸 편지.

■ 이석이(李錫爾) 경억(慶億)에게 줌 무술년(1658, 효종9) / 이 석이는 이경억의 자(字)임 요즈음 초봄 날씨에 영감의 순선하는 기거가 매우 좋으신가?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낭패스러운 일이 많아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번민하고 있네. 그러나 가까운 시일 안으로 형을 따라 호산(湖山)의 당발(棠茇) 사이에서 노닐게 될 것이므로 자못 기대하고 있네. 문공(文公 주자(朱子)의 《기보통편(記譜通編)》은 이미 간행이 끝났을 것으로 생각되니, 간절히 바라건대 먼저 인쇄한 한 질을 속히 보내 주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진강(進講)할 때 매우 요긴하기 때문이지 사사로이 청하는 것이 아니네. 이만 줄이네. [주1] 이석이(李錫爾)는 조선의 현종(顯宗)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화곡(華 谷) 이..

이경휘(李慶徽)의 만시(挽詩)

淸溪先生集附錄/홍위(洪葳) 著 ■ 挽詩 李慶徽 撰 君實孝於親。劬勞思罔極。高堂致榮養。百年奉歡樂。志願但如此。餘外非所欲。奈何子先逝。天意終難測。 君實賢且才。先朝早拔擢。蓬山賜長暇。經幄承殊渥。靑雲不盡翰。黃壤忍埋玉。歎息萬事空。斯人豈易得。 君實遽如許。嗚呼長已矣。善人不必壽。神理安足恃。夢幻四十年。粉旌觀察使。親朋送祖車。淚洒東逝水。 吏曹參議李慶徽 ---------------------------------------------------------------------------------------------------------------------------- 竹南堂稿附錄 ■ 挽詞 李慶徽 撰 金閨玉署早蜚英。白首三朝更老成。雅望一時推藝苑。崇班八座近台衡。山陰筆陣傳眞法。洛社風流際太平。萬事居然輸夢幻。西郊霜月逬丹旌。李慶徽 ----..

이경휘(李慶徽)에게 보낸편지 - 송준길(宋浚吉) 書

■ 이 군미[李 君美-경휘(慶徽)] 에게 보냄 경진년(1640, 인조18) 글 : 송준길(宋浚吉) 지난가을에 멀리 찾아 준 것이 실로 천만뜻밖이어서, 난리를 겪은 뒤로 그립던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위로되었네. 그러나 겨우 반나절 동안 정담을 나누었을 뿐이어서, 쌓인 회포를 풀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럽네. 요사이 세모(歲暮)의 추운 날씨에 해교(海嶠)에서 지내시는 제반 정황(情況)이 편안하신가? 그립고 염려되는 마음 갑절이나 더하다네. 나는 마음과 골수(骨髓)에 병이 들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조용히 조화(造化)의 구물(舊物)로 돌아가고자 할 뿐, 이 밖에는 다른 생각은 없다네. 근자에 듣건대 서쪽 소식이 매우 좋지 않다 하니, 앞으로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네. 그러므로 기미를 보고는 먼저 떠나서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