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書. 간찰. 시(詩)

이광자(李光佐)의 간찰(簡札)

야촌(1) 2014. 5. 16. 21:27

↑크기 : 59㎝(가로) x 31㎝(세로)이다.

 

● 이광자(李光佐)

 

1674(현종 15)∼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상보(尙輔)이다. 호는 운곡(雲谷)이다. 항복(恒福)의 현손이다. 성남(星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시현(時顯)이다. 아버지는 장령(掌令) 세구(世龜)이며, 어머니는 박장원(朴長遠)의 딸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697년 부수찬이 되었다.

1703년 수찬·부교리·교리를 거쳐 사헌부헌납·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08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의가 되었다.

1712년 부제학·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15년에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숙종이 소론을 배척해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718년에는 예조참판에 등용되었다.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을 거쳐 사직(司直)에 있으면서 왕세제인 연잉군 금(延礽君昑 :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반대하여 경종이 이를 취소하게 하는 등 경종 보호에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1721년과 이듬 해에 각각 김일경(金一鏡) 등의 소(疏)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이 벌어진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로써 노론이 제거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자 예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 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72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725년(영조 1)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당하고 만다. 1728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다시 등장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경종실록≫·≪숙종실록≫ 보유편의 편찬을 맡았다.

 

1728년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노론측에서 김일경의 잔당이 난을 일으킨 것이라고 규탄했지만 영조는 끝내 소론정권으로 난을 평정하였다. 이 난이 평정된 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다. 1729년에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영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1730년에는 소론의 거두로서 영조에게 탕평책을 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막도록 건의했다. 

이 때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론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여, 노론과 소론의 연립정권을 세웠다. 

이로써 재임 기간에는 비교적 격심한 당쟁이 없도록 하는 데 힘썼다. 1733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37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740년 영의정으로 재직하던 중 박동준(朴東俊) 등이 중심이 되어 삼사의 합계(合啓)로 호역(護逆)한 죄를 들어 탄핵을 해오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1755년 나주벽서사건으로 소론의 준소계열이 무너질 때 관직이 추탈되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