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21

혜비이씨(惠妃李氏)

■ 혜비이씨(惠妃李氏) 혜비(惠妃)는 황제, 제후. 왕의 비(妃)에게 붙는 작호(綽號) 이다. 「혜비이씨(惠妃李氏, ?~1408년(태종 8) 음력 2월 3일」는 고려의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의 제2비이다. ●생애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로 성리학자로 검교 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을 지낸 이진(李瑱)의 손녀이고, 계림부원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딸로, 어머니는 익재의 재취(再娶) 부인인 수춘국부인 박씨(壽春國夫人朴氏) 소생이다. ●왕비시절 공민왕(恭愍王)의 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1365/중국 원나라 황족 위왕(魏王)의 딸」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노국대장공주를 비롯한 여러 재상(宰相)들이 공민왕에게 명문가(名門家)의 여식으로 후비를 들일 것을 청하였다. 그렇게 해서 간택된 사..

[漢詩] 어촌 낙조(漁村落照)

漁村落照(어촌 낙조) 어촌의 저녁노을 落日看看銜遠岫(낙 일간 간 함원 수) 떨어지는 해는 차차 먼 산봉우리에 빠지고 歸潮咽咽上寒汀(귀 조인 인상 한정) 몰려오는 조수는 철썩철썩 찬물 가를 친다. 漁人去入蘆花雪(어인 거 입 로 화설) 고기 잡는 사람들은 흰 갈꽃 속으로 들었는데 數點炊煙晩更靑(수점 취연 만경 청) 두어 점 밥 짓는 연기 날 저물어 더욱 푸르다. 지은이 : 익재 이제현 1287년(충렬왕 13) ~ 1367년(공민왕 16) ※이 詩는 익재공 께서 전남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 인근에 들렸을 때 지은 詩입니다.

익재 진자찬(益齋眞自贊)

↑이제현 선생 유상(遺像). 《익재난고》 앞부분에 판각되어 있다. 초상화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까 걱정되어 문집을 만들 때 새로 새겨 넣었다 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다. 익재 진자찬(益齋眞自贊) 홀로 공부하여 고루하였으니 도를 들은 것이 자연 늦었도다. 불행은 모두 자신이 만든 것,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랴.백성에게 무슨 덕을 베풀었다고,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단 말인가. 요행으로 그렇게 된 일이기에 온갖 비난을 불러들였구나. 못나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그려서 또 무엇에 쓰겠는가만 나의 후손에게 고하여 주노니 한 번 쳐다보고 세 번 생각하여 그런 불행 있을까 경계하며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노력하라. 만일 그런 요행 바라지 않는다면 불행을 면하게 될 것을 알리라. 《익재난고(益齋亂藁)》 제9권- 선생이 자신..

중국 '명필 법첩' 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

■중국 '명필 법첩' 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명필대가들의 글씨 탑본(搨本)전《서예의 길잡이 중국 법첩(法帖) 전시회》가 2014년 12월 16일(화)부터 2015년 3월 15일(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용산) 상설전시관에서 열립니다. 법첩(法帖)이란 옛 명필대가의 글씨를 감상하고, 임서 할 때 교본으로 쓸 수 있도록 전통 방식으로 복사한 책자(冊子) 모양의 서첩을 말합니다. 예로부터 한자문화권에서는 ‘서여기인(書如其人)’ 이라 하여 글씨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글을 쓴 사람의 모든 것(이를테면 그 사람의 성품, 학문적 성취, 인격적인 수양, 사물을 관조하고 사유하는 지혜등 한 개인의 인문학적 총량지수 같은 것)으로 보아왔습니다. ↑순화각첩(Model letters from Chunh..

동암 이진선생 약사(東菴李瑱先生略史)

■ 동암 이진선생약사(東菴李瑱先生略史) 이진「李瑱,1244년(고종 31)~1321년(충숙왕 8)」은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초명은 방연(方衍), 자(字)는 온고(溫古), 호(號)는 동암(東菴), 본관은 경주(慶州),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금서(金書)의 후손으로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내고 상서성좌복야(尙書省左僕射)에 추증된 핵(翮)의 아들이고 익재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백가에 능통하여 신흥관료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박통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국재 권부((菊齋 權溥), 역동 우탁(易東 禹倬),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이재 백이정(彝齋 白頤正), 덕재 신천(德齋 德齋)과 함께, 안향(安珦) 문하의 이름난 육군자(六君..

연암 박지원선생 묘(燕巖 朴趾源先生墓),

■연암 박지원 묘(燕巖 朴趾源 墓),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1805년(순조 5). 12월 10일(음력 10월 20일)」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필균(弼均)이고,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황해북도 개성시 은덕동의 황토고개 남쪽 기슭에 있는 그의 무덤이다. 일제의 탄압말살정책으로 그의 무덤도 행처를 모르다가 1959년에 묘지명이 발견되어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2011년도에 북측에서 다시 조성되었다.

귀신도 몰래 이름이 바뀐 문성공 안향선생(제1부 行狀編)

수선지-성균관 작성자 : 이효재 ㅣ 작성일 : 2011년 8월 22일 -------------------------------------------------------------------------------------------------------------------------------------------- 귀신도 몰래 이름이 바뀐 문성공 안향선생(제1부 行狀編) [俛宇先生文集-곽종석 지음]에 있는 [書晦軒安先生行狀後]에 쓰여져 있기를, 맹자(孟子) 뒤 1500년이 되어 공자(孔子)의 도(道)로 천하 만세를 인도한 이는 회암(晦庵) 주자(朱子)이다. 기자(箕子) 뒤 2000여년 만에 미개하였던 우리나라를 회헌 안선생이 공자를 숭모하도록 하고, 주자학(朱子學)을 창도하여 참된 유학의 연원을 무..

익재 이제현

[연재소설] 후기- "삼불망"을 마치며--저자 우종철/2010. 08. 31. 12:08 ■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생졸년 :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 80평생을 원나라의 고려 지배라는 미증유의 민족수난기를 살면서 고난의 역사를 타고난 숙명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가 40여 년간의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강화도로부터 출륙환도(出陸還都)하여 원나라에 예속된 지 17년 후인 1287년(충렬왕 13)에 태어나 원이 망하기 1년 전인 1367년(공민왕 17)까지 살다간 역사의 증인이다. 그의 일생은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에 대한 원의 내정간섭과 그에 따른 인종(忍從)과 굴욕의 시대와 때를 같이 했다. 그는 7대왕(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네 번이나 재상..

권국재(權菊齊)의 만사(挽詞) - 이제현

익재난고 제4권 ■ 문정공(文正公) 권 국재(權菊齊)의 만사(挽詞)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청화한 관직 거쳐 상태에 이르니 / 揚歷淸華到上台 임금은 오로지 동량같이 여기네 / 君王獨倚棟樑材 시서는 집에 가득해도 번소 같은 첩이 없고 / 詩書滿屋無樊素 잠리가 많은 중에 노래 같은 자손이 있네 / 簪履盈門有老箂 천세의 학은 삼교의 달에 돌아갔고 / 千歲鶴歸三嶠月 구연의 용이 오경의 우뢰(雨雷)에 변했네 / 九淵龍化五更雷 재주 없어 높은 덕을 명할 수 없고 / 才疏未足銘淸德 옥경대 옛 생각에 눈물만 뿌리네 / 淚酒當年玉鏡臺 평생에 덕망과 지위를 겸전하였고 / 平生德爵已雙全 수명은 곽분양(郭汾陽)보다 일 년이 더하네 / 壽比汾陽更一年 좌망이지 질병은 아니라 여겼는데 / 將謂坐忘非示病 시해하여 도선할 줄 어이..

익재집 중간서(益齋集重刊序)

■ 익재집 중간서(益齋集重刊序) 지은이 : 임상원(任相元) 익재(益齋)는 여조(麗朝)에 있어 이 문순『李文順 : 문순은 이규보(李圭報)의 시호』보다는 조금 나중이고, 이 문정(李文靖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보다는 먼저였다. 문순의 문장은 호방하며 문정의 문장은 전아했는데 이 두 공은 모두 조예가 지극하여 함께 대가(大家)로 일컬었다. 그러나 익재의 문장은 잘 다듬은 옥처럼 아주 유려하여 한 시대의 동량(棟梁)이 되어 개천(開天)의 문풍이 많이 있었다. 웅대함은 두 공만 조금 못하다 할지라도 그 품격만은 낫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공(公)은 먼 만 리 밖까지 임금을 모시고 가서 비상한 공로를 세운 것이 사책에 빛나게 드리워졌으니 한갓 문장만이 후세에 표준 될 뿐 아니었다. 그러나 공의 문집이 여러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