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집 중간서(益齋集重刊序)

야촌(1) 2010. 12. 10. 19:20

 ■ 익재집 중간서(益齋集重刊序)

 

지은이 : 임상원(任相元)

 

익재(益齋)는 여조(麗朝)에 있어 이 문순『李文順 : 문순은 이규보(李圭報)의 시호』보다는 조금 나중이고, 이 문정(李文靖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보다는 먼저였다. 문순의 문장은 호방하며 문정의 문장은 전아했는데 이 두 공은 모두 조예가 지극하여 함께 대가(大家)로 일컬었다.

 

그러나 익재의 문장은 잘 다듬은 옥처럼 아주 유려하여 한 시대의 동량(棟梁)이 되어 개천(開天)의 문풍이 많이 있었다. 웅대함은 두 공만 조금 못하다 할지라도 그 품격만은 낫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공(公)은 먼 만 리 밖까지 임금을 모시고 가서 비상한 공로를 세운 것이 사책에 빛나게 드리워졌으니 한갓 문장만이 후세에 표준 될 뿐 아니었다. 그러나 공의 문집이 여러 차례의 난리에 대부분 유실되어 간직한 자가 적으므로 옛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모두 유감으로 여겼었다.

 

허요수(許堯叟)가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을 때 그 부중(府中)에 옛날 판본이 있는 것을 보았으나 글자가 모두 이지러져 읽을 수가 없었다. 대개 공은 본래 경주 사람이었기에 옛날 이 판본을 새겨 경주의 문헌(文獻)을 대비했던 것인 듯하다. 드디어 그 중 좋은 본(本)은 사서 장차 속간하려 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는 편지가 왔으므로 나는 요수의 뜻을 기특하게 여겼으며, 또 감동하는 바가 있다.

 

대개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문학을 숭상해 왔으나 그 실에 있어서는 질박한 풍습을 앞세우고 문장만 일삼기를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여조에는 훌륭한 문장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지금 세상에 전해진 문집이 마치 샛별처럼 빛나는데, 《동문선(東文選)》에 들어 있는 것은 한 시대로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고 한 사람에게는 몇 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라고 어찌 다 버릴 것이겠는가? 그 전고(全稿)들을 다 간행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사가[四佳 : 서거정(徐居正)의 호]와 허백[虛白 : 성현(成俔)의 호]은 아조(我朝)의 대가였으나 그 문집이 모두 산실되었다. 내가 일찍이 비각(秘閣)의 목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세대가 먼 여조에 있어서랴!

 

근세의 군자들은 그 지위가 현달하면 죽은 후에는 반드시 한 책의 문집이 출판된다. 판각하는 일은 모두 고을에 부탁하여 영구히 전하도록 하는데 이런 풍습이 퍼지자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해져 이 수많은 책들을 간직하려면 대지(大池)로 서가를 만든다 하더라도 다 저장할 수 없을 듯하다.

 

지금 요수(堯叟)는 세속에서 하는 일은 싫어하여 하지 않고 옛것에 소급하여 몇백년 전의 썩은 뼈를 영화롭게 해서 예원(藝苑)의 다행으로 삼으려 하니 그 뜻이 참으로 아름답다 하겠다. 내가 이 때문에 승낙하고, 서문을 써서 그의 요청에 색책(塞責)하는 바이다.

 

계유(癸酉) 1693년 정월 6일 서하(西河) 임상원(任相元)은 찬한다.

 

[주해(註解)]

[주01]개천(開天)의 문풍(文風) : 개천은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인 개원(開元)ㆍ천보(天寶)를 가리킨 것으로 곧 성당(盛唐)의 문체(文體)를 말한 것이다.

 

[주02]대지(大池) : 한(漢) 나라 건장궁(建章宮)에 있던 태액지(太液池)로 장안(長安)에 있는데, 50장(丈)이나 되는 점대(漸臺)가 있으며 건장궁은 천문 만호(千門萬戶)여서 크기로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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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恬軒集卷之二十九


益齋集序

益齋於麗朝。去李文順未久也。在李文靖之先。文順之辭。宏爽。文靖之辭。典勁。二公各極其詣。並稱大家。若益齋。淸麗雕潤。棟梁一世。綽然有開天之風。其大固遜於二公。其品亦不當處乎中也。公萬里勤王。彌縫邦闕。非常之勳。爛然竹帛。不徒文彩之表後。獨其遺集。遘亂屢毀。人鮮藏者。好古者憾焉。許堯叟出尹月城。覩府中有舊板。而刓缺不可讀。蓋公爲州人。舊嘗梓之。以備州中文獻者也。遂購得善本。將謀續梓書。要余以弁卷之語。余旣奇堯叟之志。且有所感。夫吾東。固右文矣。其實稍質而不好事。麗朝文章之家蔚然其多矣。到今遺文之傳世。落落如晨星。入東文選者。代不過數人。人不過數篇。其不收者。豈盡可棄者哉。惜其全稿無爲人鏤行也。四佳,虛白。我朝之大家。其集已放佚。余嘗求諸祕閣之錄。亦無見焉。況麗之尤遠也哉。近世君子苟其身都顯位。其沒也。必有一編集出焉。剞劂之役。屬諸州道。以圖不朽。風流旣扇。日新月盛。簡秩之繁。雖以大地爲架。恐不能載也。今堯叟厭棄。而不爲逖溯古昔。欲榮累百祀之朽骨。以爲藝苑之幸。其志固可嘉也。余故諾而序之。以塞其請。恬軒集卷之二十九

<끝>

 

[지은이 인물소개]

 

●임상원(任相元)

   [생졸년] 1638년(인조 16)∼1697년(숙종 23).

   [문과] 현종(顯宗) 6년(1665) 을사(乙巳) 별시(別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문과] 숙종(肅宗) 5년(1679) 기미(己未) 중시(重試) 병과(丙科) 2위

   [생원진사시] 현종(顯宗) 1년(166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字)는 공보(公輔), 호(號)는 염헌(恬軒)으로,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중(重)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목사 갱생(更生)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5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평안도도사를 지냈으며, 1671년 정언을 거쳐 용강현령이 되었다가 1673년 교리로 승진되었다.

 

1676년(숙종 2) 청풍부사로 있을 때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80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에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1684년 대사간에 이어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686년 대사헌을 지내고, 1687년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공조판서와 우참찬·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문명이 있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유배시킬 때 전야(田野)에 방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염헌집》 10책과 《교거쇄편 郊居瑣篇》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