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21

민족의 자존심, 이제현

이제현「李齊賢 :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은 천품이 후덕하고 진중했으며 또한 학문이 깊고 넓어 그의 이론과 벌이는 일은 무엇이든 다 볼만한 것이 있었다. 원(元)의 부마국(駙馬國), 고려(高麗)고려 말 강대해진 원(元)의 내정 간섭으로 고려는 25대 충렬왕(忠烈王 : (1236~1308) 부터 반드시 왕의 시호(諡號)에 충(忠) 자를 붙여야 했다. 이후 고려는 25대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 : 1275~1325)→충숙왕(忠肅王 : 1294~1339)→충혜왕(忠惠王 : 1315~1344)→충목왕(忠穆王 : 1337~1348)→제 30대 충정왕(忠定王 : 1337~1352)까지 굴욕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그 기간 고려는 태자(太子)가 원(元)의 연경(燕京 : 오늘날의 베이징)에..

경주 구강서원 420년 만에 금녀구역 개방

'금녀의 구역' 경주 구강서원, 420년만에 개방 ◀이곳을 클릭하면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 경주 구강서원 420년 만에 금녀구역 개방 기사입력 2007-09-29 06:17 조선시대 사립대학 역할을 한 서원에는 큰 업적을 남긴 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여성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데 경주 구강서원이 420년만에 처음으로 여성들의 참배를 허용해 관심을 모았습니다. 임한순 기자의 보도입니다.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구강서원입니다.목은 이색의 스승이자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태두인 익재 이제현 선생을 모시고 있습니다.1687년 세워진 뒤 여성들에게 굳게 닫혀 있던 구강서원의 문이 420년만에 처음으로 어제(28일) 열렸습니다. 봄 가을 두 차례 ..

고려 충선왕이 티벳으로 유배간 이유는?

1. 700년전.... 충선왕은 티벳으로.... 만 오천리의 유배길을 갔다. 고려 26대왕인 충선왕! 마흔 여섯이 되던 1320년, 예기치 못한 운명을 맞게 된다. 한 나라의 국왕인 그에게 유배 명령이 떨어진다. 충선왕의 유배지는 당시의 토번으로, 지금의 티벳! 그곳에 도착하는데만도 반 년이 걸리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그럼 고려 충선왕이 티벳까지 유배를 간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 26대 충선왕! 공민왕이나 혹은 조선 시대 여러 왕들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죠. 그런데 그는 우리 역사상 그 어느 왕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왕입니다. 먼 이국 티베트까지 유배를 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티벳이라면 여기, 아시아 서쪽 끝이죠. 지도상으..

혜비이씨(惠妃李氏)

■ 혜비 이씨(惠妃 李氏) 혜비(惠妃) 이씨(李氏)는 계림인(鷄林人)이니 부원군(府院君)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여섯째 딸이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아들이 없으매 재상(宰相)들이 명가(名家)의 딸로써 자식 둘 자를 들이도록 청하니 이에 뽑아 들여서 혜비(惠妃)로 봉(封)하였다. 홍륜(洪倫)과 한안(韓安)이 여러 비(妃)를 강제로 욕(辱)보일 때에 비(妃)는 거절하여 따르지 않았고 공민왕(恭愍王)이 이미 시해(弑害) 당하매 머리를 깎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어 정업원(淨業院, 오늘날 서울 종로구 숭인동 비구승들이 거처하는 청룡사(靑龍寺)/고려 의종(毅宗)12년(1158) 희종법사가 창건하였다함)으로 들어갔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金基德〉

이제현(李齊賢)의 고려문과 급제

■ 이제현(李齊賢)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충렬왕 27년 신축방(忠烈王 二十七年 辛丑榜) [고려사마]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2위(2/77) ------------------------------------------------------------------------------------------------------------------ [인적사항] ◇자(字) : 중사(仲思) ◇호(號) : 익재(益齋)/역옹(櫟翁) ◇시호(諡號) : 문충(文忠) ◇생졸년(生卒年) : 1287 (충렬왕 13) - 1367 (공민왕 16) ◇합격연령 : 15세 ◇본관(本貫) : 慶州 [이력사항] ◇관직(官職) : 정승(政丞) ◇기타..

은송정(隱松亭)

■ 은송정(隱松亭) 이영우(李英雨 :1853-1913). 경주이씨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의 10대손이다. 자(字)는 문칙(文則), 호(號)는 은송(隱松), 1853년(철종 4) 9월 29일 오늘날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태어났으며, 향토와 벗을 좋아하고 사랑 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향중 벗들이 존경 하였다. 1959년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 2리(안개실 또는 상가곡) 안산 선영아래 후손들이 그의 학문(學問)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재실 (齋室)이다. ■ 은송정기(隱松亭記) 저번에 고령(高靈)의 이태희(李台熙)라 하는 분이 한권의 가승(家乘)을 가지고, 내집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請)하고 말하기를, 이는 우리집의 파보(派譜)이고, 하나는 ..

龍野尋春(용야심춘)

■ 龍野尋春(용야심춘) 용야에서 봄을 찾아 (松都八詠 중 6首) 益齋 李齊賢(익재 이제현) 偶到溪邊藉碧蕪(우도계변자벽무) 우연히 시냇가에 이르러 푸른 풀 깔고 앉았는데, 春禽好事勸提壺(춘금호사권제호) 봄새도 흥에 겨워 술 마시기를 권하네. 起來欲覓花開處(기래욕멱화개처) 일어나 꽃 핀 곳 찾으려 하였더니 度水幽香近却無(도수유향근각무) 물 건너 그윽한 향기, 가까이 가면 문득 없어지네.

익재(益齋)의 문답

익재(益齋)의 문답 상왕(上王) - 충선왕(忠宣王)이다. 이 이제현(李齊賢)에게 묻기를,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문물(文物)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일컬어져 왔다.그런데 지금 배우는 자들이 모두 석자(釋子승려(僧侶))를 따라서 장구(章句)를 익히고 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하므로,이제현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태조께서는 나라를 처음 개창하시느라 한가한 틈이 없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먼저 학교를 일으켜서 인재를 길러 내었으며,한 차례 서도(西都)에 행차하시어 수재(秀才)정악(廷鶚)에게 명하여 그를 박사로 삼아서 육부(六部)의 생도들을 가르치도록 하고,이들에게 채백(綵帛)을 내려 권면하고 녹미(祿米)를 반사(頒賜)하여 배양하였으니,그 마음 쓰심이 얼마나 절실하였던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

益齋公派 世界圖.

경주이씨 익재공파세계도(益齋公派世系圖) 17世 제현(齊賢) │ │ 18世 서종(瑞種)-달존(達尊)-창로(彰路) 밀직공파조 시랑공 운와공 밀직공 (侍郞公) (雲窩公) (密直公) │ ┌─┘ │ │ │ 덕림(德林)-수림(壽林)-학림(學林) 19世 │ │ ┌─┘ ┌───┘ │ │ │ ┌┘ │ │ │ 담(擔) 20世 │ │ │ │ │ │ │ 희(暿) 21世 │ │ │ 청호공파조(淸湖公派祖) │ │ │ │ │ │ │ │ 숭의(崇義)-영도(崇道)-인도(仁道) 20世 │ │ │ ┌──┘┌───┘ │ │ │ │ ┌─┘ │ │ │ │ 빈(彬) 21世 │ │ │ │ │ │ │ │ │ 지하(之夏) 22世 │ │ │ │ │ │ │ │ │ │ │ │ │ │ 산수(山壽) 23世 │ │ │ │ │ │ │ │ │ │ │ │ │ │ 후..

익재 이제현의 저작(著作)

↑益齋 李齊賢先生 畫像(國寶 第110號. ● 익재 초상의 주해. 고려 후기 문신(高麗 後期 文臣)이자 학자(學者)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 1287∼1367) 先生의 초상화이다. 이제현은 원(元) 나라의 만권당에서 조맹부 등과 교류하며 고려에 신학문과 사상을 소개하고, 성리학을 전파,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호(號)는 익재(益齋), 역옹(櫟翁)으로,『국사』『역옹패설』등을 남겼다. 위의 익재 초상(益齋肖像)은 원나라 화가 진감여가 그린 고려 말의 문신 익재 이제현의 전신 초상화이다.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면 상단에 적혀 있는 화기에 의하면, 이제현이 33세 되던 해인 1319년에 충선왕을 모시고 중국 저장성[절강성]의 보타산 사찰에 강 향하기 위해 갔을 때, 왕명으로 항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