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혜비이씨(惠妃李氏)

야촌(1) 2019. 1. 25. 00:34

■ 혜비이씨(惠妃李氏)

 

혜비(惠妃)는 황제, 제후. 왕의 비(妃)에게 붙는 작호(綽號) 이다.

「혜비이씨(惠妃李氏, ?~1408년(태종 8) 음력 2월 3일」는 고려의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의 제2비이다.

 

●생애와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로 성리학자로 검교 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을 지낸 이진(李瑱)의 손녀이고, 계림부원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딸로, 어머니는 익재의 재취(再娶) 부인인 수춘국부인 박씨(壽春國夫人朴氏) 소생이다.

 

●왕비시절

공민왕(恭愍王)의 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1365/중국 원나라 황족 위왕(魏王)의 딸」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노국대장공주를 비롯한 여러 재상(宰相)들이 공민왕에게 명문가(名門家)의 여식으로 후비를 들일 것을 청하였다.

그렇게 해서 간택된 사람이 혜비이씨(惠妃李氏)로, 혜비는 1359년(공민왕 8년) 음력 4월 24일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막상 혜비(惠妃)가 들어오자 노국대장공주는 질투를 느끼고 음식을 들지 않기도 하였는데. 1372년(공민왕 21년) 음력 10월, 공민왕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뽑아 설치한 자제위(子弟衛) 소속의 한안(韓安), 홍륜(洪倫) 등을 시켜 자신의 후비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들이 생기면 그 아들을 자신의 소생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때 익비한씨(益妃韓氏) 등은 이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실제로 임신까지 하였으나 혜비(惠妃)와 정비안씨(定妃安氏, ? ~ 1428년), 신비염씨((愼妃廉氏)는 그 요구를 목숨을 걸고 끝까지 거부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공민왕이 시해된 후에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어 정업원(淨業院, 오늘날 서울 종로구 숭인동 비구승들이 거처하는 청룡사(靑龍寺)/고려 의종(毅宗)12년(1158) 희종법사가 창건하였다함)으로 들어갔다.

 

공민왕 사후에도 조정에서는 그녀를 비롯한 정비안씨, 신비염씨 등에게 계속 일용품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1388년(창왕 즉위년) 음력 12월 헌사(憲司)에서 그녀들이 정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러한 일용품의 지급을 중단하고 세록(歲祿)만 지급케 하도록 청하였다.

 

●고려 멸망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혜화궁주(惠和宮主)로 불리었으며, 1408년(태종 8년) 음력 2월 3일 사망했다.

이때 태종은 쌀과 콩 30석, 종이 100권을 부의로 내렸다. 이때 혜비는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녀가 사망하자 의안대군(宜安大君, 태조 이성계의 8남)의 李芳碩의 처 심씨를 대신 주지로 삼았다.

 

그녀의 능지에 대하여는 필자의 판단으로선 지금의 청룡사 부도 밭내 여러 오랜 부도 중 어느 한 부도일 것으로 판단되나 기록이 남아있질 않아 아직 고증하질 못했다. 시호는 혜비(惠妃)이다. 남편 공민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가족 관계

◇아버지 : 이제현 (李齊賢, 1287년 ~ 1367년)

◇어머니 : 수춘국부인 박씨(壽春國夫人朴氏, 생몰년 미상)

◇남편 : 공민왕 (恭愍王, 1330년~1374년, 재위:1351년~1374년) 고려 제31대 왕

◇외조부 : 박거실(朴居實, 생몰년 미상)

 

●혜비이씨가 등장한 작품

《개국》(KBS, 1983년~1983년, 배우: 조남경)

《신돈》(MBC, 2005년~2006년, 배우: 문정희)

 

●자제위(子弟衛) : 고려 후기 공민왕 때 국왕의 신변에 대한 호위 겸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뜻에서 설치한 관청

으로 대언 김흥경으로 하여금 총관하게 했다.

 

●정업원(淨業院) : 고려·조선 시대 도성(都城) 내에 있었던 여승방(女僧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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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사 홈페이지

◇익재 묘지명 병서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혜비〉항목

◇《고려사》권39〈세가〉권39 - 공민왕 8년 4월 - 이제현의 딸을 맞아 혜비로 책봉하다

◇《고려사》권89〈열전〉권2 - 노국대장공주

◇《고려사》권131〈열전〉권44 - 홍륜

◇《고려사》권89〈열전〉권2 - 혜비 이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정업원구기〉항목

◇ 1년을 기준으로 지급되는 녹읍따위를 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녹읍〉항목 참고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창왕 즉위년 12월 - 헌사에서 혜비 등에 대한 일용품 지급을 중지하라고 건의

  하다

◇《조선왕조실록》태종 8년(1408) 2월 3일 1번째 기사

 

집필 : 이재훈

 

 

↑청룡사(靑龍寺) 부도(浮屠) 밭(소재지>서울 종로구 동망산길 65(숭인동 17-1)

 

 

 

↑정업원 구기비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각유형문화재 제5호)/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산 3번지

   현판글씨는 영조대왕이 직접쓴 어필이다.

 

청룡사 구내 남서쪽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정업원구기(淨業院 舊基)가 있다. 현재 사방 2.4m 정도되는 1칸 집의 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영조대왕이 친히 쓴 정업원구기비가 있다.

 

애석(靄石)으로 된 비신 전면에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씌어있고, 후면에는 단종비 송씨가 세상을 떠난 1521년 이후로부터 251년이 되는 1771년에 왕이 친히 글씨를 썼다는 내용의 33자가 새겨져 있다.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창덕궁에 갔다가 이 곳 연미정동(燕尾汀洞)의 정업원으로 가서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물어보았다. 이 때 전 참판(參判)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동대문 밖에서 단종과 눈물의 이별을 한 송씨는 영월쪽을 바라볼 수 있는 청룡사 부근에서 머리를 깎고 희안(希安) ․ 지심(智心) ․ 계지(戒智) 세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 암자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 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고 정업원에 머물었다.

 

송씨는 조석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으나 헤어진지 4개월 뒤인 세조 3년(1457) 10월 4일, 영월에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자 이후부터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고혼(孤魂)이 헤매는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 청룡사 중창사적비기

 

삼각산 한 줄기 맥락이 십 여리 떨어져 내려오다가 우람하게 일어선 곳이 곧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이다. 삼각산 중턱 기슭에 하나의 절이 있는데, 그곳이 청룡사이다. 산자락이 두루 감싸안고서 나름대로 하나의 형국을 이루고 있으니, 서울에서 가장 으뜸가는 곳이라 하겠다.

 

이 절의 개창(開倉)은 신라 경명왕 6년(992)에 있었으며, 고려 태조가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유언으로 서울 청룡 기슭에 절을 세우고, 혜원(慧圓)비구니를 주지로 임명하여 조석으로 종을 울려 삼국통일을 축원하게 하였다. “이는 쇠는 나무를 이긴다(金克木)”라는 원리를 취한 것이며, 또한 비구니 사원으로서는 가장 으뜸가는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세월과 풍운무상(風雲無常)의 변태로써 정종 2년(947)에 만선(萬善)비구니가 퇴락한 사원을 중창하였고, 의종 12년(1158) 회정(懷正)선사가 국태민안을 위해서 어명을 받들어 중창하였고, 충렬왕25년(1299)에 지환(知幻)비구니가 몽고의 병란으로 인한 것을 중창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태조가 즉위하자 고려 말 공민왕의 혜비(惠妃)가 나라를 잃고서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또한 태조 즉위 7년에 세자 책봉에 불평을 가져 왕자의 난이 크게 일어나자, 계비 강씨(繼妃 康氏)가 낳은 경순(慶順)공주는 부왕의 지시에 따라서 이 사원에 들어와 삭발하였고, 태종 5년(1405)에 무학대사의 주청에 의해서 어명으로 중창하였고, 세조 2년(1457)에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송씨는 후궁 2인, 시봉 3인과 함께 이 절에서 삭발한 채 백 년의 한을 품고일생을 보냈으며, 중종 7년(1512)에는 연산군의 폐사(廢寺)와 훼불(毁佛)로써 법공(法空)비구니가 중창하였다.

 

인조 2년(1624)에는 예순(禮順)비구니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명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명복을 빌고 또 다시 이어 중창을 하였으며, 영조 47년(1771)에 이르러서는 영조가 단종과 정순왕후를 위하여 옛 사원터에 새롭게 중창하도록 명하였고, 또한 왕비가 일생 거처했던 곳은 일반 사원의 명칭으로 부를 수 없다고 하여 이에 청룡사를 정업원(淨業院)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옛날 궁중의 비빈(妃嬪)과 궁녀들이 출입하였던 내불당(內佛堂)의 명칭을 취한 것이다. 또한 정업원이라는 비문을 쓰고, 옛터전에 “앞 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리라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峰後巖 於千萬年)”이라는 현판 액자를 하사 아였다.. 이는 모두 어필(御筆)로 기록하여 비석과 누각을 세운 것인데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국가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

 

순조 13년(1813)에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사원이 전소되어 그 이듬해에 묘담(妙湛), 수인(守仁) 두 비구니가 협력하여 중창하였고, 23년(1823)에는 순조왕비에게 때마침 생각치 않은 병환이 있어 그의 생부인 김조순(金祖淳)이 정업원을 찾아가 기도하자 병환이 곧 회복되었다. 이를 인연으로 김조순이 주청하여 다시 어명으로 정업원을 청룡사로 환원하여 부르게 되었다.

 

고종 광무 6년(1902) 정기(正基), 창수(昌洙) 두 비구니가 함께 발심하여 창수의 회갑기념으로 이를 중수하였고, 일제치하 무오년(1918)에는 상근비구니가 사재를 내어 요사채 1동을 창건 하였고, 임신년 회갑을 맞이하여 전 사원의 건물을 하나같이 세롭게 중수하였다,

 

을유해방 이후 경자년(1960)에는 현주지 윤호(輪浩)비구니가 옛 터전을 확장하여 십왕전(十王殿), 심검당(尋劒堂), 우화루(雨花樓), 극락전(極樂殿), 등을 하나같이 새롭게 중창하였다. 창건시의 절터(寺址)는 모두 299평에 지나지 않았는데, 상근비구니가 주지를 할 때 대지 180평을 매입하여 현재의 절터는299평, 대지 453평, 임야 120평에 이르고 있다.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일을 일으켜 세우면 자식이 이를 전승한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이 사원을 처음 개창한 이후로 고려 조선 두 조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창과 중수를 거듭한 것은 모두 11회이며, 몇 년이 안되는 사이에 단청과 새로운 누각과 법당이 위엄스럽게 높고 빼어난 것은 하늘에 힘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주석한 스님들이 이에 선정(禪定)으로써 뼈를 삼고, 경전을 보는 것으로써 살을 삼고, 죽과 밥으로써 가죽을 삼고, 행실과 지혜가 구족한 것으로써 안목과 수족을 삼는다면 한 사찰의 안에 의젓한 법왕의 몸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법왕의 몸이란 텅 비어 있고 오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신령하고 밝아서 일만 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도 변하지 않으며 고금이 다하도록 하나인즉 어찌 가을 털끝을 크다 하지 않을 것이며, 태산을 작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일찍 요절한 사람을 장수를 누렸다 하지 않을 수 있으며,장수한 팽조(彭祖)를 요절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후세의 사람들이 오늘을 보는 것은 마치 오늘날의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며, 후대의 사람이 후대를 보는 것 또한 후대의 사람들이 오늘날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렇다면 도선국사의 개창(開倉)과 윤호주지의 중창은 같은 일일까, 다른 일일까? 만일 같다고 한다면 소뿔은 있어도 쓸모가 없는 것이며, 다르다고 말한다면 토끼의 뿔은 없어도 쓸모가 없는 것이니다. 말해 보아라, 필경 어떤한 것인가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으면 한 방울의 물도 녹이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이 사원을 찾는 이들이 항상 자신의 몸이란 한낱 물거품과 같고 사람의 운명이란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등불과 같이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또한 법성은 비어 있으며 지혜의 태양은 길이 밝음을 항상 생각하여, 이와 같이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고, 이와 같이 깨우쳐 들어간다면 중대한 네 가지 은혜를 일시에 모두 보답할 뿐 아니라, 또한 오늘날 외호의 공덕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불기 2999년(1972) 임자 4월 초파일

오대산인 탄허 택성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