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서(書).간찰(簡札)

중국 '명필 법첩' 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

야촌(1) 2015. 1. 9. 00:05

■중국 '명필 법첩' 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명필대가들의 글씨 탑본(搨本)전《서예의 길잡이 중국 법첩(法帖) 전시회》가 2014년 12월 16일(화)부터 2015년 3월 15일(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용산) 상설전시관에서 열립니다.

 

법첩(法帖)이란 옛 명필대가의 글씨를 감상하고, 임서 할 때 교본으로 쓸 수 있도록 전통 방식으로 복사한 책자(冊子) 모양의 서첩을 말합니다.

 

예로부터 한자문화권에서는 ‘서여기인(書如其人)’ 이라 하여 글씨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글을 쓴 사람의 모든 것(이를테면 그 사람의 성품, 학문적 성취, 인격적인 수양, 사물을 관조하고 사유하는 지혜등 한 개인의 인문학적 총량지수 같은 것)으로 보아왔습니다.

 

 

 

 

 

 

↑순화각첩(Model letters from Chunhua Pavilion).

    북송, 992년, 28.5㎝×20.0㎝, 구5541.

 

 

↑순화각첩(Model letters from Chunhua Pavilion).

 

중국 최초의 법첩은 오대십국(907~960) 남당(937~975) 에서 제작된 '승원첩'이며, 역대 글씨를 정리한 최초의 집첩(전집법첩)은 북송 태종 순회 3년(992)에 제작된 '순화각첩'이라고 합니다. 이 순화각첩은 중국의 법첩 제작의 기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태산 금강경, 북제(550~577년), 해서

 

'티끌모아 태산', '갈수록 태산', '할 일이 태산'....'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양사언의 시조까지...이 문장들에 나오는 '태산'입니다.

 

중국의 산둥성 태산 경석욕에는 금강경이 총 1040여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중 12자의 탑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요, 이번 법첩 전시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수많은 서예가들은 태산의 거대한 너럭바위의 금강경 글씨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탑본은 주로 먹물로 하지만 이렇게 주묵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한진석 각묵영(모서), 중국 민국4년(1915), 나진옥

 

법첩(法帖)을 만들기 위해서는 글씨를 정확하게 모사(模寫)해야 합니다.

모사에도 4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번째 모서(模書), 친필 위에 종이를 깔고 글씨를 직접 덧써서 본뜨는 것을 말합니다.

임모(臨摹)는 친필을 옆에 놓고 특징을 정확히 관찰하여 옮겨 쓰는 것을 뜻하고,

탑모((搨模)는 윤곽선만 베끼고 안쪽을 메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모각(模刻)은 모사한 글씨를 돌이나 나무판에 옮겨 새겨서 탑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글씨 테두리를 그대로 그려 글씨형태를 볼 수 있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청나라말의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 1866~1940)이 한과 진의 석각 글씨를 정리한 책으로 한진석 각묵영이라고 합니다. 종이를 대고 글씨의 형태를 본뜨는 모서의 기초단계인 이 모사방식은 탑모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난정계회도, 명, 전 당인(1470~1524)

 

서예를 이상적 경지로 끌어올린 중국 최고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 ~ 365)는 귀족적 격조가 깃든 글씨를 쓴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특히 그는 난정에 모여 계제사를 지내고, 술잔을 띄워돌리며 詩를 짓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왕희지의 난정계사 모임은 시와 문학, 그림으로 끊임없이 표현된 주제였다고 합니다.

 

강물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던 당시의 정경을 섬세하게 담은 이 그림은 명의 문인화가 당인이 그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강물을 아니지만 경주 포석정이 있습니다.ㅎ

 

 

↑석고문,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년), 전서, 대전

 

서체 전시를 보다보면 서체의 종류에 대해 알 수 있는데요.

서체는 읽기 쉽고, 쓰기 편한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예의 발전에 따라 서체는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아름다운 예술도 갖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한자 서체(書體)에는 전서(篆書), 예서(隷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석고문(石鼓文)으로 북 모양의 새겨진 글씨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석각문자로, 사냥에 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주(周, 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 나라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전국시대 진(秦,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대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서는 고대 한자에서 발전했고, 진의 중국통일 이전에 쓴 대전(大篆)과 중국통일 후 문자개혁으로 정리된 소전(小篆)이 있습니다. 대전은 글자 모양이 다양하고 변화가 큰 반면, 소전은 대칭적인 균형을 갖추었고, 필선도 고르며 상형성이 많이 줄었습니다.

 

 

↑권량명(權量銘), 진(秦, 기원전 221~기원전 206년), 전서

 

탁본(拓本)을 한 형태가 참으로 오묘한 작품입니다. 이것은 무게와 부피를 재는 저울인 권량에 새겨진 글씨를 탁본한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을 통일한 후 진시황(秦始皇/생몰년: B.C. 259년 1월 ~ B.C. 210년 9월 10일(50세))은 나라마다 달랐던 복잡한 대전을 정리하는데, 이것이 소전입니다. 소전의 서체는 비석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권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나라 효왕의 각석, 전한(기원전 56년), 예서

 

이것은 노(魯,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나라 효왕(孝王)의 각석(角石)으로, 전한선제 오봉2년에 노나라 효왕이 영광전의 완성을 기념하며 건물벽에 붙였던 정초석(定礎石)입니다.

 

여기에 새겨진 것은 고예(古隸)로, 형태는 예서(隷書)지만, 필획은 전서(篆書)에 가깝습니다.

예서는 전서체에서 정리된 서체로 오늘날의 한자형태를 띱니다.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 때 많이 쓴 고예는 정사각형에 가깝고 전서의 필획으로 썼고, 모양이 납작하고 물결모양의 가로획이 특징인 팔분서는 후한(後漢, 947년~951년) 때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수선비, 삼국시대 위 (220년), 예서

 

중국의 삼국시대(220~280년)의 위(衛, ?~기원전 209) 나라 2대 황제 조비(曹丕, 187~226)의 황제등극에 관한 기록입니다. 수선표(受禪表)라고도 하는데요. 한漢, 기원전 206년~220년)나라의 예서를 잘 계승한 위나라의 대표적인 예서로 평가되며, 당당(唐 618년~907년)나라의 예서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적벽부(赤壁賦), 元(13세기 후반), 조맹부(趙孟頫, 1254년~1322년), 해서

 

※조맹부(趙孟頫)는 고려말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선생과 중국의 만권당에서 교유가 깊었던 사람입니다.

 

원나라와 명나라에 이르러 전통 고전서예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진전됩니다.

때문에 한층 더 깊이 있는 서예표현이 이루어졌는데요. 조맹부는 왕희지 글씨의 본질로 회귀하는 복고를 추구했다고 전합니다.

 

조맹부는 왕희지(王羲之) 글씨의 요체를 깨닫고 자신의 글씨로 소화해 송설체(松雪體: 조맹부의 글씨체. 그의 호를 따라 붙여진 글씨체 이름이다)를 이루어냅니다.

 

단정하면서도 날카로운 풍모를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해서는 예서를 정리한 것으로 한자의 표준이자, 본보기가 되는 모범서체입니다. 획을 짜임새 있게 정리해 읽고 쓰기가 좋습니다.

 

후한 후반기에서 삼국시대에 서체가 이루어졌습니다. 해서는 여러 서체의 장점을 모아 정리했기에 서예를 공부하는데 기본이 됩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청(1801년), 옹방강(翁方綱, 1733~1818), 해서

 

청대에는 서예의 과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재조명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입니다.

명필이었던 황제 건륭제(乾隆帝, 1711년 9월 25일~1799년 2월 7일)를 비롯, 옹방강 등 수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했습니다.

 

특히 옹방강(翁方綱)은 청대 제일 서예가이자 감식가로 비학과 첩학을 모두 아울렀는데.

옹방강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젊은 시절 서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강엄(江淹)의 시, 북송 1080년, 미불(米芾), 행서

 

남조 양나라(양(梁, 502년~557년)의 시인 강엄의 시 '종관군건평왕등노산향로봉'을 쓴 것입니다. 미불(米芾, 1051년~1107년)의 글씨는 먹선의 조절과 변화가 큰 필획으로 표현이 감각적인 개성으로 넘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행서는 해서를 약간 흘려 쓴 흘림체로 해서와 초서의 장점을 지녔습니다.

해서의 자형을 유지하며 초서의 필획으로 편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고 초서와 같은 생동감이 있습니다. 특히 행서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서첩(自敘帖), 당(唐, 777년), 회소(懷素, 725~785/당나라의 스님), 초서, 복제품

 

초서는 행서와 달리 예서의 획을 최대한 간략하게 줄인 흘림체입니다. 속도감과 필선의 변화로써 흥취와 예술적인 서예 표현에 가장 좋지만 읽고 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장초(張超, ?~195년)에서 시작돼 동진(東晉, 317년~420년)이후 금초로 발전하고 이후 광초로 이어졌습니다. 특히나 회소는 당의 승려로 변화와 흥취, 기운이 뛰어난 자유분방한 초서를 썼는데, 이를 광초라고 합니다.

 

자서첩은 회소 자신의 삶과 글씨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는데, 이 글씨는 초서 예술의 최고 경지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