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경학가(經學家) 사전에 오른 경주이씨 인물

야촌(1) 2010. 10. 17. 19:20

● 25世 이항복(李恒福)

    [생몰년]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자상(子常), 호(號)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이고, 고려 검교정승(檢校政承) 세기(世基)의 후손으로 참찬몽량(夢亮)의 아들이다. 경기도 포천출생으로 1580년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호종하고,  뒤에 양관 대제학 이조 형조판서 등의 중앙요직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광해조때 인목대비의 페비에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졸하였다. 저서로는 《백사집(白沙集)》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 이시발(李時發)

    [생몰년] 1569년(선조 2)∼1626년(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양구(養久), 호(號)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이다.
아버지는 진사 대건(大建)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부사(府使) 김직수(金直燾)의 딸이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으로 1589년(선조 22)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 병과에 급제하고 후에 임진왜란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1623년 4월 인조반정 이후 소환되어 변방의 일을 의논하고, 7월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등용되었고, 이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그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으며. 저서로 《주변록(籌邊錄)》·《벽오유고(碧梧遺稿)》가 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이유태(李惟泰)/26世

    [생몰년] 1607년(선조 40)∼1684년(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태지(泰之), 호(號)는 초려(草廬). 유학 서(曙)의 아들이다.
김집(金集)의 천거에 의하여 1634년(인조 1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이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대군사부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658년(효종 9)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이 되고, 이듬해 시강원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본래 한미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민재문(閔在汶)에게 배우다가 김장생(金長生)· 김집 부자를 사사, 그 문하의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尹宣擧)· 유계(兪棨)와 더불어 호서산림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론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인들이 고향에 금산서원(錦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으나 1713년 노론의 요청으로 일시 훼철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초려집》 26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이세구(李世龜)

    [생몰년] 1646년(인조 24)∼1700년(숙종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養窩).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목사시현(時顯)의 아들이다. 박장원(朴長遠)의 문인으로,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5년(숙종 11)에 음보(蔭補)로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뒤 1695년 다시 추천을 받아 예산현감에 임명되고, 1697년 장령을 거쳐 서연관(書筵官)·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經學)·예설(禮說)·역사 등에 걸쳐 박통하였다. 《대학》의 물격설(物格說)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해석이 모두 정주(程朱)와 다르다고 반박하고, 정심장(正心章)에 대해서도 이황의 해석에 비판을 가하였다.


기해예설에 관해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견해를 보였으며, 여러 학설을 집대성하여 《가례》를 독자적으로 주석하였다.
역사에도 밝아 한사군과 삼한의 위치를 논증하는 글을 남겼다.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에 속하였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홍주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와집》 13책이 있다.

 

● 이홍리(李弘离)

    [생몰년] 1701년(숙종 27)~1778년(정조 2)

 

자(字)는 맹유(孟猷) 호는 용와(慵臥) 본관은 월성(月城)  영천(永川)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이해겸(李海謙)과 어머니는 손여증(孫汝曾)의 딸 월성손씨(月城孫氏)이다.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과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서(經書)로 경학(經學)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비롯한 천문(天文)·율려(律呂)·지리(地理)·역수(曆數) 등을 두루 섭렵하여 박식하였다. 저술로는 용와집이 있다.

 

● 이시일(李時逸)

    [생몰년] 1731년(영조 7) 10월 15일∼1792년(정조 16) 4월 7일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안(敬安)이고, 호는 한와(閒窩)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본적은 경상북도 기계(杞溪)이다. 

증조는 이집(李楫)이고, 조부는 이효겸(李孝謙)이다. 부친 이기배(李基培)와 모친 서행진(徐行進)의 딸 이천서씨(利川徐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손첨걸(孫瞻杰)의 딸 월성손씨(月城孫氏)이다. 

 

어려서는 모친의 가르침을 받았다. 13세에 사서를 통독하고 문장의 뜻을 깨우쳤으며, 장성해서는 종숙(從叔)인 고암(顧庵) 이홍리(李弘离)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56년(영조 32) 식년시 병과 8위로 문과 급제한 후, 1757년(영조 33) 가주서(假注書)로서 장헌세자에게 ‘덕성합복주(德成閤伏奏)’를 올렸다.

 

1758년(영조 34) 선략장군용양위부사정(宣略將軍龍驤衛副司正)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1767년(영조 43)까지 봉정대부(奉正大夫)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조좌랑(禮曹佐郞) 겸 대여례(兼帶如例) 등을 역임하였다. 1768년(영조 44) 동궁(東宮)의 일로 상소를 올렸다가 외직에 강등되었으나 다시 임용되었다.


1773년(영조 49) 형랑(刑郞)에 임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다가 향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 《한와집(閒窩集)》이 있다.

 

● 이회경(李晦慶)

     [생몰년] 1784년(정조 9년)∼1866년(고종 4년)]

     [세   계] 19世 교감공  존사(存斯)의 후손으로 23世 도원공(桃源公) 말동(末仝)의 11대손.

 

조선말기의 유학자로서 자(字)는  서구(敍九), 호(號)는  학남(鶴南).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그는 이양덕(李養德)의 아들로 경주(慶州)에서 태어나, 19세에 호곡 유범휴(柳範休)를 사사하여 더욱 연학에 힘써 일체의 명리(名利)를 끊고 정사체인(精思體認)하여 8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그를 두고 사람들은 임하(林下)의 독신호학(篤信好學) 군자라 일커렀다. 저서로는《학남집(鶴南集)》·《조문록(朝聞錄)》·《이학총도(理學總圖)》·《홍범도설(洪範圖說)》·《천화도(天花圖)》·《연우문답(蓮友問答)》·《이문록(異聞錄)》·《원시(原始)》 등이 있다.

 

동생 종흡(宗翕)은 형(兄) 이회경(李晦慶)의 깊은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학남선생문집(鶴南先生文集)을 간행하였으나 간행연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서(書)에는 스승인 유범휴(柳範休)에게 《대학》·《맹자》·《주자대전》 등의 의심나는 곳을 물은 문목이 붙은 것에서 부터 유치명(柳致明), 유정문(柳鼎文), 박규수(朴珪壽) 등 많은 인사와 교류한 것에 이르기까지 주로 학문과 의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특히 이재목(李在穆)과의 별지 문답에서 《중용》의 연비어약(鳶飛魚躍)과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연관성을 논한 것은 《중용》과 《대학》의 표리관계를 밝힌 독특한 견해이다. 또 잡저인 「연우문답(蓮友問答)」은 세상이치란, 인물의 현부, 군자의 소인, 인간의 처세, 공부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연꽃을 가상인물로 등장시켜 문답한 것이다. 

 

그밖에 「중용(中庸)」을 사대지(四大支), 육대절(六大節)로 축소하여 1장의 지면에다 전체를 그려 넣은 「중용도(中庸圖)」, 《대학》의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을 3단계로 나누어 축소 도시(圖示)한 「대학도(大學圖)」 등이 역작으로 손꼽힌다. 그외에도 「태극도설(太極圖說)」,「중용도(中庸圖)」,「천화도(天花圖)」 등도 저자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이유원(李裕元)

    [생몰년] 1814년(순조 14)∼1888년(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경춘(京春), 호(號)는 귤산(橘山)·묵농(默農). 이조판서(吏曹判書)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禮文館 檢閱)·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를 거쳐 1845년 동지사(同知事)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초에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에 수원유수(水原留守), 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로 전임되어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책봉문제의 이면에서 일본과 결탁, 청나라 정부에 작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청나라북양대신이홍장으로부터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과 통상수호하여 일본을 견제, 러시아를 방지하라는 요지의 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나 1881년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木+燮)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학문에도 능하여 《임하필기 林下筆記》·《가오고략 嘉梧藁略》·《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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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학가 사전/최석기 저

    이 사전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에서 1998년 12월 25일 발간되었다.

 

●출판사 서평

 

이 사전은 기본적으로 四書五經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우리나라의 경학가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간략한 생 애와 경학 관계자료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생몰 연도를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고; 字·號·本貫 및 부모의 이름을 밝혀 놓았다. 

 

또한 소과·대과의 급제 여부와 벼슬에 나간 경력을 간추려 놓았으며; 누구의 문하에서 수학했는지도 가능한 한 밝혀 놓았다. 단 위의 인물자료는 사전에 오른 자료내용을 그대로 옮긴것이 아니고, 필자가 별도로 수집한 자료를 편집한 것임을 첨언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