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여류시인 황진이(黃眞伊)

야촌(1) 2020. 1. 9. 22:58

■ 황진이(黃眞伊)

 

15세기 초의 여류시인 황진이(1506(중종 1)~1543년(중종 38)은 조선 초기의 명기(名妓)로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신이다.

 

[생애]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 사료는 없다. 따라서 간접 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 : 정교하게 공작함)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활동사항]

황진이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다.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에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 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청산은 내뜻이요>는 황진이의 작품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근화악부 槿花樂府》와 《대동풍아 大東風雅》의 두 가집에만 전하며, 작가도 《근화악부》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고, 《대동풍아》에서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두 가집에 전하는 내용이 완전 일치하지도 않는다.

 

특히 초장은 ≪근화악부》에서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라 되어 있다. ≪대동풍아》에서는 “청산은 내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고 바뀌어 그 맛이 훨씬 달라졌다. 《대동풍아》는 1908년에 편집된 책이고 작가의 표기도 정확성이 별로 없는 가집이라는 점에서 그 기록이 의문시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다. 그리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湮滅 :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짐)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금계필담(錦溪筆談)』

『송도기이(松都紀異)』

『어우야담(於于野談)』

『이조여류문학 및 궁중풍속의 연구』(김용숙,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70)

『역대시조전서(歷代時調全書)』(심재완, 세종문화사, 1972)

「황진이와 허난설헌」(김동욱, 『현대문학』 9, 1955)

「황진이의 시(詩)와 한국 시(詩)의 본질」(조운제, 『월간문학』 32, 1971)

 

※최동원 집필자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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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 기나긴 밤-황진이

    동지(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 여든 구뷔 구뷔 펴리라

 

●산은 옛 산이로되-황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 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 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청산은 내 뜻이요-황진이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 고

 

●청산리 벽계수야-황진이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어져 내 일이야… <황진이>

    어 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든가

    이시랴 하드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청초 우거진 골에-임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 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프 하노라.

 

 

 

↑명월 황진이 묘(明月 黃眞伊 墓)


황해북도 판문군 선적리에 있는 15세기 초의 여류시인인 기생 황진이[1506(중종 1)~1543년(중종 38)]의 무덤이다.

황진이(黃眞伊)는 인물이 잘 났을 뿐 아니라 시조와 한시를 잘 짓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명수로서 ‘송도3절’로 이름이 났다. 박연폭포 옆에 있는 바위에 그가 머리태로 썼다는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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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3일 필자가 남측 인사 213명을 모시고 고려말 익재 이제현선생묘를 답사하면서 명월 황진이선생묘와, 열하일기 저자 박지원선생 묘 앞을 지났으나 일정상 성묘는 하질 못했다. 이듬해 꼭 답방하가로 하였으나, 이후 남북관계의 악화로 지금 까지 이루어 지질 못해 안타갑습니다. 하루 빨리 남북교류가 이루어져 북측의 역사 문화유적을 자유로이 답사 할 수 있기를 기대 합니다.

 

 

KBS 연속극 주인공(탤런트 하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