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劉備, 161~223)
▲유비(劉備)
▲유비(劉備)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재위 221∼223)로. 자는 현덕(玄德). 묘호는 소열제(昭烈帝). 탁현 출신이다.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로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 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했으며, 이때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인연을 맺어 《삼국지연의》에서는 도원결의(桃園結義)라는 고사로 이들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적으로 안희현위라는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지위는 오래동안 유지되지 못했고 적군에게 패해 달아났다가 그 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원소(袁紹)와의 대전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웠다.
조조(曹操)와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하지만 여포(呂布)의 공격으로 서주(徐州)를 빼앗기고 그와 대립하게 되며 조조의 도움으로 여포를 물리친다.
196년 원술(袁術)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鎭東將軍宜城亭侯)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와 조조가 관도대전(官渡對戰)에서 전쟁을 시작하자 원소와 동맹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게 되자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로 가서 객장(客將)이 되었다.
이 무렵 삼고초려로 제갈량(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조조 휘하의 하후돈과 우금이 유표를 공격해오자 이를 물리친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는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오나라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戦)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漢中) 침입을 기도하자, 두려움을 느낀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關羽)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제갈량(諸葛亮), 장비(張飛), 조운(趙雲). 방통(龐統) 등과 함께 익주(益州)로 갔다.
하지만 유장이 군수물자(軍需物資)를 내어주지 않고 배신하자 그를 항복시키고 촉(蜀)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유비(劉備)의 백말을 바꿔탄 방통(龐統)이 낙봉파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유비 대신 사망하였다.
215년 형주 땅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荊州)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게 넘기게 된다. 219년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漢中王)이 되었으며,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으나 조조와 손권의 협공을 받아 죽게된다.
220년 조비(曹丕)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讓位)를 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 蜀漢)이라 하였다.
다음해 장비가 그의 부하인 범강(范疆, ?~222년)과 장달(張達, ? ~ 222년)에게 살해되어 그의 목을 가지고 오나라로 달아나자 유비는 형주의 탈환과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 손권을 공격하였다.
이릉(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223년 4월 6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고, 그해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하였다.
▲유비,관우,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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