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탕왕(湯王)-기원전 18세기 중국의 은(殷)나라를 세운 왕.

야촌(1) 2012. 7. 19. 02:27

탕왕(湯王) - BC 18세기경에 중국의 은(殷) 나라를 세운 왕.

 

↑탕왕(湯王),

 

중국 고대(BC 18세기경) 은(殷)나라((BC1600~BC 1046)를 창건한 왕으로서 이름은 이(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太乙)이고 탕(湯)은 자이며,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당시 하(夏)왕조의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였으므로,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걸왕((桀王)은 성탕(成湯)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용서하였다. 탕(湯)왕은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곧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그리고 박(현재의 허난 성 상추 시)에 도읍하여 국호를 상(商)이라 정하여, 제도와 전례를 정비하고 13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걸왕을 멸한 행위는 유교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일과 함께, 올바른 ‘혁명’의 군사행동이라 불리고 있다. 《서경(書經)》의 탕서편(湯誓篇)은 그때의 군령(軍令)이라 전해진다.

 

■ 은(殷) 나라

중국 고대의 왕조(BC1600~BC 1046)이다.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은·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서,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 할 수 있다. 은나라 전기는 기원전 1600년부터 1300년 까지 이고, 도읍을 은으로 바꾼 은나라 후기는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이다.


[성립과 계보]
전설에 따르면 하왕조는 중국 전토를 휩쓸었던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개 주(州)로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으로 섬겼다. 그로부터 17대째가 되는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인하여 중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즉, 웅장한 궁전을 건조하여 천하의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주지(酒池)를 만들어 배를 띄워 즐겼고, 장야궁(長夜宮)을 짓고 거기서 남녀 합환의 유흥에 빠졌다고 전한다.


《사기(史記)》에는,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세는 이미 쇠약하여 많은 제후(諸侯)가 떨어져 나갔다. 걸왕은 부도덕하였고,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과 이윤(伊尹)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백성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을 하대(夏臺)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을 자행하였다.


그가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가다가 죽음으로써 하나라는 멸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은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성의 요망에 따라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곧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그리고 박(?)에 도읍하여 국호를 상(商)이라 정하여, 제도와 전례를 정비하였다고 한다. 이 탕왕으로부터 29대의 왕이 잇달아 중국을 통치하였다. 이 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에 사마천(司馬遷)이 고대의 계보에 따라 《사기(史記)》〈은본기(殷本紀) 속에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갑골문자는 은왕조의 점술사가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점쳤던 것이었으며,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사기》에 전하는 은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은왕조는 중국 북부 대초원의 중심에 위치하여 북쪽으로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 서쪽으로 현재의 후난 성[湖南省]까지 통치했다. 그리고 개조인 탕왕 이래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으며, 많은 골동품이 발견된 정저우[鄭州]도 그중 하나로 추측된다.

 

20대의 왕 반경(盤庚)이 은허로 옮긴 이후 31대의 주왕(紂王:帝辛)이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은허에 정주하였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각지에서 은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는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전기의 유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허난성 얼리터우[二里頭]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이보다 앞선 허난성 신석기시대 룽산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아, 은대의 최전기(最前期)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 유적들은 허난성 중부에서 산시성[陝西省]에 이르는 황허강[黃河] 연변의 황토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중기의 유적 분포지역은 이보다 확대되어 있으며 그 대표는 허난성 정저우[鄭州]의 유적이다. 후기에 이르면 서쪽은 산시성 치산현[岐山縣]에서 동쪽은 산둥성[山東省]의 지난[濟南], 북쪽은 허베이성[河北省] ·산시성[山西省]에서 화이허강[淮河] 유역에 걸치는 화북평원의 거의 전부와 양쯔강[揚子江] 중류에까지 확대되었다.


요컨대 은허시대의 은문화는 이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은왕조는 약 1,700 m의 토벽으로 둘러싸인 정저우를 중심으로 하여 대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서는 청동기 ·도기(陶器) ·골기(骨器)를만드는 장인의 공장과 주거가 발굴되었다.

 

반경이 은허로 천도한 이후, 귀갑과 우골에 새겨진 점복문(占卜文), 즉 갑골문자의 기사(記事)와 궁전 ·묘능의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은의 여러 왕은 타이항산맥[太行山脈]에서 동방으로 흘러가는 위안허강[洹河]의 굴곡진 지점에, 하안(河岸)의 단애(斷崖)를 북 ·동쪽으로 업고, 서쪽으로는 도랑을 파서 북서의 유목민에 대비하는 견고한 성을 쌓았다.

 

샤오툰촌 북쪽의 대지 중앙에는 토단(土壇)을 쌓아 올려, 위에 종묘(宗廟) ·궁전을 건축하였다. 제왕이 죽으면 그 시체는 위안허강의 북안 허우자좡[侯家莊]의 지하 13 m에 200 m2 이상의 큰 널방[墓室]을 만들고,생전에 애용했던 거대하고 정교한 청동기를 비롯하여, 옥기(玉器) ·석기 등을 껴묻거리[副葬品]로 함께 매장하였다.

 

호화로운 청동기는 고대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예술품이지만, 그보다도 이 널방의 안팎으로 산재해 있는 다수의 인골군(人骨群)이 고고학자를 놀라게 하였다.

 

이들은 소수의 시종(侍從) ·시녀는 있지만 대부분은 병사(兵士)로서, 왕에게 순사(殉死)한 것이며, 그 수는 한 왕묘에 500명에서 1,000명에달하였다. 은의 왕은 점복(占卜)으로 신의(神意)를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원수(元首)였다.

 

또한 이민족을 정복하여, 그들을 노예나 병사로 삼았던 것 같다. 이민족 가운데 북서의 고방(苦方) ·토방(土方)이라 불렸던 유목민이, 은허로 옮긴 당초의 무정왕시대(武丁王時代)의 강적이었다. 그리고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왕이 지방 장관을 임명했고 지방에는 귀족계급과 주로 농사를 짓는 대중이 함께 존재했다. 왕이 파종시기를 공고했는데, 1년이 360일에 12개월이고 1개월이 30일인, 고도로 발달된 달력이 있었다.

 

이 시대부터 중국인의 문자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달'(moon)이 '달'(month)의 상징이 되었다. 달력은 양력·음력을 모두 인정했으며 양력의 계절적인 현실성에 음력을 근본적으로 조화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는 윤달을 더했다.


은왕조도 말기의 무을(武乙) ·주왕의 시대에 이르자, 신의 은총을 받은 나머지 방자해져서 자신이 신과 똑같은 절대자라고 믿고 혹독한 전제군주로서 제후 ·백관 ·인민들에 대하여 잔혹한 압정을 가하였다. 그리고 왕비인 달기(己)를 너무 사랑하여 학정을 간하는 현신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의 말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다 들어주었다.


주왕과 달기는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에게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포락형을 구경하면서 웃고 즐겼다고 한다. 또한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화이허강 유역의 인방(人方)이라고 하는 동이민족(東夷民族)의 국가를 정복하였다.


주왕(紂王)이 전쟁에 국력을 다 써버린 틈을 타서 서방의 산시성에서 실력을 길러, 이 지방 제후의 인망을 얻고있던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동진하여 화북평원으로 내려왔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더욱 동진하여 은나라 주왕의 대군을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무찌르고 은의 수도에 입성하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대신하여 주왕조를 일으켰다.


무왕은 은의 왕족인 무경(武庚)을 위(衛)에 봉하여 뒤를 잇도록 하였으나, 무왕이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성왕에게 멸망당하였다.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인 은왕조는 주술(呪術)이 문화의 기조를 이루었으며, 그 결과로 죽은 왕에게 1,000명의 군인을 희생시키는 등 불합리한 체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은의 문화를 받으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주민족에게 패하였다.

 

[참고자료]

◇<두산대백과사전>참고

◇차석찬의 역사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