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서른세살 ‘준비된 임금’ 두살 적자와 후계를 겨루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7호] 20090118 입력 ■ 서른세살 ‘준비된 임금’ 두살 적자와 후계를 겨루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②적자(嫡子)옹립 세력들 광해군의 왕위 즉위 길은 험난했다. 안으로는 적자 계승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선조와 권력의 독점을 원하는 소북(小北)이 흔들었다. 밖으로는 원군(援軍) 파견을 계기로 그간의 형식적 조공관계를 실질적 지배관계로 전환시키려는 명나라가 흔들었다. 광해군은 피를 토하며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새로운 군주상의 탄생 과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큰 사진은 경기도 평택시에 있 는 대동법 시행비. 작은 사진은 대동법 시행세칙을 담은 호서(충청) 대동사목. 재위 33..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6호] 20090110 입력 ■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①험난한 세자 책봉 정치 일정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은 사회 안정의 중요한 요소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일정은 세자 책봉이다. 세자를 조기에 책봉해야 차기를 노린 권력 다툼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렬한 리더들은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후계자 결정을 미룬다. 그러면 차기를 둘러싼 정쟁이 발생해 리더의 권력은 강화되지만 사회는 안으로 곪아 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평양성 탈환도의 한 부분. 당시 조· 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쓰던 무기들이 잘 묘사돼 있 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

뜻이 옳아도, 고립된 권력은 실패한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5호] 20090103 입력 ■ 뜻이 옳아도, 고립된 권력은 실패한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⑥友軍 없는 군주 정치는 기본적으로 세력관계다. 연산군은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공신들의 빈자리에 좋든 싫든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을 배치해 우군으로 삼아야 했으나 갑자사화 와중에 사림까지 제거하는 우를 범했다. 공신들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쫓아냈고 사림들은 붓으로 쿠데타를 합리화했다. ▲이 귀양 가서 죽은 강화도 교동도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이곳엔 연산군 부부상이 걸려 있다. 연산군이 민간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됐음을 말해 준다. ‘낮에는 요순(堯舜)이요 밤에는 걸주(桀紂)’라는 평을 들었던 성종이 재위 8..

文風에 갇힌 사대부, 武人 군주의 꿈을 꺾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4호] 20081227 입력 ■ 文風에 갇힌 사대부, 武人 군주의 꿈을 꺾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⑤ 崇武정책의 좌절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과경제력과군사력이 삼박자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성리학에 몰두하면서 군사를 비천한 것으로 취급했다. 외적의 침략에 대해서도 군사적 응징이 아니라 국왕의 근신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산군과 문신은 군사 문제로 자주 충돌했다. 연산군이 쫓겨나면서 국방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는 더 커진다. 오른쪽 귀 부분을 관통하는 것을 중살이라고 하는데 빈객을 대접하는 데 썼다. 임금의 사냥은 종묘에 천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연산군 범사냥 - 상살이요(4..

조선 최고 ‘음란한 임금’은 反正 사대부들의 날조.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3호] 20081221 입력 ■ 조선 최고 ‘음란한 임금’은反正 사대부들의 날조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④황음무도 논란 정적(政敵)에 대한 탄압은 거꾸로 그를 도와주는 결과로 나타나기 쉽다. 정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려면 도덕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연산군일기』와『중종실록』의 사관들은 연산군을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묘사해 도덕적으로 매장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는 현재까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월산대군 부부 묘. 뒤의 봉분이 부인 순천 박씨의 묘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백모인 박씨를 강간해 박씨의 동생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일 가능성이 크다. 연산..

자신들의 적을 백성의 적으로 기록한 ‘붓의 권력’ 사대부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2호] 20081214 입력 ■ 자신들의 적을백성의 적으로 기록한 ‘붓의 권력’ 사대부 객관적 사실(fact)과 주관적 의견(opinion)은 다르다. 그러나 세상에는 늘 의견을 사실로 만들려는 세력이 존재해왔다. 의견을 생산해 사실처럼 유통시키려면 권력과 기구가 필요하다. 대중들은 때로 여기에 속아 오인하지만 대부분 곧 진실이 드러난다. 때로는 의견이 수백 년간이나 사실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연산군이 그런 경우다. ▲연산군이 이궁(離宮)을 세우려 했던 장의문(藏義門) 밖 장의사 터의 당간지주. 지금의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다. 사진가 권태균 『연산군일기』는 사실(fact)을 기술한 부분과 사관(史官)의 의견(opinion)을 개진한 부분을 분리해서 읽지..

인재들을 죽음으로 내몬 리더의 지적 능력 부족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1호] 20081207 입력 ■ 인재들을 죽음으로 내몬 리더의 지적 능력 부족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② 준비 안 된 군왕 리더는 시대적 소명을 인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높은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연산군에게는 세조의 쿠데타로 형성된 거대한 훈구(勳舊) 세력을 약화시키라는 시대적 소명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를 인지할 만한 지적 능력이 부족했던 연산군은 거꾸로 훈구의 정적이자 자신의 우군인 사림(士林)을 억압했다. ↑무오년, 서옥에서 바라보다(73Χ50cm):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항상 권력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훈구파와 사림 간의 긴장은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를 계기로 폭발했다. 필화(筆禍)사건이 터지면 대(代)를 이은 숙청과 보복의 역사를 낳아 ..

말 갈아탄 신하들 ‘참을 수 없는 옛 군주의 흔적’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0호] 2008.113.0 입력 ■ 말 갈아탄 신하들 ‘참을 수 없는 옛 군주의 흔적’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① 폐위 이후 권력은 시장과 같다. 권력자 주변은 시장 바닥처럼 항상 사람들로 들끓기 마련이다. 사람 장막에 갇힌 권력자는 이들이 보여 주는 환상에 도취된다. 권력이 사라지는 날, 이들이 새 권력에 붙어 자신을 비판할 때에야 진실을 보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것이 영원히 반복하는 권력의 속성이자 인간의 속성이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사적 362호 연산군 부부의 묘(사진 위쪽). 이곳에 딸·사위의 묘도 있다. 연산군의 외동딸 휘순 공주의 시아버지 구수영은 연산군이 쫓겨난 후 아들 구문경과 강제로 이혼시켰다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재결합시..

특권층 1만명의 천국, 백성들에겐 지옥이 되다

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8호] 20081115 입력 ■ 특권층 1만 명의 천국, 백성들에겐 지옥이 되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 ④ 공신들의 나라 외적과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을 공신 책봉으로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권 창출 기여 같은 사회 내부적인 일로 공신을 책봉하면 그 자체가 사회악이다. 공신들은 반드시 특권을 요구하게 돼 있는데, 사회가 이런 공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조는 조선을 공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정조 시절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그림. 명나라 사신들도 구경하고 싶어했다는 압구정은 한명회가 자신의 호(號)를 따 세운 것이다. 국왕이 되는 것을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고도 한다. ‘집을 일으켜 나라를 ..

정권의 패륜을 본 인재들, 목숨은 줘도 마음은 안 줘.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7호] 20081108 입력] ■ 정권의 패륜을 본 인재들, 목숨은 줘도 마음은 안 줘.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 ③ 사육신· 생육신 가치관은 그 어떤 물질보다 중요하다. 세조는 세종이 집현전을 통해 확립한 유교적 가치관을 뒤집었다. 유학자들은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권은 잡았지만 온갖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세조를 축출하려는 시도가 잇따랐고, 유학자들이 출사를 거부하는 등 숱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다. 세조 2년(1456) 6월 1일 아침. 호조참판이자 외삼촌인 권자신(權自愼:현덕왕후의 동생)의 절을 받는 상왕 단종의 가슴은 뛰었다. 『세조실록』은 이때 단종이 권자신에게 ‘긴 칼을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상왕과 세조가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