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명분 없는 쿠데타.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6호] 20081101 입력 ■ 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명분 없는 쿠데타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 ② 헌정질서 파괴 명분은 때로 실용보다 중요하다.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힘이 명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가 많을수록 사회는 혼란스럽게 마련이다. 수양은 명분이 없어도 힘만 있으면 국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종 시절 김종서는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하류에 6진을 설치했으나 수양에게 살해됐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그는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중략)...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는 시를 남겼다. 김종서에게 고삐를 잡힌 말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는지 달(단종을..

리더의 오판이 국가의 비극을 잉태하다.

■ 리더의 오판이 국가의 비극을 잉태하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 ① 시대를 잘못 읽다 리더에게는 시대를 읽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사회를 이끌어갈 수도, 통합할 수도 없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인물이 권좌에 오르면 그 사회는 큰 불행에 처하게 된다. ↑단종이 즉위한 해(1452년)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오문(정문에 해당) 쪽에서 바라본 태화전(太和殿)의 모습. 1452년 5월 14일 조선의 제5대 임금 문종이 승하했다. 재위 2년, 한창 때인 39세였다. 『문종실록』은 “신하가 모두 통곡하여 목이 쉬니 소리가 궁정(宮庭)에 진동하여 그치지..

왕에게 동지는 없다, 신하만 있을 뿐.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2호] 20081005 입력 ■ 왕에게 동지는 없다, 신하만 있을 뿐.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민무질 묘. 태종의 처남 4형제 중 유일하게 묘가 전한다. 민무구· 민무휼· 민무회의 묘들은 실전이라고 한다. 민무질은 제주도에서 자진하여 문종 때 이곳으로 이장 하였 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민무질 묘 앞에 있는 민무질 신도비.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 ③ 외척과 공신 숙청 1402년(태종 2년) 3월 7일. 태종은 성균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 권씨를 ‘어진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후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혼인을 주관하는 가례색(嘉禮色)까지 설치했으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가 태종의 옷을 잡으며 “제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禍亂)..

‘집안’에 갇힌 아버지, 칼로 맞선 아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1호] 20080927 입력 ■ ‘집안’에 갇힌 아버지, 칼로 맞선 아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 ②골육상쟁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다리(箭串橋·전곶교)이다. 1420년(세종 3년) 세종이 태종을 위하여 다리를 놓을 것을 명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당대 일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직접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길이 78m로 당시 가장 긴 다리였다. 개국은 했으나 불안한 신생 왕조였다. ‘조선이 과연 얼마나 갈까?’라는 의구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개국 초 감찰 (監察) 김부(金扶)가 좌정승 조준(趙浚)의 집 앞을 지나다가 “비록 큰 집을 지었지만 어찌 오래 살게 되겠는가? 뒤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고 ..

하늘이 시킨일 오명(汚名)을 마다하리.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0호] 20080920 입력 ■ 하늘이 시킨 일 오명(汚名)을 마다하리.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 태종 ① 정몽주 제거 ↑명제: 태종우(太宗雨), 규격: 95x64cm, 그림: 우승우(한국화가) 모든 군왕(君王)은 성군(聖君)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누가 폭군(暴君)·용군(庸君·어리석은 임금)으로 기억되고 싶겠는가? 그러나 원한다고 모두가 성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주 개인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시대는 악역과 가시밭길을 요구한다. 이때 악역과 가시밭길을 거부하다 용군이 된 지도자는 많다. 반면 묵묵히 악역과 가시밭길을 걸음으로써 후대에 평가받았던 군주는 소수이다. 스물일곱 조선 군주 중 악역을 자청했던 두 ..

안중근 의사 가계도의 빛과 그림자

국가보훈처의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을 보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라는 최고 훈장을 받은 안중근을 비롯해 동생 정근·공근 등 안 의사 가문의 인물 11명이 명단에 올라있다. 특정가문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례는 없지 않으나 10명이 넘는 유공자를 배출한 것은 안 의사 가문이 유일하다. 안 의사 가문은 모두 합하면 40여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 순국 뒤 이산과 유랑을 거듭했던 가족들의 행적을 보면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안 의사의 아들 준생 처럼 민족반역자로 지탄의 대상이 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안 의사 남동생인 정근(1885~1949)과 공근(1889~1940?)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정근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과 대..

신라왕릉 이야기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 신라! 신라는 뱃길을 통해 해상 왕국의 꿈을 실현했고, 종교를 통해 불국토의 이상을 꿈꿨으며 황금의 나라로 불릴만큼 번성한 문화와 과학을 가졌던 나라다.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지켰던 천년왕국. 그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꽃 피웠던 왕들의 삶과 죽음이 신라 왕릉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신라는 시조인 박혁거세로부터 56대 경순왕으로 이어지는 왕조를 건설했다. 992년간 천년 왕국을 이룩한 역대 56명의 왕, 그들의 마지막이 신라의 도읍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왕릉에 묻혀있다. 동 시대를 살았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의 왕릉이 거의 확인되지 못하거나 현존하지 않는 것에 비해 신라는56대왕 중 37왕의 능묘가 확인·추정되며 19왕의 능묘만이 밝혀지지..

全斗煥과 盧泰愚의 합창

全斗煥과 盧泰愚의 합창-"떠나가는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떠나가는 全 삿갓 全 삿갓은 떠나고 盧 삿갓이 들어온다.」 [기고문]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 l 2008. 02. 20 며칠 전 全斗煥 전 대통령이 후임자이자 육사 동기생인 盧泰愚 前 대통령을 두 차례 문병하였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 두 사람은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에서 1년 여 칩거 생활을 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엔 두 사람이 군사변란 혐의 등으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같이 했다. 여생을 많이 남겨 두지 않은 두 사람이 권력의 갑옷을 벗은 상태에서 만났으니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둘이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1987년, 회식 자리에서 합창을 한 적이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공수 ..

김선달과 여사공

■ 김선달과 여사공 천하를 유랑하던 김선달, 어느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사공은 30대 젊은 여자였다. 강 한가운데쯤 왔을 때 농담을 좋아하던 김선달이「여보, 마누라!」하고 불렀다. 여 사공은 당황하여「보아하니 점잖으신 선비양반 같은데 어째서 초면인 나를 마누라라 하는 겁니까?」 「여보시오, 내가 당신 배 위에 올라탔으니, 당신은 내 마누라가 아니고 누구란 말이요?」 여 사공은 아무 대꾸도 없이 노만 젓더니 어느덧 배는 강가에 닿았다. 김선달이 배에서 내려 서너 발자국 걸어 갈때쯤 여 사공이「얘 아들아, 잘 가거라!」깜짝 놀란 김선달이 돌아서 삿대질하며 큰소리로「아니, 여보시오. 내 나이 지금 40줄인데 어째 내가 당신 아들이란 말이요?」 「잘 생각해보거라, 이놈아! 네가 지금 내 뱃속..

김종직(金宗直).

점필제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김종직(金宗直)은 문장중심·정치중심인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철학의 이론 부문을 치중하던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이 혼합된 시대에 살았다. 이 시기에는 변계량(卞季良)· 윤희(尹憘)·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서거정(徐居正)· 양성지(梁誠之)등 많은 거유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순유(醇儒)로 보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김균(金鈞) 김말(金末) 김반(金泮)등의 이른바 경학삼김(經學三金)과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가 경학에 정통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 할만한 문헌이 없어서 그들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뚜렷이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림파(士林派)의 거두인 김종직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이나 여러 문헌을 통하여 전반에 걸쳐 대체적인 윤곽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