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수많은 전란의 징후, 무능한 정권은 눈을 감았다.

수많은 전란의 징후, 무능한 정권은 눈을 감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8호 | 20090405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③임진왜란 전야 유능한 지배층과 무능한 지배층을 가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현실인식 문제다. 유능한 지배층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지만 무능한 지배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그렇게 머릿속의 바람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동안 나라는 깊숙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의 혼간지(本願寺) 자리에 오사카 성을 짓고 조선 침략을 총지휘했다. 선조는 재위 8년(1575) 김효원(金孝元)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좌천시켰다. 당쟁을 유발해 조정을 시끄럽게 했..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6호 | 20090321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① 방계 승통 절차의 투명성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대통(大統)처럼 최고 권력을 잇는 절차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절차가 불투명하면 정국에 혼란이 온다. 당사자는 정통성 부족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는 정국 운영에 큰 부담이 된다. 호문(好文)· 호학(好學)의 군주 선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투명했던 왕위 계승 과정이었다.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도 능한 임금이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선조의 그림과 글씨. 제목은 난죽도(蘭竹圖).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선조가 태어날 때만..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仁祖"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어질 인’ 仁祖.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5호 | 20090314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⑤세자 일가의 비극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비극을 초래한다.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면서 청나라를 인정하면 난적(亂賊)이 되는 모순은 이후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숱한 악영향을 끼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순은 분노의 표적을 찾았고 남은 세자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심양을 관통하는 혼하(渾河 :옛 야리강) 근처에서 벼농사를 지어 청나라 고관에게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그런 행위는 인조의 분노를 샀다. 큰 사진은 현재 이용하는 혼하의 다리..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4호] 20090308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④날개 꺾인 소현세자 모든 역사에는 음양이 공존한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자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개방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이어서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사적 제200호로 지정됐으나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정묘호란 때인 인조 5년(1627) 1월 만 15세의 소현세자는 분조(分朝..

명분 때문에 현실을 외면한 정권, 끝내 삼전도 굴욕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3호] 20090228 입력 ■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③ 外患 부른 쿠데타 인조와 서인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몰라서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친명 사대는 정권 획득과 유지의 명분이었다. 군사는 없지만 전쟁불사론이 횡행했고 현실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국제 정세는 국내 정세에 파묻혀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되었다. 이 양자 사이 모순의 충돌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 ↑남한산성(55Χ42㎝) :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 속에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이불조차 없는 한겨울을 보내 야만 했다. 인조반정은 혼돈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광해군 폐출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었다. 인조 1년(162..

피의 보복이 부른 政治 실종, 전란을 부르다

■피의 보복이 부른 政治 실종, 전란을 부르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2호] 20090221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② 정치보복과 자체 분열 정치는 상대방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폐모론에 반대하는 자신들을 조정에서 대거 내쫓은 대북에 대해 서인은 대거 살육으로 보복했다. 폐모는 명분일 뿐본질은 정적 제거여서 폐모에 반대한 소북까지 모조리 죽였다.정치가 사라진 빈자리는 혼란이 차지하는 법이어서 이괄의 난이 발생하고그 여파로 청(淸:후금)까지 남침을 생각하게 되었다. 덴리(天理)대학이 소장 중인 오리(梧里) 이원익의 영정. 남인이었으나 서인에 의해 영의정에 발탁된 이원익은 기자헌 등 37명이 하룻밤 사이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집권 서인은..

국익 위에 당론, 임금 갈아치우는 쿠데타 명분으로

■국익 위에 당론, 임금 갈아치우는 쿠데타 명분으로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1호] 20090215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①西人들의 왕 왕조국가의 기본 의리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란 뜻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들은 당론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고 광해군은 그 신하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이 충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의 명분으로 성립되었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 별서 유기비(別墅 遺基碑) 비각.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살았던 곳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원익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민심이 ..

소통과 통합에 실패한 군주, 외롭게 몰락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0호] 20090208 입력 ■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⑤ 소수파의 임금 모든 권력에는 독점 추구의 속성이 있다. 그러나 국왕은 각 당파의 당론을 조절하는 방향으로 왕권을 행사해야지 한쪽의 권력 독점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즉위 초 광해군은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란의 상처 극복에 나섰으나 곧 소수 강경파에게 경도되어 조정자의 지위를 포기했다. 그 결과 그는 대북을 제외한 모든 당파의 공적이 돼 몰락하고 말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 묘. 광해군은 대북 강경파에게 경사돼 인목대비의 생부와 친아들을 죽이고 인목대비 까지 폐위시키는 바람에 유교정치 체제의 공적이 되었다. 작은 사진은 인목대비가 병 치료에 관해 쓴 서한이다. 인목대비는 한문에도..

민생 위해 손잡은 연립정권, 스승의 명예 위해 갈라서다./광해군 시절

■ 민생 위해 손잡은 연립정권,스승의 명예 위해 갈라서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제99호 | 20090131 입력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④문묘종사 논란 광해군의 출발은 좋았다.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만이 아니라 각 당파를 아우르는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후 복구에 나섰던 것이다. 각 당파는 전후 복구에 전념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문묘종사라는 사변적 현안이 등장했을 때 광해군은 각 당파의 이해를 조절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 사변적 문제로 연립정권은 무너지고 있었다. ↑정인홍과 삼천의병(100Χ73cm) : 남명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임란이 발생하자 57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의 의병 총지휘자 역할을 했다. 조식의 제자 대다수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임..

광해군은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 못 한 군주의 비극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8호] 20090123 입력 ■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 못 한 군주의 비극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③ 동북아 정세 급변 아무리 좋은 정책도 주위의 뒷받침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광해군은 당시 명나라를 성리학적 관점이 아니라 현실적 관점으로 바라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외교관을 야당인 서인·남인은 물론 여당인 대북의 당론으로도 삼지 못했다. 서인은 ‘강홍립의 투항이 광해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며 쿠데타 명분으로 삼았다. 시대를 앞서간 군주의 비극이 여기에 있었다. ↑조선 후기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양수투항도./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충렬록(忠烈錄)』의 일부분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 사신들의 태도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