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

야촌(1) 2010. 9. 15. 02:09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6호] 20090110 입력

 

■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①험난한 세자 책봉

 

정치 일정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은 사회 안정의 중요한 요소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일정은 세자 책봉이다. 세자를 조기에 책봉해야 차기를 노린 권력 다툼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렬한 리더들은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후계자 결정을 미룬다. 

그러면 차기를 둘러싼 정쟁이 발생해 리더의 권력은 강화되지만 사회는 안으로 곪아 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평양성 탈환도의 한 부분. 당시 조· 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쓰던 무기들이 잘 묘사돼 있

    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가 권태균> 

 

조선 중기의 유명한 예언가 남사고(南師古)가 “원주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아무리 남사고라도 왕실과 전혀 무관한 강원도 한 구석에 왕기가 서려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선조 때의 문신 이기(李旣:1522~1604)는『송와잡설(松窩雜說)』에서 “임진년 여름 광해군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 말의 효험이 입증되었다”고 쓰고 있다. 광해군의 모친 공빈(恭嬪) 김씨의 부모와 선조들이 살던 손이곡(孫伊谷)이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1사(舍:30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왕기가 광해군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공빈이 한창 선조의 사랑을 받을 때는 다른 후궁들이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공빈은 광해군이 세 살 때인 선조 10년(1577) 세상을 떠난 데다 동복 형인 선조의 장남 임해군(臨海君)이 있었다.


공빈의 죽음에 대해『선조수정실록』은 산후병이라고 적고 있지만 공빈은 선조에게 “궁중에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있어 내 신발을 가져다 내가 병들기를 저주했는데 전하께서 조사하여 밝히지 않았으니 오늘 내가 죽어도 이는 전하께서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죽어도 감히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따졌다.

 

공빈의 죽음에 크게 상심한 선조는 다른 궁인들에게 난폭하게 대했으나 후에 소용 김씨(인빈)가 선조를 극진히 모셔 신임을 산 후 공빈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 내자 선조가 “공빈이 나를 저버린 것이 많았다”며 다시는 애도하지 않았다.

 

공빈의 연적(戀敵) 인빈(仁嬪)이 광해군의 정적 인조(정원군)의 모친이었다.

이 일화는 상황 논리에 따라 중심이 흔들리는 선조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정비(正妃) 의인왕후 박씨가 비록 아이를 낳지 못한다 해도 선조의 총애가 인빈 김씨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차자(次子)인 광해군이 국왕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했고 인빈의 아들 신성군(信城君)은 어렸기 때문에 광해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조선 후기 이건창(李建昌)이 쓴『당의통략(黨議通略)』은 조정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뜻을 둔 반면 선조는 인빈 김씨 소생인 4남 신성군에게 뜻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서인인 좌의정 정철은 북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선조를 만나 광해군의 건저(建儲:왕세자를 세우는 것)를 요청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 날 하루 전에 이산해는 인빈의 동생 김공량(金公諒)을 몰래 만나 “정철이 광해군을 세우고 신성군 모자(母子)와 너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다.

 

김공량의 말을 들은 인빈은 울면서 선조에게 하소연했는데 선조는 “뜬소문이다”라며 믿지 않았다.

다음날 이산해는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격 급한 정철은 남인 우의정 유성룡과 선조를 만나 세자 건저를 요청했다.

 

선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내가 지금 국사를 주관하는데(尙任)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라고 꾸짖으며 정철을 강계(江界)로 유배 보내고 서인을 대부분 조정에서 내쫓았다. 이로써 동인이 정권을 잡는데 이때가 선조 24년(1591)으로, 서인인 계곡(谿谷) 장유(張維)는 이를 ‘신묘년의 화란(禍亂)’이라고 불렀다.

 

자신을 세자로 세우려다 서인 정권이 붕괴된 상황은 광해군의 꿈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그러나 1년 후 발생한 임진왜란이 상황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정은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에게 저지하게 했다. 신립은 그달 28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패전했는데 20대 때 임진왜란을 겪은 박동량(朴東亮:1569~1635)은『임진일록(壬辰日錄)』에서 “이날 보고가 올라오자 여항(閭巷:거리)이 한순간에 텅 비어 도성을 지키려 해도 이미 사람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립의 패전 소식에 놀란 선조가 먼저 파천(播遷) 이야기를 꺼내 서울이 온통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신하들이 세자 건저 문제를 다시 들먹였다. 선조는 대신들에게 “누구를 세자로 세울 만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으나 대신들은 “이것은 신하들이 감히 알 수 없는 일로서 성상께서 스스로 결단하실 일입니다”라고 사양했다.

 

『선조실록』은 ‘이렇게 서너 차례 반복하자 밤이 이미 깊었는데 상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를 세우지 않으려는 선조의 속마음을 읽은 이산해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승지 신잡(申잡)이 “오늘은 반드시 청에 대한 답을 얻은 뒤에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라고 붙잡았다.

 

그제야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국본(國本:세자)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었고 대신 이하가 모두 일어서서 “종사와 생민의 복입니다”라고 절했다. 이렇게 광해군은 극적으로 세자로 결정되었다.


이때의 세자 책봉 장면에 대해『임진일록』은 “백관이 조하(朝賀)하는데 허둥지둥하여 동서반(東西班)도 구분하지 못했으며 인장(印章)도 교서(敎書)도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해 6월 평안도 영변까지 도주한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分朝: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이끌라고 명한 후 자신은 다시 북으로 도주했다.


광해군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강원도 등을 누비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민심을 수습했다.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갔던 임해군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會寧)에서 조선 백성 국경인(鞠景仁) 등에게 체포되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진영에 넘겨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광해군이 적진을 헤매고 다닐 때 선조는 “나는 살아서 망국의 임금이니 죽어서 이역의 귀신이 되려 한다.

부자(父子)가 서로 떨어져 만날 기약조차 없구나”라는 편지를 보내 광해군을 위로하면서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했다. 이제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책봉 승인을 거부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명 신종(神宗)이 요동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 이시얼( 李時얼)을 통해 “적장자(嫡長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은 공통의 의리인데, 귀국의 장자는 어디 갔기에 둘째 아들로 세자를 삼았는가?”라고 비난하는 국서를 보냈다고 전해 준다.


그간 세종·세조·성종 등 적장자가 아닌 왕자의 왕위 승습을 명나라가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원군(援軍) 파견을 계기로 과거의 형식적 조공(朝貢) 관계를 실질적 지배로 바꾸려는 음모에 불과했다.

 

명의 이중성은 선조 28년(1595) 명 신종이 사신 윤근수(尹根壽)를 통해 “황제가 조선국 광해군에게 칙유(勅諭)한다”는 국서를 전한 데서도 드러난다. 명 신종은 이 국서에서 광해군을 ‘영발(英發)한 청년이어서 신민이 복종한다’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맡아 주관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세자 책봉은 거부한 것은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이간(離間) 책동이었다.

선조는 자주 선위(禪位) 소동을 벌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했고 그때마다 광해군은 왕위를 극력 사양하는 거조(擧措)를 취해 부왕을 밀어낼 의사가 없음을 천명해야 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나자 선조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