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172

양반들의 조세 저항, 7년 걸린 대동법 호남 전역 확대

■양반들의 조세 저항, 7년 걸린 대동법 호남전역 확대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9호 | 20090621 입력]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자신의 개인적·계급적 이익을 뛰어넘는 위민(爲民)정치를 펼치는 경우는 드물다. 조선처럼 양반 사대부만이 정치를 할 수 있었던 나라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김육과 이시방 같은 소수의 관료들은 계급적 이익을 뛰어넘어 백성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나라 전체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것이 대동법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正治)였다. ↑김홍도가 그린 「벼타작」대동법은 농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담시키고 빈농에겐 면 제해 주는 세법이었기에 조세 저항이 심했다(큰 사진). 오른쪽 작은 사진은 호서대동사목 표지와 호서대동절목 서문. “군자가 태어나..

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8호 | 20090613 입력] 집권 서인들은 겉으로는 효종을 국왕으로 여겼으나 속으로는 차자(次子)로 낮춰 보았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정당이 집권하면 불필요한 정쟁이 빈발한다. 겉과 속이 다르니 논리의 모순이 생기고 반대편이 이를 지적하면 정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송 논쟁은 일인(日人)들의 주장처럼 무의미한 당쟁이 아니라 효종의 종통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기에 치열했던 것이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윤선도 사당. 윤선도는 효종의 사부였으나 격정적 성격 때문에 자주 논란에 휩싸 였다예송 논쟁 때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끝내 함경도 삼수로 귀양가게 된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현종 ..

「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장례

■ 「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장례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7호 | 20090607 입력]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이 아니라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서인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효종을 추대했지만 둘째 아들로 낮춰 보았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 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은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 독점의 권력이냐 사대부 균점의 권력이냐의 문제였다. 양자의 시각이 충돌한 것이 제1차 예송(禮訟) 논쟁이었다. ↑조선성리학의 흐름을 예학으로 이끈 태두 김장생을 모신 충남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과 송시열·송준길 등 당대 의 서인-노론 계열 예학자들을 배향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

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安民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安民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6호 | 20090530 입력] 인조반정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국왕은 사대부 가운데 제1 사대부에 불과할 뿐 초월적 존재가 아니었다.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 나라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효종은 북벌을 가능한 목표로 여겼으나 사대부는 불가능한 꿈으로 여겼다.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였다. 북벌 추진으로 위협받던 사대부의 기득권은 효종의 급서로 계속 유지되었다. ↑요동벌판 : 효종은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경험을 통해 북벌을 가능한 목표라고 여겼으나 사대부들은 불가능 한 꿈으로 여기고 반대했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⑤스러진 ‘북벌의 꿈’ 윤휴(尹휴)의 일대..

말로는 북벌 외치며, 武臣 우대 발목 잡은 文臣들.

■ 말로는 북벌외치며, 武臣우대 발목 잡은 文臣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15호 | 20090524 입력]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정권교체보다 몇 배는 어렵다. 조선은 개국 이래 문신 우대 풍조가 뚜렷했다. 사대부는 임진·병자 양란으로 전국이 유린되고도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천한 무신은 고귀한 문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효종이 북벌 단행을 위해 무신을 양성하려 하자 문신은 갖은 방법으로 제동을 걸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청 태종과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의 심양 북릉.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됐다. 효종은 북벌을 꿈꾸며 군비를 증강 했으나 문신의 반발에 부닥쳤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④사대부들의 저항 ‘..

러시아를 두 번 이기고 털어낸 ‘삼전도 콤플렉스’

■ 러시아를 두 번 이기고 털어낸 ‘삼전도 콤플렉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14호 | 20090516 입력] 서양은 이미 동양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잇따라 표류하고, 러시아는 흑룡강까지 진출했다.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난 다른 세상에 조선도 어느덧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청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 정벌군을 파견해야 했다. 조선과 서양의 첫 조우는 원하지 않는 충돌로 시작되었다. 효종은 이를 북벌 테스트로 생각했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③서양과의 접촉 ▲북정일기(57Χ90㎝) : 1658년 제2차 나선 정벌에 참전한 신류 장군의 조총부대는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물리 쳤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러 국경 지대인 흑룡강을 넘지 못했다. 출병 84일..

소현세자一家에 쏠린 동정론, 효종의 역린(逆鱗) 건드리다.

■소현세자一家에 쏠린 동정론, 효종의 역린(逆鱗) 건드리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3호 | 20090509 입력] 정치는 이상만 추구할 수 없다. 현재 시비(是非)가 분명한 일도 때로는 훗날 가리는 것이 지혜일 수 있다. 강빈(姜嬪:소현세자 부인)의 옥사가 그런 일이었다. 강빈의 억울함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빈 일가의 비극 위에서 효종은 즉위할 수 있었다. 효종의 왕위를 인정한다면 강빈의 신원은 훗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산림은 즉각적인 신원을 요구했고 효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효종의 양녀(성종의 후손인 이개윤의 딸)의순공주의 묘.(묘는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다) 의순공주(義順公主, 1635년-1662년)는 조선 효종의 양녀이다. 종친 금림군 이계윤의 딸로 본명은 ..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봉림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2호 | 20090502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①三宗의 혈맥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대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대운(大運)이 따라 준 것이다. 그러나 대운은 여기까지다. 대운을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죽이면서 생각지도 않게 대권을 잡은 효종은 굴러온 대운을 천명으로 전환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것이 북벌이었다. 효종은 현종· 숙종을 잇는 삼종(三宗)의 혈맥 시대를 열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산해..

신분·조세제도 개혁, 民草들이 전쟁에 나서다

■신분·조세제도 개혁, 民草들이 전쟁에 나서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0호] 20090419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⑤免賤·作米法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민심 획득의 요체는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제도와 관습의 개혁이다. 조선은 신분제와 조세제도의 모순 때문에 백성의 버림을 받았다. 이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조선은 멸망할 것이었다. 류성룡이 제정한 면천법과 작미법으로 백성의 마음이 돌아오면서 조선은 바닥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깊은 시름 하던 차에(95Χ140㎝)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 115척을 궤멸시켜 ‘조선 회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덕택에 곡창 지대인 호남을 확보하게 돼 일본군은 멀리 본토에서 군량..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백성들도 버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백성들도 버렸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9호] 20090411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 ④ ‘요동 파천’ 논란 지배층이 피 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앞장서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 희생은커녕 군역(軍役)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동래부순절도 : 동래부사 송상현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하다 성민(城民)들과 함께 전사했다. 사진 권태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