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8호] 20081115 입력
■ 특권층 1만 명의 천국, 백성들에겐 지옥이 되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
④ 공신들의 나라
외적과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을 공신 책봉으로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권 창출 기여 같은 사회 내부적인 일로 공신을 책봉하면 그 자체가 사회악이다.
공신들은 반드시 특권을 요구하게 돼 있는데, 사회가 이런 공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조는 조선을 공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정조 시절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그림.
명나라 사신들도 구경하고 싶어했다는 압구정은 한명회가 자신의 호(號)를 따 세운 것이다.
<사진제공=간송미술관>
국왕이 되는 것을 화가위국(化家爲國)이라고도 한다.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인데 주로 개국 시조에게 사용한다. 태종도 사용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쿠데타를 건국에 버금간다고 여긴 세조는 사용했다. 문제는 공신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는 점이다.
즉위년(1455) 8월 세조는 자신의 즉위를 도운 인물들을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책봉하라면서 “내가 화가위국하여 오늘이 있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이었던가?… 그 깊은 공을 생각하건대, 진정 잊지 못하겠노라”라고 칭송했다.
그해 9월 한명회·신숙주·한확 등 8명을 1등 공신으로, 모두 46명의 좌익공신이 책봉됐다.
1등 공신은 전토(田土) 150결(結)과 근수(근隨 :수행 몸종) 7인, 반당(伴당 :사환) 10인, 노비 13구(口), 백금(白金) 50냥(兩), 내구마(內廐馬) 1필이 주어지는 등 막대한 부상이 뒤따랐다.
세조 때 공신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공신과 그 자손들을 법 위의 특권층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공신 범죄에 대한 세조의 원칙은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는 것이었다. 본인은 물론 그 자손까지 정안(政案:인사안)에 “몇 등 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고 기록해 어떤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았다.
조선이 일반 양인(良人)은 물론 노비까지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 기능 때문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사헌부에 대해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고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맡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신들도 길에서 사헌부 관리들을 보면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조 3년(1457) 4월의 사헌부는 ‘공신의 처첩(妻妾) 중 범죄를 저질렀으나 면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면서 “지금부터는 공신의 조부모·부모·아내 및 공신의 자손과 자식이 있는 첩(妾)까지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면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감찰권을 쥔 사헌부가 이 정도였으니 통제받지 않는 공신집단의 불법행위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게다가 공신 숫자가 너무 많았다. 세조 1년 12월 좌익공신의 자제·사위·수종자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했는데 무려 2300여 명이었다.
원종공신에게 줄 벼슬이 부족하자 우선 나이가 많은 자는 일 없이 녹봉만 타가는 검직(檢職)을 제수했으니 공신이 아니면 벼슬을 꿈꾸기 어려웠다. 가족까지 1만 명이 넘는 공신과 그 가족들은 수양이 왕위를 꿈꾸지 않았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사회악이었다.
세조가 아무리 애민(愛民)과 선정(善政)을 강조해도 말장난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세조는 풍양(豊壤)에 거동해 술을 마시며 “여러 종친·재추(宰樞:대신)·공신은 나에게 있어서 쇠붙이의 자석(磁石)과 같아 간격이 없고, 불에 던져진 섶[薪]과 같아 기세가 성(盛)하여 막을 수 없고, 하늘에 대하여 땅이 생성된 것 같아서 의논할 수 없다(『세조실록』5년 2월 6일)”라고 자신과 공신은 한 몸이라고 선언했다.
세자도 공신의 자손들과 북단(北壇)에서 회맹하고 ‘자자손손(子子孫孫) 오늘을 잊지 말라’는 회맹문을 발표했다. 세조 3년(1457)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공신의 모친들을 내전(內殿)으로 초청해 잔치를 베풀자 세조는 그 아들들을 사정전으로 불러, ‘어머니가 잔치에 나와서 그 아들을 특별히 부른 것이니 각자 실컷 마시고 배불리 먹으라”고 가족처럼 대했다.
공신 사이의 결속만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세조는 궁궐에서, 또는 공신의 집으로 자주 행차해 연회를 베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북부(北部)조에 “홍윤성(洪允成)의 집은 숭례문 밖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다녀간 일이 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세조 2년(1456) 5월 경연에서 시독관(侍讀官) 양성지(梁誠之)가 “어두운 밤중에 민가 사이를 세자, 훈신(勳臣:공신)과 함께 행차하시니 신은 불가하게 여깁니다”라며 중지를 요청했으나 세조는 “밤에 공신들과 연회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공신들의 불법행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헌부나 형조에서 고소장 자체를 접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기록이 드물다. 예종 때 『세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를 고치다가 원숙강(元叔康)·강치성(康致誠)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민수(閔粹)는 관노(官奴)로 떨어졌는데 민수가 ‘사초를 고치고 삭제한 것은 실로 재상(宰相)을 두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공신 범죄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이유를 말해준다.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정난 2등 공신 홍윤성의 불법행위가 전해진다.
홍윤성이 문 밖 시내에서 말을 씻기는 사람을 보고 사람과 말을 함께 죽였고, 늙은 할머니의 논을 빼앗고는 땅문서를 들고 와서 호소하는 할머니를 바위 위에 엎어놓고 모난 돌로 쳐서 죽이고 시체를 길가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는 광해군 때의 문신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부溪記聞)』을 인용해 더한 이야기를 전한다. 홍윤성이 곤궁할 때 30년 동안 돌봐줬던 숙부가 이조판서가 된 홍윤성에게 벼슬을 청탁했다는 것이다.
홍윤성이 논 20마지기를 요구하자 숙부가 옛일을 거론하며 항의했고 홍윤성은 숙부를 때려 죽였다.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도 사헌부도 받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에 갈 때 숙모는 전날부터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세조의 행차가 이르자 크게 호곡했는데, 세조가 사람을 시켜 묻자 ‘권신(權臣)과 관계된 일이라 한 걸음 사이에도 반드시 그 말 내용이 바뀔 것’이라며 직접 말하겠다고 해서 세조는 정상을 알았으나 홍윤성 대신 그 종만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공신들의 탈법이 빈발하자 세조는 재위 3년(1457) ‘공신들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의(故意)로 범죄하니 금후에는 3차까지는 논죄하지 말고, 그 후에도 범법하면 승정원이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무한정 불법 허용에서 3차까지 불법 허용으로 공신범죄법이 강화된 셈이다.
세조 5년(1459) 6월 원종 2등 공신인 북청부사(北靑府使) 서수(徐수)는 백성 고현(高玄) 등이 부사의 잘못을 관찰사에게 호소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때려죽였다. 형조는 참대시(斬待時:춘분~추분을 피해서 참형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으나 세조는 공신이라고 용서했다.
세조 7년(1461) 1월에는 원종 3등 공신 이백손(李伯孫)이 아내 천종(千從)이 죽자 처제 종이(從伊)와 간통했으나 종이만 처벌받았다. 원종공신이 이 정도니 정공신은 말할 것이 없었다. 세조 7년 5월에는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의 관노 화만(禾萬)이 좌익 3등 공신 황수신(黃守身)에게 부친과 조부의 땅을 빼앗겼다고 사헌부에 고소했으나 정작 옥에 갇힌 것은 화만이었다.
사헌부에서 황수신이 실제로 땅을 빼앗았다고 보고하자 세조는 “황수신은 죄가 없다. 다시 말하지 말라”고 억지를 부렸다. 수양대군 시절 종이었던 좌익 3등 공신 조득림(趙得琳)은 세조 7년 종복(從僕)을 대거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오다가 제지하는 시위 군사를 구타했다.
군사가 군무를 총괄하던 진무소(鎭撫所)에 고발했으나 진무는 두려워 보고도 못할 정도였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법 아래의 존재로 끌어내린 공신들을 세조는 법 위의 존재로 끌어올렸다. 태종이 국가권력을 천명(天命)의 실현 도구로 생각했다면 세조는 공신집단의 사적 이익실현의 도구로 사용했다.
혁명아 정도전이 계구수전(計口受田: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줌)의 이상으로 건국했던 조선이 세조의 왕위 찬탈로 공신들의 천국이자 백성들의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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