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러시아를 두 번 이기고 털어낸 ‘삼전도 콤플렉스’

야촌(1) 2010. 9. 15. 14:46

■ 러시아를 두 번 이기고 털어낸 ‘삼전도 콤플렉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14호 | 20090516 입력]

 

서양은 이미 동양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잇따라 표류하고, 러시아는 흑룡강까지 진출했다.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난 다른 세상에 조선도 어느덧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청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 정벌군을 파견해야 했다.

조선과 서양의 첫 조우는 원하지 않는 충돌로 시작되었다. 효종은 이를 북벌 테스트로 생각했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

서양과의 접촉

 

 

▲북정일기(57Χ90㎝) : 1658년 제2차 나선 정벌에 참전한 신류 장군의 조총부대는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물리

    쳤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러 국경 지대인 흑룡강을 넘지 못했다. 출병 84일 만에 개선한 신류 장군은 나선 정벌

    을 일기 형식인『북정록』으로 남겼다.<우승우(한국화가)>

 

 

효종 4년(1653) 8월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를 올려 이상한 배 한 척이 난파되었다고 보고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서 뒤집혔는데 생존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는 보고였다. 그들은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인이었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 북부의 텍셀(Texel) 섬을 떠난 일행은 그해 7월 16일 대만에 기착했다가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서 난파되었다. 하멜은 10월 말께 제주목사 관아에서 뜻밖에도 한 서양인을 만난다.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목사 이원진의 질문에 “홀란드(네덜란드) 사람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이원진은 껄껄 웃으며 “이 사람은 조선 사람이니 너희가 잘못 보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사람’은 26년 전인 인조 5년(1627)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벨테브레이(J J Weltevree)였다. 과거 조선은 서양인이 표착해 오면 북경으로 보내 귀환시켰다.

『선조수정실록』 15년(1582) 1월조는 서양인 마리이(馬里伊)가 표류해 오자 진하사(進賀使) 정탁(鄭琢) 편에 북경으로 보냈다고 전하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벨테브레이가 표착했을 때는 정묘호란 직후였다. 게다가 벨테브레이는 화포 제작 기술을 갖고 있었다.인조는 벨테브레이를 동료 두 명과 함께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화포를 개량하게 했는데, 동료 둘은 병자호란 때 전사했고 벨테브레이는 조선으로 귀화했다.

그가 바로 박연(朴燕)으로서 조선 여성과 혼인하고 후사도 둔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이듬해 서울에 올라온 하멜 일행은 효종에게 귀국을 간청했으나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을 내보내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멜 일행도 박연과 함께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북벌에 대비했다.

 

『하멜 표류기』는 효종 5년 8월 ‘청나라 사신이 오자 국왕은 우리를 요새로 보내 사신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명했다는데, 그 요새가 남한산성이었다. 효종 때는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러시아와도 맞닥뜨려야 했다.

 

효종 5년(1654) 2월 청나라에서 온 차관(差官) 한거원(韓巨源)이 나선(羅禪:러시아) 정벌에 조선군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조창수(鳥槍手:조총수) 100인의 파견을 요청한 것인데 효종이 “나선은 어떤 나라인가?”라고 묻자 한거원은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사는 별종(別種)입니다”고 대답했다. 나선은 ‘Russian’의 한역(漢譯)인데 효종은 이때까지도 이들이 서양인인 줄 알지 못했다.


러시아는 17세기 초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면서 유럽 동북쪽과 시베리아 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러시아의 하바로프(E Khavarov)는 원정대를 이끌고 흑룡강까지 진출해 강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城)을 쌓고 군사기지로 삼았다.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획득을 위해서였는데 17세기 모피 자원은 러시아 국고 수입의 10%를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만주를 선조의 발상지로 중시하던 청조는 효종 3년(1652) 군사를 보내 영고탑 부근에서 맞붙었으나 거듭 패배했다. 청은 효종 4년(1653) 사이호달(沙爾虎達)을 영고탑 지방 앙방장경(昻邦章京:장군의 명칭)으로 삼고 다음 해 명안달례(明安達禮)에게 북경수비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격퇴하라고 명하면서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조창수를 요구했다는 것은 조선 조총수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조 14년(1636) 청에 항복한 후 맺은 강화조약 때문에 청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효종은 함경북우후(北虞侯) 변급(邊<5C8C>)을 영장(領將)으로 삼아 군사를 파견했다. 제1차 나선 정벌군이었다. 변급은 100명의 조총수와 20명의 화병(火兵:취사병) 등 도합 150여 명을 이끌고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넜다.

 

27일 후통강(厚通江:송화강)에 도착한 변급과 조선군은 28∼29일 러시아군과 접전했다. 변급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300석(石) 크기의 대선 13척, 소선 26척에 병력은 400명 미만이었다. 조청연합군은 대선 20척, 소선 140척에 1000여 명이었다.

 

조청군이 숫자는 많았지만 대선은 17명이 승선하는 작은 배에 불과했다.

화력이 열세라고 생각한 변급은 수상전(水上戰) 대신 육지에 ‘유붕(柳棚:통버드나무로 만든 방패)’을 세우고, 이를 방패 삼아 러시아 함선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새로운 전법에 러시아군은 많은 부상자를 내고 5월 5일 흑룡강을 거슬러 도망갔다.


조선군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5월 16일 철군해 6월 21일 두만강을 건너 84일간의 원정을 마무리지었다.

『청사고(淸史稿)』 ‘명안달례 열전’은 명안달례가 “순치 11년(1654) 군사를 이끌고 악라사(鄂羅斯:러시아)를 정벌했는데, 흑룡강에서 적을 물리쳤다”고 적고 있다. 이 1차 나선 정벌 이후 러시아군은 ‘머리 큰 사람(大頭人)이 두렵다!”며 벙거지(戰笠:전립)를 쓴 조선 군사를 두려워했다.


청조는 이듬해(1655) 명안달례에게 호마이(呼瑪爾) 하구에 있는 러시아의 근거지를 공격하게 하고 효종 8년(1657)에는 사이호달을 보내 상견오흑(尙堅烏黑)에서 러시아와 싸웠으나 다시 패배했다. 그러자 효종 9년(1658) 재차 조선군의 출병을 요청했다.

 

효종은 일단 거부했으나 재차 회계(回啓)가 내려오자 함북병마우후 신류(申瀏:1619∼1680)를 총병관으로 삼아 정벌군을 구성하게 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기회에 청군의 허실을 엿볼 생각이었다.

 

조총수 200명과 기고수(旗鼓手:군기와 북 관리 병사)·화정(火丁) 60여 명 등 도합 260여 명의 조선군은 3개월분의 군량을 휴대하고 5월 2일 두만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6월 10일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에 도착해 러시아 스테파노프(Stepanov) 함대와 격전을 벌였다.


신류는 『북정일기(北征日記)』에서 “적선 11척이 흑룡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아군은 즉각 적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병들이 숨 돌릴 겨를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니 배 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들은 드디어 지탱할 수 없어 모두 배 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초반 습격으로 승기를 잡은 신류는 적선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전투를 끝내려 했으나 청장(淸將) 사이호달이 전리품에 욕심을 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방화 금지령이 급하게 전해지는 사이 강가 풀숲에 숨어 있던 러시아군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신류는 “여세를 몰아 일시에 적선들을 불태웠다면 적병 중에 살아남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인데, 대장이 재물을 탐내 불태우지 말라고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조선군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다. 청군은 무려 120여 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했다.


러시아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어 11척의 선단 중 10척이 불타고 1척만 겨우 도망갔다.
스테파노프의 부하 페트릴로프스키(Petrilovsky)는 “이 전투에서 대장 스테파노프와 카자크 270명이 전사하고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08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軍旗),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聖像)을 실은 배 1척이 95명을 태우고 탈출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류는 전사자를 화장하라는 사이호달의 권유를 거부하고 흑룡강가의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동향(同鄕)끼리 묻어 주었다.
신류는 “아아! 멀리 이국 땅에 와서 모래펄 속에 묻힌 몸이 되었으니 참으로 측은한 마음 이를 데가 없구나”고 추도했다.


사이호달은 러시아의 재침이 우려된다며 효종 10년(1659) 봄까지 주둔하라고 요구했으나 신류는 거부하고 11월 18일 영고탑을 떠나 12월 12일 회령으로 귀국했다. 조선군은 이렇게 1, 2차 나선 정벌을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불과 20여 년 전 삼전도 치욕을 겪었던 조선군으로선 청군이 연패한 러시아군을 꺾은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청군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더욱 강하게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