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이토를 쏜 인중근의사의 권총

야촌(1) 2016. 2. 25. 00:45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쏜 권총의 출처가 중요한 까닭은”

[짬]의병연구소 소장 이태룡 박사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총의 출처를 밝히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반응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 의사가 의병장 이진룡(이석대)과 바꾼 권총을 사용했다는 <의암류선생약사>(毅菴柳先生略史)의 기록은, 하얼빈 의거가 한 영웅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구 한말 이래 의병운동의 정점에서 이뤄진 민족적 거사라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의병 연구가’로 이름난 이태룡(의병연구소 소장) 박사는 최근 월간지 <영웅>(2016년 신년호)을 통해 ‘안 의사 의거 권총 출처 비사’를 공개했다.

 

1909년 당시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의 의병 연합체인 13도의군도총재 ‘의암’ 류인석(1842~1915)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의암류선생약사’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이 책은 의거 당시 19살이었던 의암의 친아들인 류해동(류제춘·1891~1981) 선생이 해방 이후 친필로 써놓은 것으로, 종손 류연창(75)씨가 춘천의 의암기념관에 기증해 보관해왔다. 

 

이 박사는 그동안 ‘해제’만 나와 있던 ‘약사’의 13장 전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안 의사와 의암의 관계를 비롯해 권총과 자금의 출처 등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의거 전 이진룡(李鎭龍·? ~ 1918) 의병장 권총과 바꿔”

“의암 선생 만나 ‘의거’ 밝히니 격려”

‘의암류인석약사’ 전문 번역해 확인

‘월간 영웅’ 신년호에 ‘비사’ 첫 공개

 

안 의사 ‘권총 빼앗았다’ 진술해 감춰

일제 재판기록만 의존한 연구에 ‘허점’

“돌출행동 아닌 의병운동의 정점” 의미

 

 

이정아기자leej@hani.co.kr

 

‘(1909년) 9월 의암이 맹령(孟嶺,몽구가이,Mongugai/연해주 남부의 교통요지 마을)으로 이주하니 이상설이 내방하였고, 이어 안중근과 정재관이 찾아왔는데, 안중근이 북만주로 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의암은, “다행히 죽이면 국가 원수뿐만 아니라 동양평화를 교란하는 죄를 더욱 용서하지 못한 것이라는 대의를 천명하여 세계인으로 하여금 이를 인식시키는 것이 좋다”라고 격려했다. 

거사에 성공하자, 의암은 기뻐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의암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김기한·이진룡 두 사람과 같이 배를 타고 오다가 이진룡이 권총 닦는 것을 보고 (안중근이) 자기 것과 서로 바꾸기를 요청하매(이진룡이) 불응하여 취중에 언쟁이 일어나니 정재관이 말리며,  “안형이 이등을 사살코자 하는데, (이)형의 총이 나아 보여 바꾸고자 함이라” 하매, 이진룡이 총을 주며, “필요하다면 옛날 형가(荊軻)일에 번오기(樊於期)같이 목이라도 베어달라면 베어줄 터인데, 실정을 말하지 않음은 나를 도외시함이 아니냐?” 하며, 다시 술을 나누며 해항을 건너와 며칠 후 안중근이 하얼빈에 가서 역두에서 이등(이토)을 쏘아 거꾸러뜨리니, 선생이 기꺼워 해항에 건너가 종자로 하여금 큰 잔치를 베풀게 하시다.’

 

‘약사’에서 안 의사가 등장하는 두 대목이다. ‘약사’의 내용은 2009년 학술 논문을 통해 처음 공개됐고, 2010년 의암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서도 일부 공개됐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박사는 “기존 학계에서는 안 의사가 남긴 <안응칠 역사>와 재판 기록,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 문서>같은 일제가 남긴 자료 등에만 의존해온 나머지 우리 의병운동의 기록을 찾지 않거나 무시해온 폐단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안 의사는 일제 검찰의 신문과 심문 과정에서 배후세력을 철저히 감췄기 때문에, 재판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숨은 뜻을 해석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안 의사는 신문 과정에서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고, 직접 상관은 김두성이며, 김두성은 곧 8도 의병의 총독이라고 밝혔다. 주요 의병장으로는 대부분 순국한 인물을, 생존자는 이미 잘 알려진 인물만 언급했다. 

 

‘강원도 출신 8도 의병 총독’이 바로 13도의군도총재 의암이었는데, 가명으로 말했던 것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1월 27일 뤼순 감옥에서 주요 공범으로 체포된 15명 외 이상설과 의암에 대한 묻자 “이상설은 만국평화회의에 가고 없었다”고 하였고 “의암은 지난봄 연해주에서 만났다. 

 

15살 정도 사내아이(류해동)를 데리고 있었다.

(…) 귀가 먹고 시력이 약해서 매우 노쇠한 노인이고, 세계의 대세나 동양의 국면을 아는 자는 아니었으며, 완고하고 시세에 어두운 자와는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다”고 답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에 따라 ‘통감부 문서’(1909년 12월15일 ‘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진술 내용’)에는 공범들 이외에 하얼빈 의거 임무를 맡은 혐의가 있는 자 가운데 의암은 7번째 인물로 기록돼 있다.

 

이 박사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안 의사가 의거 직전 동선 진술에서 ‘맹령’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암의 존재를 무시해왔으나 ‘약사’의 구체적인 정황과 ‘한국의병사’에 비춰볼 때 이 역시 안 의사가 일부러 숨긴 것으로 분석했다.

 

‘의암은 경기도 양근·지평(오늘날 양평)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충청도 지방의 유림을 대표하던 이항로의 화서학파 출신이었다. 1907년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의병 투쟁을 지휘하던 그는 호좌의진을 이끌고 관군과 맞서다 대패했다.

 

1908년 6월 67살 때 부산에서 연해주로 들어가 연추(크라스키노)의 대규모 한인촌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던 이범윤 등과 합류해 대한의군을 조직했다. 일제의 간계로 연해주 동포사회의 지도자 사이에 반목이 심화되자, 의암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1909년 6월 연해주 의병 연합체를 이끌어내고, 13도의군도총재에 올랐다.

 

이범윤 창의총재, 이남기 장의총재, 이상설 별지휘, 정재관·안창호·이종호 외무원, 최우익·안중근·이갑·왕창동 의무원, 홍범도 선봉장을 각각 선임했다.’ 이 박사는 “의암은 호좌의진을 이끌 때 총상을 당해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렸기 때문에, 겉모습으로는 볼품없는 노인이어서 지역 주민들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안의사는 권총과 여비 130~140원을 마련해준 이진룡 의병장에 대해서도 “평안도에서 온 이석산(가명)이란 자에게 권총으로 위협하여 빌린 것”이라고 진술했다.(<통감부 문서>‘피고인 안응칠 제8회 신문조서’) 하지만 이 박사는 “그동안 학계에서 이진룡 의병장이 황해도 평산 의진을 이끄는 등 국내에서만 활동한 인물로 여겼기 때문에 안 의사와 연관성이 희박하다고 무시했으나, 일제의 비밀기록인 ‘통감부 문서’에 이진룡이 총기 구입을 위해 연해주를 여러 차례 다녀온 사실이 나와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안 의사의 권총은 재정 후원자로 알려진 최재형 선생이 구해줬다는 설과 또다른 독립운동가가 제공했다는 그 후손의 주장이 있었을 뿐 구체적인 출처에 대한 기록은 ‘의암 약사’가 유일하다. 이 박사는 국어 교사 출신으로 90년 ‘의병문학선집’ 출간 작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의병 연구에 몰두해 30년 가까이 의병운동사를 발굴해내고 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