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남명 조 선생 신도비명 병서

야촌(1) 2022. 6. 1. 00:07

■ 남명 조 선생 신도비명 병서

     (南冥 曺先生 神道碑銘 幷序)

 

선생이 돌아가시자 산천재 뒤 언덕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그 비문은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이 지은 것이다. 성 선생은 선생과 도를 같이 하는 벗이었다.

 

이 비문에는 선생의 학문 과정과 도덕규범 및 계파의 원류 등이 상세하게 실려 있어 더 보탤 것이 없었다. 그 후 30여 년 뒤, 선생의 맏아들이 옛날 비석은 돌이 형편없어서 이지러진 부분이 이미 많아 오래가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여 돌을 다듬어 고쳐 세우려고 했다.

 

그때 마침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하여 선생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여, 임금님의 윤허를 받았다. 이에 새로 다듬은 돌로 신도비를 만들면서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기에,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아! 해와 달을 그리는 사람은 그 모양만 그릴 수 있지 그 빛을 그릴 수 있겠는가?

 

선생의 휘는 식(植), 자는 건중(楗仲), 본관은 창산(昌山)이다. 시조 조서(曺瑞)는 고려에 벼슬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이 되었다. 그 어머니는 덕궁공주(德宮公主)이다.

 

그 뒤에 생원 조안습(曺安習)이 있었는데, 선생에게 증조부가 된다. 생원이 조영(曺永)을 낳았는데, 벼슬하지 않았다. 이분이 판교(判校) 조언형(曺彦亨)을 낳았다.

 

판교가 인천 이씨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으니, 홍치(弘治) 신유(1501, 연산군7) 6월 26일 임인일이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싫어하고 도덕에 뜻을 두었다. 옛날 살던 집 옆 냇가에 띠집을 지어 뇌룡사(雷龍舍)라 하고 남명(南冥)이라 자호하였다.

 

만년에는 두류산 덕천동에 터를 잡고 느긋하게 숨어 지내면서, 서재에 산천재(山川齋)라는 편액을 걸었다. 중종 때부터 이미 벼슬을 제수하는 임금의 명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 선조 두 조정에서도 부르는 명이 전후에 거듭 이르렀으나, 오래도록 나아가려하지 않았다. 그 뒤 상서원 판관으로 임금님의 은혜로운 명을 따라 사례하였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 때문이었다.

 

등대(登對)를 마치자 바로 덕산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누린 연세가 72세였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간혹 세상을 업신여긴다고 여기기도 하고, 혹은 절개 한 가지만 있다고 배척하였는데, 심하도다!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아! 군자는 중용에 의거하고, 세상을 피해 살면서 옳다고 여겨지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데 오직 선생만이 이런 데 거의 가깝도다.

 

대저 중용의 ‘중’자의 쓰임은, 정해진 형체가 없이 오직 그 때에 알맞게 하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이 능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순임금이 미천하게 깊은 산중에 살았는데, 세상에 요 임금이 없었다면 끝내 그렇게 한평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 양쪽 끝을 잡고 그 중용을 쓰는 것이 이런 데 있지 않겠는가?

 

세 번 자기 집 대문을 지나가면서도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우임금과 직(稷)이 중용을 행한 것이고, 한 소쿠리의 밥과 한 바가지의 마실 것으로 더러운 골목에서 살아간 것은 안자(顔子)가 중용을 행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숨어 살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던 것을 ‘고상하고 뻣뻣하다’고 말하지 않고, ‘중용에 의거하여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 의미를 대략 알 수 있다.

 

학문적인 측면을 말하자면,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을 반듯하게 했다. 경과 의가 바로 서니 덕이 외롭지 않았고, 서로 보완하며 성인의 경지를 향해 나아갔으니 처음과 끝을 이룬 것으로는 경과 의 만한 것이 없다. 

 

저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지껄이고 문장 솜씨만 발휘하니 요컨대 학문한다는 이름은 잃지 않지만, 그런 사람은 단지 한 마리 앵무새일 따름이다. 선생은 학문이 끊어지고 도를 잃은 때에 태어나서, 확고하게 경과 의로써 근본으로 삼았다. 

 

여러 가지 책을 널리 다 보아 평생 자신에게 돌이켜서 단속한 것이 단지 경과 의 이 두 글자에서 노력하였을 뿐이니, 그 조예를 헤아릴 수 없다. 움직일 때와 가만히 있을 때 서로 보완적으로 수양하고 의젓하게 천지 신령을 대하듯이 하여 성취해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그래서 벼슬에 나가거나 나가지 않고 집에 있거나 하는 것이 의리에 맞았다. “군자가 길을 가면서 먹지 않았다.” “그 발꿈치를 꾸며서 걸어서 간다.”라고 한 것은, 바로 “갈 곳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말을 한다.”는 효상이다. 

 

날개가 일찍이 처진 적이 없었고, 선생의 덕은 뽑을 수가 없었으니, 여러 사람을 능가하여 백세를 기다려 미혹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그 다리에 느껴서 자기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따르니 집행하는 바가 하류이면서 스스로 “도학(道學)을 합네” “시중(時中)을 합네”하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질이 좋은 황금과 모래 덩어리의 차이 정도에서 그칠 뿐만 아니다.

 

선생은 세상에서 숨어 지내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중용에 의거했다 함이 장차 누구에게 귀속되겠는가? 남평조씨(南平曺氏)를 맞이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차산(次山)인데, 일찍 죽었고 딸은 만호 김행(金行)에게 시집갔다. 소실에서 3남 1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차석(次石)은 현감을 지냈고, 차남 차마(次磨)는 주부를 지냈고, 삼남 차정(次矴)은 만호를 지냈다.

 

김행은 딸 둘을 낳았는데, 장녀는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에게 시집갔으나 자녀가 없고, 차녀는 감사 곽재우(郭再祐)에게 시집가서 아들 몇 명을 두었다. 

 

차석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이 진명(晉明)이다. 차마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경명(景明)이다. 차정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준명(浚明)이다.

명은 이러하다.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쓰고 저녁에는 두려워하나니 / 乾乾夕惕。
학문은 오직 자신의 수양을 위한 것 / 學爲己。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잃지 않나니 / 動靜不失。
실로 그 발에서 그친 것 때문이라네 / 艮其止。


숨어서 쓰이지 않았으니 / 潛而勿用。
깊은 못의 용이라네 / 九淵龍。


그 즐거움을 변치 않았으니 / 其樂不改。
안자(顔子)와 같았도다 / 陋巷同。


두려워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았고 / 不懼無悶。
지나치게 컸지만 잃은 것 없었도다 / 其過者大。


7일 만에 얻게 되었으니 / 七日而得。
수레 가리개를 잃어버린들 뭐가 해롭겠는가 / 茀喪何害。


옥에 티 정도는 / 玉上蠅點。
그들의 붓과 입에 맡겨둔다네 / 任他毛舌。


아아, 선생이여 / 於乎先生。
어두운 길의 해와 달이었네 / 冥道日月。

 

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原文]

 

南冥曺先生神道碑銘 幷序

 

先生歿。葬于山天齋後岡。樹之碑。其文大谷成先生撰也。成先生於先生。同道友也。先生學問工程。道德範守與系派源流。詳載無以復加也。後三十餘年。胤子以舊碑石品下。剜缺已多。不可圖久遠。伐石將改樹。適泮儒上章。請加贈爵賜諡。蒙允。遂以新伐石爲神道碑。請文。辭不獲焉。摹日月者。得其形。其能得其光乎。先生諱植。字楗仲。昌山人也。始祖曰瑞。仕高麗爲刑部員外郞。其母德宮公主也。後有生員安習。於先生曾大父也。生員生永。不仕。是生判校彦亨。判校娶仁川李氏。生先生。弘治辛酉六月壬寅也。先生早厭擧子業。志於道德。就舊業旁川上。構茅屋曰雷龍舍。自號南冥。晩卜頭流德川洞。肥遯焉。齋扁曰山天。自中廟朝已有除命。不就。明廟宣廟兩朝召命。小伸前後洊至。久不肯就。後以尙瑞判官。趨謝恩命。君臣之義。登對訖。便還山以至易簀。享年七十二。世之人或認爲輕世。或斥爲一節。甚矣。其不知道也。嗚呼。君子依乎中庸。遯世不見是而不悔。惟先生庶幾焉。夫中之用。無定體。惟在時。非衆人所能知。舜在側微居深山。非堯。終焉執兩端。用其中。不在玆乎。三過門不入。禹稷爲中。一簞瓢在陋巷。顔氏爲中。故遯世不悔。不曰高亢。乃曰依乎中庸。其義大可見也。試以學言。敬直義方。敬義立德不孤。夾持向上。成始成終。莫此二字若也。彼謄口說騁文辭。要不失學問之名者。特一鸚鵡耳。先生生學絶道喪時。確然以敬義爲本。羣書雖博盡。平生反約。只在二字上用工。造詣不可量也。動靜交養。儼乎對越。成就爲一己有。故時行止合於義。于行不食。賁趾而佳。深得有攸往人有言之爻象。德不拔翼不垂。度越諸人。百世竢宜不惑。視世之咸股不處。執下隨人。自認爲學問爲時中者。不啻精金與沙礦也。先生非遯世不悔之君子乎。依乎中庸。將誰歸乎。聘南平曺氏。生男一女一。男曰次山夭。女適萬戶金行。繼室生男三女一。男長次石縣監。次次磨主簿。次次矴萬戶也。金行生二女。長適副提學金宇顒無子女。次適監司郭再祐。生男若干人。次石生一子曰晉明。次磨生子曰景明。次矴生子曰後明。銘曰。

乾乾夕惕學爲己。動靜不失艮其止。潛而勿用九淵龍。其樂不改陋巷同。無悶不懼。其過者六。七日而得。茀喪何害。玉上蠅點。任他毛舌。於乎先生。冥道日月。<끝>

 

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