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고려 순천군 채홍철 묘지명(高麗順天君蔡洪哲墓誌銘)

야촌(1) 2022. 5. 28. 16:18

[생졸년] 채홍철『蔡洪哲, 1262년(원종 3) ~ 1340년(충혜왕 1)』

 

유원(有元) 봉의대부(奉議大夫) 태상예의원 판관(太常禮儀院判官) 효기위(驍騎尉) 대흥현자(大興縣子) 고려(高麗) 순성보익찬화 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 순천군(順天君) 채공(蔡公)의 묘지명

 

李穀(이곡) 찬(撰)

 

지원(至元) 6년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정월 10일 계해에 대흥현자 순천군 채공이 79세의 나이로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차 예법에 따라 장례를 지내려고 할 적에, 그의 자서(子壻)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명()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공의 행의(行義)는 한 시대에 높고, 공의 공덕은 온 나라에 드러났다. 그러니 명을 짓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의 휘는 홍철(洪哲)이요, 자는 무민(無悶)이니, 교주도(交州道) 평강현(平康縣)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문사에 능하여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2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등제하였다. 처음에 응선부 녹사(膺善府錄事)에 임명되었으며,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

 

외방에 나가 장흥부(長興府)를 맡아서 혜정(惠政)을 펼치다가 얼마 뒤에 그만두고는 곧장 집에 돌아와서 한가히 지냈는데 그 기간이 모두 14년이었다. 스스로 중암거사(中菴居士)라고 호하고는 항상 부도(浮圖)의 선지(禪旨)와 금서(琴書)와 약을 조제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은 성품이 또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세상일에 아무 욕심이 없이 그대로 몸을 마칠 것처럼 보였다.

 

덕릉(德陵 충선왕 )이 평소에 공의 이름을 알고 있던 중에, 지대(至大) 무신년(1308, 충선왕 원년)에 이르러 신정(新政)을 행하게 되자, 현재(賢才) 얻기를 급히 여기면서 공을 크게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고집을 부리며 출사하려고 하지 않다가 강권에 못 이겨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곧바로 사의 부정(司醫副正)을 제수하였고, 다시 황경(皇慶) 임자년(1312)에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전임 지후(祗候)의 신분에서 한 번 몸을 일으켜 여덟 번 옮긴 끝에 5년 만에 재상의 지위에 오르니, 사림이 이를 영광으로 알았다.

 

연우(延祐) 갑인년(1314, 충숙왕 1)에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게 할 적에 공이 그 임무를 전담하였다. 이에 사방의 토지를 살펴 적절하게 삼양(三壤)으로 분류한 뒤에 옛 제도를 참작하여 개간된 토지에 징수하되 당시의 상황에 알맞게 하도록 힘쓰니, 공사(公私)가 모두 편하게 여겼다.

 

덕릉이 이 일을 계기로 공을 더욱 중시하여 누차 밀직사(密直使)를 가하였으며, 이듬해 겨울에 그 일이 일단 보고되자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올리고 삼사사(三司使)로 옮겼다가 뒤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승진시켰다. 경신년(1320)에 평강군(平康君)에 봉해졌다.

 

또 공의 자제 중에 원조(元朝)에 벼슬하여 5품의 직질(職秩)에 오른 자가 있어 은혜를 받고 태상예의원 판관(太常禮儀院判官)에 봉해졌는데, 이는 자계(資階)를 갖춘 훈작(勳爵)이었다. 지순(至順) 임신년(1332, 충숙왕 복위 1)에 의릉(毅陵 충숙왕 )이 복위하여 구인(舊人)을 임용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다시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얼마 뒤에는 또다시 순천군(順天君)에 봉하였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품계를 높이고 공신의 호를 가하였다. 그리고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의 신분으로 병자년(1336)에 공거(貢擧 시관(試官) )를 맡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제대로 뽑았다고 일컬어졌다.

 

공은 문장과 기예가 모두 정밀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석교(釋敎)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 도를 논할 적에는 비록 저명한 승려라고 할지라도 공이 한마디 말로 굴복시키곤 하였으니, 참으로 본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공은 일찍이 집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지어 놓고 항상 선승(禪僧)을 길렀는데, 그중에는 득도한 자도 꽤 있었다. 또 그 전단원 안에 약방을 차렸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많이 봤으므로 활인당(活人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뒤에 집 남쪽에 중화당(中和堂)이라는 건물을 짓고서 때때로 영가군(永嘉君 권보(權溥) ) 권공(權公) 이하 국상(國相) 8인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들었는데, 이는 대개 선현(先賢)의 모임을 본받은 것으로서 풍류가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공은 감식이 뭇사람보다 뛰어났고 그 풍유(風猷)는 세상에 보기 드물었다. 사람을 취할 때에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허물을 보고 어짊을 알았다. 그리하여 집에 있을 때나 남을 대할 적에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우러나오곤 하였으니, 정말 대아(大雅)한 군자라고 일컬을 만하였다.

 

증조 휘 모(某)는 상서령(尙書令)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모는 소부감(小府監)으로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모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保勝郞將)으로 첨의 정승(僉議政丞)에 추증되었다. 모친 박씨(朴氏)는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으로 한국태부인(韓國太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추증된 휘 모의 따님이다.

 

부인 김씨(金氏)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인데, 또 자제가 귀하게 되었으므로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다. 부인의 부친 휘 모는 지위가 첨의 중찬(僉議中贊) 상락공(上洛公)에 이르렀으며,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 )의 조정에 공을 세워서 중봉대부(中奉大夫) 도원수(都元帥)를 제수받았다.

 

부인은 유가(柔嘉)하고 숙선(淑善)하여 규문의 법도를 잘 지켰다. 자녀 5인을 낳았다. 장남 하중(河中)은 연곡(輦轂 연경 )에서 숙위하다가 태부부 자의참군(太傅府咨議參軍)에 뽑혔으며, 본국에서도 간간이 벼슬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고 지금은 평강군(平康君)이다.

 

다음 하로(河老)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이다. 다음 선지(先智)는 불교를 배워 계조연진 대선사(繼祖演眞大禪師)가 되었다. 장녀는 지금 계림 부윤(雞林府尹) 검교 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인 설현고(薛玄固)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고(故) 좌우위 보승별장(左右衛保勝別將) 정광조(鄭光祖)에게 출가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모범을 잃고 나라는 시귀(蓍龜)를 잃었다고 탄식하며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8일 경인에 성 동쪽 언덕에 장례 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덕이 있어야 / 人之有德
지위도 수명도 누리는 법 / 必位必壽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 亦或不然
공은 덕이 있어서 누릴 수 있었다오 / 惟公克有


오직 우리 공만이 그러했나니 / 惟其有之
그래서 영원히 전해질 것이라오 / 是以不朽

 

[註01] 삼양(三壤) : 징세(徵稅)에 편리하도록 토질에 따라 상ㆍ중ㆍ하의 3등급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주-D002] 선현(先賢)의 모임 : 송(宋)나라 때 문언박(文彦博)이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으면서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하여 부필(富弼)ㆍ사마광(司馬光) 등 13인의 학덕(學德) 높은 노인들과 함께 만든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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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元奉議大夫, 太常禮儀院判官, 驍騎尉大興縣子。高麗純誠輔翊贊化功臣, 三重大匡, 右文館大提學, 領藝文館事。順天君蔡公墓誌銘。

 

李穀(이곡) 찬(撰)

 

至元六年歲在庚辰正月十日癸亥。大興縣子順天君蔡公年七十九。以疾卒于其第。將葬以禮。其子壻以公之行狀乞銘於李糓。糓曰。公之行義高一時而功德著于國。於銘何有。公諱洪哲。字無悶。交州道平康縣人。生十八。以能文詞。中成均試。二十三。登進士第。始命膺善府錄事。五轉而爲通禮門祗候。出守長興府有惠政。已而棄郡。卽閑于家凡十四年。自號中菴居士。常以浮圖禪旨琴書劑和爲日用。性又不喜干謁。與世淡然。若將終身焉。德陵素知其名。至大戊申。新政急賢。將大用公。公卧益堅。強而後起。卽除司醫副正。皇慶壬子。拜密直副使。由前祗候一起而八遷。五年作相。士林榮之。延祐甲寅。使正經界。公專其任。廼相四方三壤之宜。酌其古制。徵其定墾。務適於時。公私以便。德陵益器之。累加密直使。明年冬。以事已聞。陞僉議評理。轉三司使。尋遷贊成事。庚申。封平康君。有公子仕元朝秩五品者。以恩封大常禮儀院判官。具階勳爵。至順壬申。毅陵復位。圖任舊人。再起相之。旣又更封順天君。進階三重大匡。加功臣號。仍以大右文領藝文館。知丙子貢擧。時稱得士。公於文章技藝。皆極其精。而尤深於釋敎。至論其道。雖稱開士。公片言折之。苟無所見。烏能如是耶。甞於第北。刱旃檀園。常養禪僧。頗有得道者。又施藥園中。國人賴之。呼爲活人堂。後於第南作堂。名中和。時邀永嘉君權公以下國相八人爲耆英會。盖慕昔賢而風流不减焉。公鑒識絶倫。風猷希代。取人無備。觀過知仁。居室接物。一團和氣。可謂大雅君子矣。曾祖諱某。贈尙書令。祖諱某。小府監。贈平章事。考諱某。左右衛保勝郞將。贈僉議政丞。妣朴氏。昇平郡夫人。贈韓國太夫人。贈知密直事諱某之女也。夫人金氏。永嘉郡夫人。亦以子貴。封大興縣君。考諱某。位至僉議中贊上洛公。有功世皇朝。授中奉大夫都元帥。夫人柔嘉淑善。克持閨門。生子五人。長男河中。宿衛輦轂。選太傅府咨議參軍。間仕本國。判三司事。今爲平康君。次男河老。判宗簿寺事。次男先智。學佛爲繼祖演眞大禪師。長女適今雞林府尹檢校僉議評理薛玄固。次女適故左右衛保勝別將鄭光祖。先公歿。公之卒也。人亡楷範。國失蓍龜。莫不嘆悼。以四月初八庚寅。葬城東原。銘曰。

人之有德。必位必壽。亦或不然。惟公克有。惟其有之。是以不朽。<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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