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노재 - 퍼온글

■노재를 지내고나서 형님께 여쭈었더니, 아래와 같이 답변해 주셨다.(이하 요지) 그리고 그후 다시 성균관에 참고삼아 질문 글을 띄웠더니 아래와 같이 자세한 답변이 있었다.그래서 여기에 옯겨 놓는다.(질문 내용 중 추모사 부분은 실제 진행하였던 상황과는 약간 변형함 ) ◈명륜골 선비 (2010-02-27 16:09:54) ◇노제에 대하여 노제는 예서에 의거하면 바른 예법은 아닌 듯 싶습니다. 하기(下記)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1.임금만이 영구를 멈출 수 있고, 나머지는 그럴 수 없으니 감히 신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다. 2.주인이 어버이를 섬기는 예로 제전을 올리며, 친구는 전이나 물건을 올리는 것을 도울 뿐이다. 3.광기(廣記)에 이르기를 노제는 매우 의미 없는 것이다. 4.조선초 ..

겸손은 높고도 빛 난다

■겸손은 높고도 빛 난다 - 이덕무(李德懋) 有所挾而驕。淺也。無所挾而驕。昏也。 유소협이교。천야。무소협이교。혼야。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고 교만을 부리는 자는 천박하고 믿을 만한 구석도 없는데 교만을 부리는 자는 아둔하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사소절(士小節)〉,《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설] “지위가 높아지면 교만하지 않으려 해도 교만해진다.[位不期驕]” 라는 말이 《서경(書經)》에 나옵니다. 권력, 재력, 능력 등과 같이 믿고 과시할 만한 것이 있으면,..

목은 선생(이색)의 출생지

■ 목은 이색의 출생지 이색(李穡, 1328년~1396년)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字)는 영숙(潁叔), 호(號)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선생이 이 곳에서 태어난 까닭은 아버지 이곡(李穀)이 복주(지금의 안동)에서 사록참군사직(事錄參軍事職)이라는 벼슬을 할 때 이 곳 영해지방의 토호인 함창김씨(咸昌金氏) 진사(進士) 김택(金澤)의 따님과 혼인을 하면서 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여말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성주 출신의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 영천 출신의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와 ..

다산자찬 묘지명(茶山自撰墓誌銘)/집중본(集中本)

■ 다산의 자찬 묘지명(茶山自撰墓誌銘)/집중본(集中本) [생졸년] 1762(영조 38)~1836(헌종 2) / 74歲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무덤이다. 본명은 약용(若鏞)이고, 자는 미용(美庸)이며 또 송보(頌甫)라고도 한다.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니 ‘주저하기를 겨울에 내를 건너듯 하고 조심하기를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사(蔭仕)로 벼슬이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고,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오늘날 楊洲郡 瓦阜面 陵內里)에서 용(鏞)을 낳으니 때는 건륭[乾隆 청 고종(淸 ..

서모 김씨 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 - 다산 정약용

■ 서모 김 씨 묘지명(庶母 金氏 墓誌銘) 정약용 찬(丁若鏞 撰) 서모 김씨는 사역원 정(司譯院正)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의택(金宜澤)의 딸이다. 본관은 잠성(岑城)이니 지금 금천군(金川郡)에 합하여졌다. 우리 선고(先考) 통정대부(通政大夫) 진주 목사(晋州牧使) 휘 재원(載遠)이 건륭(乾隆) 경인년(1770, 영조 46)에 우리 어머니 숙인(淑人)을 잃고 그 이듬해 금화현(金化縣)의 처녀 황씨(黃氏)를 취하여 측실(側室)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요사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 49)에 또 서울에서 처녀 김씨를 취하여 측실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 20이었으니 곧 서모(庶母)이다. 천성이 명민(明敏)하고 작은 체구에 말이 적었으며 또 부드럽고 화평하였다. 우리 아버지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섬기..

정약현 묘지명(丁若鉉 墓誌銘) - 다산 정약용선생 맏형

[생졸년] 정약현『丁若鉉, 1751년(영조 27) ~ 1821년(순조 21)』 ■ 선 백씨 진사공 묘지명 (先 伯氏 進士公 墓誌銘) 정약용 찬(丁若鏞 撰) 공은, 휘(諱)는 약현(若鉉)이고 자는 태현(太玄)이다. 우리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지금 나주(羅州)에 예속되었다. 고려 때에 무관(武官)이 연달아 9세(世)를 이어 내려왔다. 시조 윤종(允宗)은 종3품 대장군이니 당시의 부장(副將)이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문직(文職)이 연달아 9세를 이어 내려왔다. 그 사이에 은사(隱士) 연(衍)이 있으니 우리 태조가 혁명하던 초기에 은둔(隱遯)하여 벼슬하지 않고 위로 조상을 잇고 아래로 후손을 열어줌으로써 우리 정씨의 복을 돈독히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자급(子伋),..

정약용 가계도(丁若鏞 家系圖)

■ 정약용 가계도 (丁若鏞 家系圖) ↑그림 : Naver Photo Viewer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나주정씨 23대손으로 15대조 넷째이신 윤복(도헌공파)의 8대손이다. 다산의 친인척들은 유배당한 사람, 이벽은 단식 끝에 사망하였고, 채제공은 사후 삭탈관직 되었고, 며느리는 요절 했다. ○ 정약용의 가문은 친가, 외가, 사돈이 모두 남인 계통이다. ○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부이며, 동시에 사돈이 된다. ○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의 어머니는 거제도, 부인은 제주도의 관노가 되었으며, 두살난 아기 는 추자도에 버려졌다가 어부에 의해 길려졌다. ○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정약용과 정약전도 각기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귀양살이 16년되던 해 죽었으며, 정약용은 18년만에 풀려났다.

다산 자찬 묘지명(茶山 自撰 墓誌銘) - 광중본(壙中本)

■ 다산 정약용 자찬 묘지명(茶山丁若鏞自撰 墓誌銘) - 광중본(壙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직(蔭職)으로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鏞)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세(1783, 정조 7)에 경의(經義 과문 육체(科文六體)의 하나)로 생원(生員)이 되고,01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 13, 1789)에 갑과(甲科)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의 선..

김좌근(金左根)/新安東人

■김좌근(金左根) [문과] 헌종(憲宗) 4년(1838) 무술(戊戌) 정시(庭試) 병과(丙科) 6위(9/11)/합격연령 42歲 [생원시] 순조(純祖) 19년(18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위(33/100)/합격연령 23歲 --------------------------------------------------------------------------------------------------------------------------------- 1797(정조 21)∼1869(고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신안동(新安東).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이중(金履仲)이고, 아버지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미수 허목선생 묘(眉叟 許穆先生墓)

■ 미수 허목선생 묘(眉叟 許穆先生墓) 허목(許穆 : 1595년~168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및 학자로.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甫)· 화보(和甫), 호(號)는 미수(眉)이다. 동시대의 정치가 우암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하다. 이황의 제자인 한강 정구에게 수학하였으나, 박지화의 제자였던 부친 허교와 외조부인 임제의 영향으로 천문, 지리, 도가 등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글씨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조예가 깊어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미수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인에서도 청남에 속하며,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미수 선생 영정(眉叟先生影幀) 1794년 당대 제일의 화가 이명기(李命基)에 의해 노학자의 면모를 그려낸 빼어난 작품이다.눈을 덮은 듯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