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文正公 靜庵 趙光祖 墓志銘

야촌(1) 2008. 3. 2. 13:38

■ 문정공 묘지명(文正公墓志銘)

    [생졸년] 1482년(성종 13)~1519년(중종 14)

 

정덕(正德) 연간, 기묘(己卯,1519)년 12월 20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께서 화순 능주(綾州)의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다음 해 선영(先塋)을 따라 용인(龍仁) 심곡리(深谷里)에 이장하여 부인 이씨(李氏)와 합장하였다.

 

만력(萬曆) 연간, 경진(庚辰,1580) 년에 성균관의 모든 유생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직 선생의 여덕(餘德)이 다하지 않아 선비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은덕을 받고 있습니다.

 

선생의 덕을 숭상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면 마땅히 성대하게 의례를 다 하여야 할진대, 오늘날 묘소 가는 길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없고유택(幽宅)에는 지석(誌石)이 없어, 선생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밝히지도, 선생의 공적을 표시하여 영원히 빛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마침내 서로 협력하여 자금을 모아 일을 분담하고 석수장이를 모아 돌을 갈았다. 위로는 조정의 고위 관료로부터 아래로는 미관말직(微官末職)의 관료들, 벽촌의 가난한 선비들, 잠시 선생의 소문을 들었을 뿐인 사람들까지 모두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도와, 힘 안 들이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군중(群衆)이 나, 이이(李珥)에게 지명(誌銘)을 쓰라 하여,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 못됨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사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러러 선생을 생각하건대 도덕적 업적은 이미 나라의 사서(史書)에 밝게 기록되어 있고, 퇴계(退溪) 선생께서 행장(行狀)을 쓰셨고, 재상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공(公)께서는 비문을 쓰셨거늘, 무슨 더 할 말이 있어 군더더기를 더할 것인가?

 

돌이켜 보건대 묘지명(墓志銘)을 이미 쓰기로 한 마당에 아무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생의 세계(世系)와 경력, 자질, 학행, 업적, 후사(後嗣)를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선악과 화복(禍福), 운명의 성패를 논술하고자 하는데 묘지명(墓誌銘)으로는 이것으로 족할 것이다.

 

아!

선생의 생전 이름은 광조(光祖), 자(字)는 효직(孝直)이며 정암(靜庵)은 그의 호(號)이다. 조(趙)씨는 한양(漢陽)의 이름 있는 성씨이며 선생의 고조는 ‘온(溫)’이다. ‘온(溫)’은 태조를 보좌하여 개국공신에 녹명(錄名)되었고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양절(良節) 공(公)은 의영(義盈) 고사(庫使) ‘육(育)’을 낳았다. ‘육(育)’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참판(參判) 공(公) ‘육(育)’은 성균사예(成均司藝) ‘충손(衷孫)’을 낳았다. ‘충손(衷孫)’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판서(判書) 공(公) ‘충손(衷孫)’은 ‘원강(元綱)’을 낳았다.

 

‘원강(元綱)’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선생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閔)씨이며 현감(縣監) ‘의(誼)’의 딸이다. 성화(成化) 연간, 임인(壬寅,1482)년 8월 10일에 선생을 낳았다.

 

아!

선생은 열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셨다. 정덕(正德) 연간, 경오(庚午,1510) 년에 진사 시험에 응시하여 수석을 차지하셨다. 신미(辛未,1511) 년에 어머니를 여의셨다. 을해(乙亥,1515) 년에 ‘효행이 있고 청렴한 사람’이라 하여 천거되어 조지서(造紙署)의 사지(司紙) 벼슬을 받으셨다.

 

이 해 가을, 중종(中宗) 임금께서 알성시(謁聖試)를 시행하셨는데 선생이 응시하셨고 선생을 을과(乙科) 수석으로 발탁하셨다. 선생에게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제수하시고 곧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호조(戶曹) 예조(禮曹) 공조(工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으며, 수찬(修撰)으로 승진시키셨다.

 

정축(丁丑,1517) 년에 부교리(副敎理)인 선생에게 집에서 쉬며 독서할 수 있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특별 은전을 주었으며 응교(應敎)에 특진시켰고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시키셨다. 무인(戊寅,1518) 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品階)를 올리시고 부제학(副提學)을 제수하셨으며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보시키셨다.

 

중종(中宗) 임금께서는 선생을 곁에 두고 군왕(君王)의 도리를 익혔어야 했음에도 오히려 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임명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품계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직책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진급시키시고,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기게 하였으며 전례에 따라 성균(成均)을 겸직하게 하셨다.

 

기묘(己卯,1519) 년 봄에 부제학(副提學)을 제수하시고 여름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전보시키셨다.

겨울, 밀고자(密告者)의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된 의금부(議禁府)의 사건은 장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 공께서 힘껏 주청(奏請)하여 사형은 면했지만 유배형을 받게 되었고 끝내 사약을 내려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니 이 때 선생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아!

선생의 타고난 품성은 뛰어나셨다. 윤기 있는 준수한 얼굴은 달덩이 같았으며 용모는 맑고 빼어나 난(蘭) 가득한 달빛 같았다. 행동거지는 볼만하였으며 영준(英俊)한 자태는 난(鸞) 새가 비상하는 듯하였다. 부모에게는 효도하였으며 형제간에는 우애하였으며 나라에는 충직하셨다.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강단(剛斷)이 있었다.

 

어려서는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으며 의기가 넘쳐 감격하곤 하였다. 큰 뜻을 가지고 성현(聖賢)의 덕을 사모하였으며 반드시 성현의 사적(事迹)을 따르고자 하였다.

 

속인들이 선호하는 것이라면 그 것이 제후의 군대와 후한 녹봉(祿俸)일지라도 한 점 개의하지 않았다. 선행을 좋아하고 악행을 싫어하였으며 남의 비행이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보게 되면 마치 자신이 더럽혀질 것 같이 여기셨다.

 

아!

선생이 어렸을 적에 부공(父公)께서 어천(魚川) 찰방(察訪)으로 나가셨다.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께서 득죄(得罪)하여 연산군(燕山君)이 선생을 어천(魚川)의 이웃 읍인 희천(熙川)에 유배하였다.

 

정암(靜庵) 선생께서는 평소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학문이 근원(根源)이 있다는 것을 듣고 있었던 터라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수업을 받게 되었다. 당시는 사도(師道)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 되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지만 선생께서는 상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비로소 학문의 대도(大道)를 듣게 되었다.

 

이로부터 스스로 더욱 열심히 과정을 공부하셨으며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 사자육경(四子六經)을 가혹하리만큼 독실하게 믿으셨다. 평소에도 단정하게 팔짱을 높이 낀 채 무릎을 꿇고 정좌(正坐)하셨으며 공명정대하고 엄숙하셨다. 위엄 있는 자태는 중정(中正)에 이르렀으며 나아감과 물러남이 단정하셨다.

 

일찍이 천마산(天磨山)과 용문산(龍門山)으로 공부하러 갔었는데 여가가 생기면 혼자서 자문자답하곤 하셨다. 어떤 때에는 해시계가 꼼짝 않고 있는데도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곤 하셨다.

 

새벽 네 시쯤에는 반드시 일어나셨는데 수도하는 승려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집에 거처하며 정성을 다하여 어른들을 보살필 수 없게 되자, 줄곧 어버이의 깊은 정을 회상하셨다.

 

사당에 참배할 때는 예를 갖추었으며 사당이 집안에 있지 않았으나 매일 한 번은 반드시 다녀오셨다. 비록 공무가 바쁘고 태풍과 눈비가 올지라도 조금이라도 법도(法度)를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시지 않았다.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틈이 생기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두 번 세 번 다짐하고 은혜와 의리를 독실하게 하였으며 여색을 멀리 하셨다. 음주를 경계하고 젊은이들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진출하는 것을 장려하셨다. 세속적 가치를 물리치고 유학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이단(異端)을 배척하셨다.

 

집안에 있을 때면 인사법에 맞추어 손님을 접대하였고 한결 같이 옛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에 따라 판단하였으며 오로지 서경(書經)의 가르침을 규칙으로 삼으셨다. 혹시 터럭 같은 사소한 비례(非禮)라도 겪게 되면, 마치 자신이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은 채 진흙탕에 앉아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안해 하셨다.

 

하늘이 준 재능이 이미 달랐지만, 부모를 공양함에 절도가 있었고 화려한 빛이 외부에 드러나 한 세대를 감복시켜 이를 바라본 자들은 한결 가치 찬탄하였다. 거리에 나서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매번 뵐 때 마다 말 앞에서 죽 에워싸고 절을 올렸으며, 머리를 들고는 음식을 올리고 칭송하였다.

 

슬프도다!

이는 선생의 품성이 유연하고 선미(善美)하였다는 것과 위엄 있는 풍모가 옥(玉)과 같았음을 말함인데,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재앙을 부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아!

선생께서는 한 세대에 뛰어난 재능을 받고 태어나셨으며 적용 가능한 학문을 가슴에 품으셨다. 임금을 감화하고 백성을 안심시키는 것, 이것이 선생의 본디 굳은 마음이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마치 아무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숨어 있었으나 명성은 높아져 조정 대신들이 다투어 천거하였다.

 

사지(司紙)를 제수 받은 뒤 선생께서는 기뻐하지 않았으며 ‘공허한 명성으로 벼슬을 얻느니 과거에 응시하여 도학(道學)을 실천하는 길을 여느니만 못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지(司紙)를 제수 받은 뒤에 선생의 명성은 중종(中宗)에게 알려져 매월 영전하고 해마다 승진하여 몇 년 되지 않아 홍문관(弘文館)과 사헌부(司憲府)의 수장(首長)이 되셨다.

 

중종(中宗) 임금께서는 본디 유학을 숭상하고 문치(文治)에 관심을 두셔서 선생에게 크게 의존하셨다. 선생께서는 요순(堯舜) 시대의 군민(君民)을 만나 유학(儒學)을 일으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으로 생각하셨다.

 

임무로 궁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謁見)하려 할 때면 매양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셨다. 임금께 나아가 보좌하게 되면 오로지 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셨으니 마치 신명(神明)을 대하 듯 하였다. 아는 것이면 반드시 말씀하셨으며 말씀하셨다 하면 직언(直言)이었다. 그 말씀은 이러 하였다.

 

“사람의 ‘한 마음(一心)’이란 천리(天理)이며 본래 완전합니다. 그 것은 커서 외연(外延)이 없고 운행을 멈추지 않으며 진실로 기백(氣魄)과 격식(格式)에서 비롯합니다. 큰 것을 가리고 가능하면 작게 운행하고자 하는 자들이 간혹 백성들 사이에 있습니다.

 

그 폐해도 구제하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군왕(君王)은 그 권세와 지위가 높고, 분수에 넘칠 수 있으며, 여색을 탐하기 쉽고, 아부 공세가 필부(匹夫)에 비교할바가 아닌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한 번 바르지 못하고 기(氣)가 한 번 도리(道理)를 따르지 않으면, 사업에는 폐해를 낳고 정치에는 불화(不和)를 낳아, 해악을 불러 인간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파괴하여, 만물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일심(一心)을 보존하는 까닭은 하늘을 섬겨 중용(中庸)의 극치에 이르고자 함인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명분(名分)과 실리(實利),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에 관한 논변(論辨)에 당면하여, 고금(古今)의 안정된 시기이든 혼란한 시기이든 군자나 소인배들의 진퇴(進退)와 성쇠(盛衰)의 모습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논쟁으로 혹시 해가 기울기에 이르더라도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우시고 조정의 논의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중종(中宗)께서 비밀리에 군대를 움직여 여진족 ‘속고(速古)’를 기습하려 하였다. 마침내 전장(戰場)에 내 보낼 장수들을 인견(引見)하시고 계책을 물었는데 장수와 재상들이 임금을 둘러싸고 논의한 계책은 이미 결론이 난 것이었다.

 

선생께서 밖으로부터 나아가 말씀하셨다. “이는 교활한 속임수와 같아 왕도(王道)를 실천하려는 임금님께서 취할 국가 방비의 도리가 아닙니다. 당당한 나라가 도적들의 술수나 쓰다니, 신(臣)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중종(中宗)께서는 중론을 물리치고 선생의 말씀에 따랐다. 장수와 재상들이 떼 지어 간언(諫言)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 선생에 대한 중종(中宗)의 신임이 어찌 ‘지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선생께서는 시의(時宜)를 같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이름난 신하들과 협력하고 도와 국가적 사업을 성취하였으며, 경륜을 펼쳐 사업 영역을 넓히고 일으키셨다. 천거과(薦擧科)를 설치하여 준재(俊才)들을 불러 모았으며, 소격서(昭格署)를 혁파(革罷)하여 제사 의식을 바로 잡고, 소학(小學)을 가르쳐 영재를 육성하셨다.

 

오랜 폐단은 점차 혁파(革罷)되었으며 옛날 성왕(聖王)들의 제도가 점차 일어나게 되었다. 모든 관료들이 삼가고 임무에 충실하였으며 나라 전역이 감화되어갔다. 과거시험에 관한 논쟁은, 빠르게 처리하려한 나머지 예봉(銳鋒)을 너무 드러낸 채 건의하여, 어쩌면 실패하였다. 부도(不度)와 시의(時宜) 사이에 있는 ‘좋은 일(好事)’이란 것은 시류(時流)에 영합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선생께서는 이를 걱정거리로 여겼는데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은 올바른 논의를 덮어 가렸으며, 직무상 사건으로 인하여 밀려난 자들은 원한이 골수에 맺혀 이를 갈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선생께서는 ‘왕도(王道)를 안다 해도 즉각 시행할 수 없고 치국(治國)의 대계(大計)가 있다 해도 바로 성취할 수가 없구나!’라고 탄식하셨다.

 

이렇게 조금씩 조절하는 한편 마음을 다잡으면서 명성뿐인 공신들을 정리하려고 서두르셨는데, ‘짐짓 정직한 체 한다는 논의(矯激之論)’가 일어 오히려 선생을 ‘겉만 번드레한 사람(色莊)’이라고 비난 하였으며 선생을 탄핵(彈劾)하려 하기에 이르렀다. 선생께서는 당면과제의 성취는 어렵다 판단하고 임금께 사퇴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 받지 못하셨다.

 

중종(中宗) 임금께서는 조정 논의에 따르도록 명하셨고 조정 논의는 부풀려진 정국공신(靖國功臣)의 공적을 공신록(功臣錄)에서 소급하여 삭제하자는 것이었다. 선생께서는 이미 사퇴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기강(紀綱)을 세우고 사리(私利)의 근원이 되는 직위를 봉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조정 논의를 실천하자면 임금의 동의를 얻어내야 했으므로 궐문 앞에 꿇어 엎드려 몇 달을 주청(奏請)한 끝에 윤허(允許)를 얻어내셨다. 많은 신하들이 임금의 자리 앞에 입시(入侍)하였고 공권(功券)의 여탈(與奪)이 결정될 판이었다. 이 때가 기묘(己卯,1519)년 11월 15일이었다. 유불(兪咈) 아무개라는 사람은 스스로 놀라 위훈(偉勳) 비밀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그 날 밤,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몰래 궐문을 열고 편전(便殿)으로 들어갔다. 임금께서는 선생을 의금부(義禁府)에 송치한 사실을 비밀에 부쳐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의 모든 유생들이 울며 궁궐로 달려가 다투어 옥(獄)에 이르러 자신을 수감할 것을 자청하였다.

 

선생의 유배형이 결정되자 중종(中宗) 임금께서는 근시(近侍)로 하여금 개인적 비리로 인한 죄가 아니라고 선생을 타이르도록 하였다. 곧 조정 논의를 좇아 문책할 뜻을 보이자 선생께서는 삼가 사례하고 사직하셨다.

 

사약(賜藥)을 받게 되자 선생께서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자기의 죄명(罪名)을 들려줄 것을 사자(使者)에게 요청했으나 사자(使者)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께서는 갓끈을 매고 사약을 받으시며 친구에게 ‘임금 사랑하기를 부모처럼 하였다. 하늘의 해가 나의 충성심을 비춰 주리라.’ 라는 글을 남겼다. 이를 전해들은 자 모두 통곡하였다.

 

아!

선생의 부인(夫人)께서는 첨사(僉使) 벼슬을 한 이윤형(李允炯)의 딸이다. 아들 둘을 낳았다. 첫째가 ‘정(定)’인데 현감(縣監) 권흡(權洽)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식 없이 일찍 죽었다. 둘째는 ‘용(容)’이며 음직(蔭職)으로 문천(文川) 군수(郡守)에 이르렀으나 후사(後嗣)가 없어 사촌 동생 ‘희안(希顔)’의 아들 ‘순남(舜男)’을 입양하여 뒤를 잇게 하였다.

 

아!

하느님의 음덕(陰德)은 착한 자는 반드시 북돋아 기르고 악한 자는 반드시 무너뜨린다는데, 화복(禍福)의 이치는 참으로 명백하다. 오늘 날 선생께서는 비상(飛翔)하는듯한 절개로 왕궁의 뜰에 드러나셨다.

 

거짓 없는 마음을 열어 임금의 진노(震怒)를 사기도 하셨으며, 임금과 아버지가 있음은 알았지만 자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셨다. 자신을 단속하여 청렴한 곤궁을 견디셨고, 청탁이 통하지 않았으며, 국가에서 붙여주는 말구종도 받지 않으셨다.

 

퇴근하시면 집안일에 대하여 묻지 않았으며 종일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정치적 폐단과 민생고였다. 성심을 다하여 잠시도 쉴 틈이 없었으니 차라리 머슴이었다. 그런데도 참소의 예봉을 맞아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선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는 하늘의 이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저 유창하게 말 잘하는 자들은 사람이 만든 관작(官爵)은 중시하나 하느님이 정한 품계는 경시하며 틈만 나면 이끗을 노린다. 집은 칠을 하여 빛을 내고 제 몸은 살찌우면서 국가 안위(安危)에는 마치 호(胡)나라가 월(越)나라의 재앙(災殃)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심이 멀다.

 

터럭 하나 뽑지 않고 인색하게 굴면서도 온화한 얼굴빛을 하며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세상을 겪고 살아가는 면에서는 자신이 성인(聖人)이라고 간주하며 오히려 ‘방자하고 나이 어려 세상사를 이해하지 못 한다’며 선생을 비웃는다. 화(禍)의 빌미를 부추겨 만들어내며 심한 자는 현자(賢者)를 상하게 하기에 이른다.

 

도적들은 이러한 기류(氣流)를 확고히 하여 심는데 익숙하다.

이런 부류들이 임금에게 신임을 얻어 녹봉(祿俸)과 관위(官位)를 편안히 누리고, 늙어 들창 밑에서 제 명을 다하고 죽는데, 이른 바 ‘나쁜 일을 많이 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말은 역시 모르고 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길 ‘제 자신을 위해 은밀히 도모하는 자는 그 수레가 화려하고, 나라를 위하여 남몰래 도모하는 자는 그 자손이 가난하다.’고 하였다. 애비는 그 자식에게 이르고 형은 그 동생을 부추겨, 모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명철(明哲)한 것이며 일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는 것은 천박하고 경솔한 짓이라고 말 한다.

 

선비의 기풍은 흐려지고 세상의 도리는 오염되었구나! 슬프도다!

그렇지만 인심이란 본래 공평하고 천리(天理)는 아직 변하지 않아, 하늘의 구름은 이내 사라지고 태양은 다시 빛난다. 중종(中宗) 임금 만년에 모두들 선생의 무죄를 말하면서도 논의는 처음부터 분산될 조짐이 있었다.

 

인종(仁宗)에서 명종(明宗)으로 이어지면서 관부(官府)는 서류를 구비하여 상주(上奏)하고 해명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에서는 하늘을 향하여 선생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선생의 유지(遺志)를 추모하게 되고 임금께서는 선생의 관직과 품계를 회복시킬 것을 명하셨다.

 

현재의 선조(宣祖) 임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생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졌으며 ‘건심(乾心)’ 향약(鄕約)을 더욱 확산시켰다. 선조(宣祖)께서는 선생의 품계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올리고,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과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觀象監)의 영사(領事)를 겸직하는 것으로 추증하여 받들 것을 조정(朝廷)에 명하셨다.

 

이 해가 융경(隆慶) 연간, 무진(戊辰,1568) 년이다. 다음 해 기사(己巳,1569) 년에 시호(諡號)로 문정(文正)을 내리셨다. 이렇게 되자 선생의 밝은 빛은 투명하게 드러났으며 상하 계층의 많은 선비들이 태산과 북두칠성을 우러러보듯이 사당을 세우고 삼가 제사함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사의 예식은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선생 서거(逝去) 후 60년이 이미 지났건만 추모의 정은 변함없이 나라 전체에 이르고 있다. 유림(儒林)은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더벅머리를 면한 애들이 제물을 땅에 묻는 동안, 묘지에 이르는 길을 아름답게 꾸몄다. 이는 진실로 고금을 통하여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바인데, 대제(大祭)의 존엄(尊嚴)이 만세(萬世)에 이를 것이다.

 

부귀를 중시하고 명망 있는 인재를 멸시하는 자들은 한 때 영화롭고 안락할 것이나, 세월은 빠르고 육체는 초목처럼 썩어, 더러운 잡초 사이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기나 등에와 다를 바가 없다.

 

그 것들이 독 있는 주둥이를 열어 선량한 인재를 제거함으로써 나라의 명맥이라는 것을 끊어 놓는다면, 사람들이 그들을 그물질 할 것인데 살아서 요행히 도끼를 피한다 하더라도 귀신이 목을 베고 사람들은 그들을 살육할 것이다. 죄의 추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준엄하다.

 

어린 애들도 역시 알고 침 뱉으며 욕할 것이거늘 하늘이 내린 벌은 하늘과 땅 끝이 다하도록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의 이야기로는 영욕(榮辱)을 비교하여 논단(論斷)하기에는 실로 부족하다. 오로지 후세들만이 아마 내가 경계하도록 권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아!

하느님께서 현자를 낳은 것은 반드시 그로 하여 이루고자 함이 있을 것인데, 등용되면 백성을 구제하고 물러나면 천도(天道)를 바로 세우라는 것이다. 오늘 날 선생께서 등용되었으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해, 천도(天道)는 퇴조(退潮)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교훈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날로 밝아지는 학문을 지녔어도 완성(完成)에 이르지 못했다면 오묘한 말씀의 실마리는 찾아 연구할 방법이 없다. 하물며 우리나라가 기자(箕子) 이후 인의(仁義)로써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을 들을 수 없었고, 유가(儒家)의 가르침은 실천도 없이 단지 공허한 말씀에만 의존하고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선생께서 한 번 외치면 성왕(聖王)들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선생께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자 사림(士林)은 붕괴되었고, 왕도(王道)를 말하는 것은 시대적 금기(禁忌)가 되었는데, 모두 이를 시기가 성숙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

 

그렇다면 우리의 나아갈 길은 끝내 복구할 수 없을 것인가! 하늘이 현자(賢者)를 내어 도중에 꺾어버리니 천명(天命)은 끝내 믿을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찌 그러하단 말인가!

 

시기(時期)라는 것은 하느님이 만든 것이다. 이 것은 인재(人才)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뿐인데 어찌 시기(時期)가 맞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임금께서 선생을 찬양(讚揚)하는 것을 장려해 이미 숭앙(崇仰)함이 극에 이르렀으며, 유도(儒道)를 숭상하고 학문을 확실하게 통일하여, 학자들이 믿고 따르며 공명(功名)을 말함에 교언(巧言)하지 않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선생께서는 천리(天理)를 밝혀 박절한 인심을 맑게 하셨다. 이에 빛을 잃었던 태양이 빛을 발하며, 이 분으로 하여금 등용되게 하고 임금을 깨우치게 하여, 임금이 패도(覇道)의 결점을 순화하게 하였으며, 지선(至善)에 이르는 것을 주인(主人,목표)로 하고 예(禮)를 제방(堤防,수단)으로 하여, 스스로를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하였다.

 

편안한 집은 비울 수 없고 바른 길은 버릴 수 없다면 선생의 도리(道理)는 간단명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께서는 다음 왕이 태평세대를 열게 하였으니 하늘은 괜히 생명을 낳지는 않았다. 이제야 하늘을 믿을 수 있겠구나! 선생을 뒤이어 성취하고자 하는 자들은 자신이 등용되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될 것을 생각할 일이다!

 

익지 않은 대추알이 공부하여 비로소 은(殷) 나라를 열었다. 나라의 교육을 관장하는 대사성(大司成)이 백성을 교화하였건만 훌륭한 말씀을 멀리하여, 사라져 없어진 학문의 단서(端緖)는 찾을 수가 없다.

 

아!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선생께서 홀로 노래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깃털에 ‘절화(絶和)’를 새겼도다. 겨우 겨우 그렇게 했지만 얻은 것은 없었도다.” 하느님은 그에게 궁형(宮刑)을 내리지 않아 두 선생 사이에서 학문이 독실하게 일어났으니 기세는 한악(漢嶽)과 같고 종소리는 맑아 곤륜산 편옥(片玉) 빛처럼 흠집 하나 없었다.

 

빼난 식견 일찍 가슴에 품어, 구도(求道)함에 스승에게 순종하고

기회 나면 스승 찾아 토론하여, 제자는 스승을 능가하였더이다.

 

수레바퀴 고정 쐐기 고쳐 넣으며, 임무는 크고 갈 길은 멀어도

자르고 연마함이 엊그제인데, 또 한 번 더 다듬고 갈았더이다.

 

요리 조리 살피며 기구 사용해 , 법도 맞춰 원과 네모 그리셨거늘

우린 믿지 못 합니다, 등용되지 못했어도 자신 감춘 이유를

 

예쁜 난초 향 저 멀리 퍼지는데, 그 뚜렷함 감추려 애쓰셨지만

나라의 빛으로 환히 드러나, 마침내 임금 부름 받았더이다.

 

부절이 들어맞듯 고기에게 물이듯, 임금에게 몸을 맡겨 순국하시니

높다란 의지는 우주를 떠받치고,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었더이다.

 

화살이 미풍(美風)을 돌이켜, 잡스런 풍속을 바로 잡았지만

권력이 요망함을 내보이자, 하마(河馬)가 간사함을 뽐냈더이다.

 

천지와 같은 덕이 드러나셨지만, 한 번 찍어 이처럼 넘어지시니

해도 달도 별과 함께 빛을 잃었고, 온 백성이 하나같이 울었나이다.

 

주상의 충심(衷心)을 하늘이 열어, 바다 위 짙은 안개 열어젖히고

해 지나 늦게라도 포상하시니, 떨치고 일어나 흠향(歆饗)하소서.

 

선비들은 그 말씀을 입에 올리고, 백성들은 가르침에 감복했나니

어스름에 좁은 길 헤쳐 여시고, 촛불 들어 어둔 밤 밝히셨도다.

 

숲 울창한 용인 땅 구성(駒城), 산은 감돌고 물길은 길어

밝고 아름다운 덕행 있었나니, 이 세상 다하도록 잊을 수 없어라.

 

이이 찬(李珥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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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文正公 墓志銘

 

正德己卯冬十二月二十日 靜庵先生趙公卒 于綾城謫所. 明年歸葬 于龍仁深谷里 從先兆 以夫人李氏祔. 萬曆庚辰 太學諸生 一口颺言. 曰 惟先生澤不斬 士于今受其賜 崇德報功 宜極盛典 今玆 神道無碑 幽堂不誌 無以昭虔 揭烈以耀無窮.

 

乃相與裒財俶役 募工礱石. 朝紳上自廟堂 下至一命 以及窮閻之士 苟聞先生之風者 擧競相助 不勞而事. 集使求誌銘 于德水李珥 珥謝非其人 不獲謝. 仰惟先生 道德事業 焯載國乘 退溪先生 狀其行 蘇齋蘆相公 銘其碑 豈有餘辭可贅. 顧旣應撰 不可無言. 乃略敍 世系 踐歷 資質 學行 設施 嗣息. 幷論 善惡禍福 天命否泰 而足以銘. 其敍曰.

 

嗚呼. 先生諱光祖 字孝直 靜庵是號也. 趙氏爲漢陽著姓 高祖諱溫 佐我太祖 錄開國 勳封漢川府院君 諡良節. 良節生 義盈庫使 諱育 贈吏曹叅判. 叅判生 成均司藝 諱衷孫 贈吏曹判書. 判書生 諱元綱 官至司憲府監察 贈吏曹叅判. 是爲先生顯考. 妣驪興閔氏 縣監誼之女. 成化壬寅八月十日 生先生.

 

嗚呼. 先生 年十九而孤. 正德庚午 試進士 冠其榜. 辛未丁內艱. 乙亥擧孝廉 拜造紙署司紙. 是年秋 中廟拜先聖 試士 先生應其科 擢乙科第一人. 授成均館典籍 俄遷司憲府監察 司諫院正言 歷戶禮工三曹佐郞 遷入弘文館副修撰 陞修撰. 丁丑以副敎理 賜假讀書 超拜應敎 陞典翰 直提學. 戊寅陞秩通政 拜副提學 遷承政院同副承旨 以先生 宜養君德 還長玉堂. 未幾進嘉善 兼同知成均館事 遷司憲府大司憲 例兼成均. 己卯 春 拜副提學 夏 遷拜大司憲. 冬 用告密者言下 禁府事叵測. 領議政鄭公光弼 力救 用次律被竄 竟賜自盡 年三十八.

 

嗚呼. 先生稟受絶人 玉潤金精 相表淸秀 蘭滋月朗 容止可觀 鳳儀鸞翔 孝友忠直 英睿剛果. 幼不好弄 已具成人 模範慷慨 有大志 興慕聖賢 必欲追踵絶軌 世俗所屑 雖千駟萬鍾 一不介意 樂善疾惡 見人非違 若將浼焉.

 

嗚呼. 先生少時 叅判公作 察訪魚川. 寒喧先生 金文敬公得譴 燕山謫 比邑熙川. 先生素聞 文敬學有淵源 因趨庭受業. 時師道廢久 人多指笑 先生不較不沮 始聞爲學之大方. 自是 益自刻勵科程 嚴苦篤信 小學及近思錄 四子六經. 平居正飭 高拱危坐 齊明嚴恪 威儀折中 進退翼如.

 

嘗入天磨龍門兩山 講習之暇 潛心大越. 或竟구兀然 淵黙 夜分乃寢. 五更必起 山人習禪者 皆嘆. 其不可及居家 事親色養 極其誠愼 終追遠情. 文備至家廟 在別所 日必一往. 雖公務鞅掌 大風雨雪 祁寒溽暑 不少廢 謹守法度. 以閑有家內外 斬斬正倫理 篤恩義 遠聲色 戒麯糱 獎進後生 各因其才 黜俗論排異端. 凡持身處家 應事接人 一稽古訓 惟書爲則. 若涉毫髮非禮 其心不安 若冠冕佩玉 坐于泥塗也.

 

天分旣異 充養有道 英華發外 聳服一世 望之者 咸咨嗟嘆息. 以至市里 蚩氓每値其出 羅拜馬前 仰首歆讚. 噫. 此先生柔嘉 令儀所玖 豈知 反以此胎禍哉.

 

嗚呼. 先生受命世之才 抱適用之學. 格君安民 此固素心 恥於衒玉 潛居若無意者 聲譽藹鬱 朝臣爭薦. 其除司紙也 先生不樂曰 虛譽得官 不如應擧 以通行道之路. 旣除之後 被知于中廟 月遷歲陞 不數年 長論思 主風憲.

 

上雅尙儒術 銳意文治 依先生甚重. 先生感 不世之遇便 以堯舜君民 興起斯文. 爲己任 每將入對 必宿齋戒 積誠敬. 其進侍也 一心熟慮 如對神明 知無不言 言無不讜 其言若曰. 人之一心 天理本全 其大無外 其運不息 良由氣局. 欲蔽大者 或小運者 或間在常人. 其害猶難救 況人君勢位 高亢驕溢 易生聲色 媚悅之攻 非匹夫比. 心一不正 氣一不順 則生於事害 於政傷和 召沴彛倫斁 而萬物不遂矣. 主上所以存心 事天 以致中和極功者 其可忽乎. 至於義利 王覇之辨 古今治亂之幾 君子小人 進退消長之象 無不罄蘊極論 或至日仄 上必虛心 傾聽朝議.

 

將潛師襲野人速古 乃臨遣將 將相環侍 諄謀已同. 先生自外進曰, 此事猶狙譎 非王者禦戍之道. 堂堂國家 行盜賊之術 臣竊恥之. 上乃却衆議 從先生言. 將相群爭 竟不入. 先生之得君 其可謂不至乎. 肆與幷時名流 協力贊襄 奮用熙載 設薦擧科 以籲俊乂 破昭格署 以正祀典 訓小學 以育英才. 宿弊漸革 古制漸興. 百僚悚勵 四方風動.

 

第士論或失 於欲速 太露鋒穎 建白. 不度時宜間 有喜事者 未免投合時好. 先生以爲憂 而舊臣拂淸議 因事見擠者 怨入骨髓 磨牙伺隙. 先生喟然 知王道不可遽行 大猷不可遽升. 於是 稍調劑秉中 以鎭浮躁 而矯激之論反詆 先生爲色莊 至欲彈劾. 先生料 時事必敗 求退不得.

 

命適廷論 欲追削 靖國勳籍之濫者. 先生旣不能退 則把紀綱 塞利源職耳. 不得不同其議 伏閤爭累月 得允. 群臣入侍榻前 將功券定與奪. 時則己卯十一月十五日也. 兪咈甫己駭機發. 於其夜 南袞 沈貞 洪景舟等 潛開闕門 入便殿 語秘不傳 先生之下吏也 館學諸生 奔哭闕庭 爭詣獄 請囚. 其謫也 上使近侍 諭以非私罪 姑從廷論 示譴之意 先生拜辭以謝. 其受後命也 先生沐浴更衣 請聞罪名 使者無應. 先生臨結纓 貽親舊書有曰 愛君如愛父 天日照丹衷. 聞者慟之.

 

嗚呼. 先生內子 僉使李允泂之女 生二男. 曰定 娶縣監權洽女 無後早卒. 曰容 以蔭至文川郡守 無嗣 取堂弟希顔子舜男 爲後.

 

嗚呼. 上天陰騭 於善必栽培 於惡必傾覆 禍福之理 固昭昭也. 今先生 以騫騫之節 揚于王庭 啓赤心 批逆鱗 知有君父 不知有己身 律己淸苦 關節不通 騶直不納. 公退不問家事 早夜所思慮 惟在政疹民隱. 惓惓 無須臾 寧卒之. 身觸讒鋒 不能考終 福善之理 安在.

 

彼泄泄沓沓者 重人爵輕天敍 偸時射利 屋潤身肥 國家安危 邈如胡視越病 不拔一毛 雍容顧眄. 自擬聖於涉世 反笑先生 斥以少不解事 桃生厲꜐ 甚者 或至戕賢. 賊能以植固其勢. 此輩類得於君 安享祿位 老死牖下 所謂禍淫者 亦昧矣. 是故人之言曰 謨身密者 其轂朱 謀國密者其族赤. 父戒其子 兄勗其弟 以模稜爲明哲 以匪躬爲浮薄. 士習以渝 世道以汚 悲夫.

 

雖然 人心本公 天定未忒 陰翳纔消 太陽回光. 中廟晩年 每稱無罪 固有渙散之漸矣. 仁廟繼明廟 堂申論 館學籲天. 聿追先志. 命復先生職秩. 逮今上初有淸論 益張乾心洞契 命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 事. 是隆慶戊辰也. 越明年己巳 賜諡文正.

 

於是 先生耿光彰徹 上下多士 若仰喬嶽北斗 立廟明禋 非一 所式至今日. 甲子已周 追慕如昨達國. 儒林 齊心一方 豎外瘞中 以賁飾墓道. 此誠古今所未聞睹 元祀之尊 將亘萬世矣. 顧視富貴 蔑聞者 一時寵樂 六驥過隙 骨肉 如草卉同朽 無異蚊蝱 起滅穢穰間. 若其開毒喙 芟良善 以斬國脉者 則罔之 生幸逋斧鉞 而鬼誅人戮 愈久益嚴. 三尺童子 亦知唾罵 九天之刑 窮天地 而罔赦矣. 此固不足比論榮辱. 惟後人 其知所以勸戒哉.

 

嗚呼. 天篤生賢 必使有爲 進則濟斯民 退則立其言. 今先生進 不克卒 其道退 未及垂訓于後. 日彰之學 未就大成 微言之緖 罔由尋考. 況我東 箕子以後 未聞 以仁義治世者 周經孔謨 只資空言. 先生一倡 庶幾復古. 先生旋敗 士林瓦裂 王道之說 爲世大諱 皆諉以非其時. 夫如是 則吾道 終不可復歟. 天生賢者 而中折之 其命 終不可諶歟. 其然 豈其然乎.

 

時者在上者所造也. 只是無人 豈云無時. 思皇我王 獎美先生 旣崇極 而尊儒尙道 以明一統 學者仰恃 發舒無遜言. 先生明天理 淑人心之切. 於玆 普發 使斯人擧 曉王 醇覇疵 敬爲主 禮爲防. 安宅不可曠 正路不可舍 則先生之道 否短泰長綽乎. 爲後王開太平 而天不虛生命 乃可諶矣. 後先生而作者 其毋患莫己庸 思自盡 乎所以致用哉.

 

其銘曰

 

靑璣有學 肇殷. 父師化 逖言 泯墜緖 罔追. 猗嗟. 寒暄孤唱 濁時 刻羽絶和 始然就微. 天不椓 文篤生 先生先生間. 氣漢嶽 鍾精一 片崑璧瑩 絶纖瑕.

 

夙抱高識 求道靡他 撥機尋師 入室操戈.

爰啓正軔 任大道遐 旣折旣磋 亦琢亦磨.

 

動用周旋 規圓矩方 吾斯未信 韞櫝而藏.

猗蘭播芬 欲掩彌彰 觀國之光 乃賓于王.

 

契孚魚水 委身殉國 志撑宇宙 忠貫日月.

矢回淳風 以敦淆俗 禹鼎漏妖 河麋呈慝.

 

叅天預章 一斫斯倒 三光失晶 四民齊悼.

天啓聖衷 廓開氛祲 曆世加褒 伸枉起歆.

 

士誦其語 人服其化 茅開蹊逕 燭揭昏夜.

鬱鬱駒城 山紆水長 有斐令德 沒世不忘.

 

李珥 撰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상현동 산 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