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류극서 유적비(柳克恕遺蹟碑) - 전주류씨 2世

야촌(1) 2012. 5. 28. 14:52

고려국정순대부연안부사보문각직제학 전주류공극서유적비

(高麗國正順大夫延安府使寶文閣直提學 全州柳公克恕遺蹟碑)

 

직제학부군(直提學府君)이 개경(開京)에서 별세하시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汀),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빈(濱) 형제는 천리(千里)를 운구하여 호암(虎巖) 을좌원(乙坐原)에 모시니, 그 곳을 류빈골이라 이름하여 지금까지 육백여년이나 불려왔다.

 

한때 실전(失傳)하여 성묘를 못하다가 7대손 임란의병장 복기(復起)가 성심으로 찾아 영의정 영경(永慶)이 주선하고, 1606년 병오(丙午) 관찰사 영순(永詢)이 묘전(墓前)에 비를 세웠다. 1899년 기해(己亥) 18대손 필영(必永)이 누락된 부분을 바로잡아 묘하(墓下)에 비를 세웠으나 한문이고 글씨가 마멸되니 이제 신도비(神道碑)의 예(禮)에 따라 유적비(遺蹟碑)를 세운다.

 

완산백(完山伯)에 수봉(受封)되신 휘(諱) 습(濕)을 시조(始祖)로 하였으니 바로 부군(府君)의 고위(考位)시다. 비위(妣位)는 전주최씨(全州崔氏)니 오자일서(五子一婿)가 다 문과에 급제하여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수봉(受封)되셨다.

 

시조께서는 평생에 근신(勤愼)하시었고 국대부인(國大夫人)은 치가(治家)에 법도(法道)가 있어서 일부(一府, 全州)의 사람들이 다 칭송하였으니 적덕(積德)하사 영광(榮光)을 후손에게 남기셨다. 부군(府君)의 휘(諱)는 극서(克恕), 성은 류(柳)씨, 본관은 전주(全州)이시다.

 

부군(府君)께서는 고려말(高麗末)에 관직(官職)으로 전주류문(全州柳門)을 빛내셨다. 숙부인(夫人) 진주하씨(晉州河氏)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윤린(允潾)의 여(女)며, 영의정(領議政) 호정(浩亭) 윤(崙)의 누이로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汀)을 생(生)하고, 숙부인(淑夫人) 수원이씨(水原李氏)는 추밀원사(樞密院使) 수평군(水平君) 인수(仁壽)의 여(女)고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빈(濱)을 생(生)하였다.

 

부군(府君)은 문과에 급제하사 고려 공민왕 연대(年代)에 종부령(宗簿令), 순군위(巡軍衛), 여흥군수(麗興郡守),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지제교(知製敎), 1383년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 판사(判事), 요동 특사(特使)를 하였고 1387년 연안부사(延安府使), 당직 천호로 계실 때 모함을 받아 우왕에게 참화를 당하셨다.

 

 이때가 바로 조선왕조개국 4년전(四年前) 1388년이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목은(牧隱) 이색(李穡) 같은 명현(名賢)들과의 교유관계로 볼 때 부군(府君)의 인품을 알 수 있다. 묘하(墓下)에 성천사(聖泉寺)가 류씨재사(柳氏齋舍)라는 말에 따라 되찾았으나 하룻밤 화재로 선적(先蹟)이 소실된 듯하다.

 

부군(府君)의 후손중(後孫中) 조선조(朝鮮朝)에 들어난 이로는 회헌(檜軒) 의손(義孫), 문목(文穆) 숭조(崇祖), 낙봉(駱峯) 헌(軒)이 있고, 시호(諡號)에는 문목(文穆) 숭조(崇祖), 충렬(忠烈) 희철(希哲), 정의(貞毅) 의함(宜涵), 효정(孝靖) 부마(駙馬) 정양(廷亮), 정간(貞簡) 복명(復明), 효간(孝簡) 당(戇), 봉군(封君)은 완원군(完原君) 빈(濱), 완안군(完安君) 효찬(孝纘), 완원군(完原君) 조생(肇生), 완능군(完陵君) 파(坡), 완창군(完昌君) 시성(時成), 전릉부원군(全陵府院君) 의(儀),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영경(永慶), 전원군(全原君) 열(悅), 전창군(全昌君) 정량(廷亮), 전평군(全平君) 심(淰), 충신(忠臣)은 증좌찬성(贈左贊成) 희철(希哲),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복립(復立), 철원부사(鐵原府使) 질(秩), 선교랑(宣敎郞) 유흥(惟興), 상선(尙膳) 재현(載賢), 청백리(淸白吏)는 대호군(大護軍) 맹기(孟沂), 대사간(大司諫) 헌(軒), 대사헌(大司憲) 경창(慶昌), 현감(縣監) 정립(貞立), 부사(府使) 경시(敬時), 

 

문(文)으로는 참판(參判) 의손(義孫), 세자사부(世子師傅) 승식(承湜), 대사성(大司成) 숭조(崇祖), 사인(舍人) 감(堪), 참판(參判) 영길(永吉), 진사(進士) 직(㮨), 참판(參判) 의양(義養), 참판(參判) 치명(致明), 벼슬로는 영의정(領議政) 영경(永慶), 형조판서(刑曹判書) 훈(塤), 예조판서(禮曹判書) 복명(復明), 공조판서(工曹判書) 당(戇), 참판급(參判級)으로는 신손(信孫), 계반(季潘), 윤덕(潤德), 세린(世麟), 지신(止信), 영길(永吉), 영립(永立), 영순(永詢), 항(恒), 색(穡), 경창(慶昌), 지(榰), 심(淰), 경(炅), 이복(以復), 강(焵), 의양(義養), 정양(鼎養), 치명(致明), 의(誼), 정수(正秀)다.

 

8대손 인무(仁茂)는 현감(縣監) 정립(貞立), 부사(府使) 경립(經立), 부사(府使) 영립(英立) 삼자(三子)가 문과에, 독립지사로는 성근(聖根), 호근(浩根), 준군(濬根), 근(瑾), 임(林), 인식(寅植), 시연(時淵), 근세 인물로는 국회의원(國會議員) 기수(驥秀), 치송(致松), 승번(升蕃), 승규(昇珪), 기홍(基洪), 문화공보부 장관(文化公報部 長官) 혁인(赫仁), 산림청장(山林廳長) 종탁(鍾卓), 극동대학교 총장(極東大學校 總長) 택희(澤熙), 시인(詩人) 안진(岸津), 건축가(建築家) 춘수(春秀) 등 각 분야에서 우뚝한 자손들이 부군(府君)의 유덕(遺德)을 빛내고 있다.

 

부군(府君)의 큰 아들 정(汀)은 칠형제(七兄弟)를 두었는데 현감(縣監) 효지(孝池), 현감(縣監) 혜생(惠生), 목사(牧使) 효산(孝山), 직제학(直提學) 효천(孝川), 효택(孝澤), 집의(執義) 효담(孝潭), 효연(孝淵)이다. 효지후(孝池后) 증참판(贈參判) 종립(宗立)의 후손은 대구, 생원(生員) 재형(再亨)의 후손은 성주, 혜생후(惠生后) 계남(繼男)의 후손은 광양ㆍ옥곡, 호군(護軍) 만영(萬榮)의 후손(後孫)은 산청ㆍ여수, 사정(司正) 사영(士榮)의 후손은 춘천, 효천(孝川)의 아들 세자사부(世子師傅) 승식후(承湜后) 한림학사(翰林學士) 진정(震楨)의 후손은 합천, 감역(監役) 진량(震樑)의 후손은 부산ㆍ대구, 첨추(僉樞) 득춘(得春)의 후손은 밀양 등지에서 살고 있으나 나머지 사형제(四兄弟)는 자손이 없다.

 

둘째 빈(濱)은 아들 사형제(四兄弟) 장(長) 중부령(中部令) 경손(敬孫), 차(次) 참판(參判) 의손(義孫), 삼남(三男) 참판(參判) 신손(信孫), 사남(四男) 집의(執義) 말손(末孫)을 두셨는데 경손(敬孫)은 아들 대호군(大護軍) 맹기(孟沂), 증참판(贈參判) 지성(之盛)을 두었다.

 

맹기(孟沂)의 후(后) 부사(府使) 응성(應聖)의 후손은 백천ㆍ장단, 지성(之盛)의 후(后) 참봉(參奉) 응태應台)의 후손은 봉화, 습독(習讀) 흥조(興祖)의 후손은 봉화ㆍ의성에 산다.

 

둘째 의손(義孫)은 아들이 없어 말손(末孫)의 삼남(三男)인 도승지(都承旨) 계동(季潼)을 후사로 손자 부사(府使) 식(軾), 봉사(奉事) 원(轅), 군수(郡守) 주(輳), 목사(牧使) 곡(轂)을 두셨으며, 식(軾)의 큰아들 참판(參判) 윤덕(潤德)의 후손은 용인, 사자(四子) 인의(引儀) 윤선(潤善)의 후손은 안동, 원(轅)의 증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지신(止信)의 후손은 파주, 주(輳)의 후(后)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정(檉)의 후손은 고양, 곡(轂)의 아들 별제(別提) 윤방(潤邦)의 후손은 이천, 교관(敎官) 윤범(潤範)의 후손은 강화에 산다.

 

막내이신 말손(末孫)은 참판(參判) 계반(季潘), 첨추(僉樞) 계장(季漳), 도승지(都承旨) 계동(季潼)을 두셨는데 계반(季潘)의 후(后) 참봉(參奉) 항(沆)의 후손은 음성, 진사(進士) 한(瀚)의 후손은 토산, 악(渥)의 후손은 공주ㆍ김포, 계장(季漳)의 후(后) 전부(典簿) 세붕(世鵬)의 후손은 임실ㆍ춘천, 참판(參判) 세린(世麟)의 후손은 충주ㆍ양주ㆍ순흥ㆍ괴산ㆍ화성, 전첨(典籤) 세구(世龜)의 후손은 진주ㆍ정읍ㆍ여주ㆍ횡성ㆍ순창ㆍ파주ㆍ장단ㆍ청양ㆍ보령ㆍ괴산ㆍ음성ㆍ옥천ㆍ천안ㆍ의정부ㆍ가평ㆍ양평ㆍ정산, 사과(司果) 세붕(世鳳)의 후손은 남원에 산다. 계동(季潼)은 중부(仲父)의 후(后)로 출계(出系)하였다.

 

부군(府君)의 자손들은 근세에 더욱 번성하여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시호(諡號)를 받은 분이 6, 봉군(封君) 10, 충신(忠臣) 5, 청백리(淸白吏) 5, 영의정(領議政) 1, 판서(判書) 3, 참판(參判) 20, 문과(文科) 85, 무과(武科) 136, 사마(司馬) 263, 열녀(烈女) 11, 효자(孝子) 44, 수직(壽職) 111, 음사(蔭仕) 230인이고 최근세에는 독립지사(獨立志士) 40, 장차관(長次官) 2, 국회의원(國會議員) 5, 대학총장(大學總長) 1인, 문인(文人) 등 천(千)여명에 이르며, 손세(孫勢)는 일만오천(一萬五千)여 세대(世帶)나 되고 많은 자손들이 국내외에서 부군(府君)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부군(府君)께서는 학덕(學德)이 높으시어 명현(名賢)들과 교유(交遊)하시며, 선정(善政)을 베푸시던 중 난신(亂臣)의 모함으로 천수(天壽)를 못 누리심이 애통(哀痛)하기 그지없다. 여말(麗末) 격동기라 남기신 사적(事跡) 전해오지 않아 후세에 아쉬움이 끝이 없으나 후손(後孫)이 진진함은 모두가 음덕(蔭德)이니 세상에서 지덕(知德)있고 강상(網常)을 상론(尙論)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유래(流來)에 근거해서 원천(源泉)을 알 것이다.

 

이제 문화재(文化財) 지정으로 재사(齋舍)를 중수(重修)하고 후손들이 힘 모아 묘역을 정화하여 자손만대의 성역(聖域)으로 보존(保存)하여 선조님의 유덕(遺德) 기리 전하렵니다.

2004年 갑신(甲申) 10月 日

 

二十代孫 前直提學公派大宗會 會長 國會議員 升蕃 謹撰 國立江原大學校 敎授 文學博士 平海後人 黃在國 謹書 十九代孫 直提學公派大宗會 管理理事 太植 謹竪

 

주) 黃在國 : 平海後人 文學博士 國立江原大學校 漢文學科 敎授 대한민국 나라사랑 심사위원장, 한국서예가협회 부회장, “김호길 박사 비문”, “권오섭 독립지사 비문”, “퇴계선생 기념공원 시비”, “鶴麓 류찬우 비문”, “류혁인 문화공보부장관 비문”, “이육사시비문”, “안동시민의 종 비문”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