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69

答 李養久 - 西溪 李得胤

西溪先生文集卷之二 >書 答李養久 時發 ○戊申九月 秋夕便傳。緣勢未答。迨恨迨恨。霜寒不審廵候何如。老年悲秋之感。例多於少壯。而况今懷人之思兼之乎。尤增欝悒也。德胤。幸保舊操。未有新得。祗見聵聵。何容喙喙。但初秋間。掉脫塵冗。往棲落影山寺。僅月餘日。仍尋歡喜磐石。約與金庚黃戚輩。遊賞後穎高棲。則溪山淸絶之勝。雖謂山東第一可也。留宿數日。徘徊不忍去。若於此時。與主人翁共對此境界。則想添一格景象。而逖矣西土。奈如之何。然以看竹之高趣言之。固無妨於吾等之淸游。而薄領叢中。若得聞之。慙愧華山雲之句。恐其重發於高明也。病拙自見貴庄以來。尤厭世氛。略倣▦▦故事。謀卜於玉華曠▦。其爲明快灑落。固未敢望於仙庄。在此上流。水道之的源。分明迴抱淸露。在外之雜氣不入。宜乎晩節之所盤旋。故明春。欲營數間精舍。而連値凶歉。啼飢之患太甚。罔知攸措。左右其可以能賞此意。特助誅茅之淸債乎。鄙志之成不成。山契之參不參..

안겸재 진찬 유서 (安謙齋眞贊有序 ) - 이제현

동문선 제51권 안겸재 진찬 유서 (安謙齋眞贊 有序) ◇安謙齋는 안향의 손자이다. 이제현(李齊賢) 찬(撰) 안 문성공(安文成公)은 일대에 있어서 유학자의 종장이었다. 내가 아직 20도 못 되었을 때 한 번 길에서 뵈옵고 드디어 사랑을 받았으며 인하여 그의 손자인 겸재(謙齋)를 알게 되었다. 그 후 10년에 나의 아버지 동암공(東菴公)이 과거에 고시관으로 있을 때에 겸재는 책(策)으로 응시하여 과거에 올랐다. 이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사귐이 가장 오래 되었다. 지정(至正) 경자년에 겸재가 죽었다. 이듬해 가을에 남아 있는 그의 화상을 보고 섭섭하여 그 옆에 적는다. 검소하였으나 고루하지 않았고 온화하였으나 지나치지 않았다. 확고히 법도를 지켰고 엄연히 아름다움을 발휘하였으니 그는 문성공의 손자로서 알맞았었..

구천 이공[이세필] 화상기 - 곤륜 최창대 씀

昆侖集卷之六 三陟龜川李公 世弼 畵像記 己亥 陟之爲州。地瀕海。限以大嶺。去王都逴遠。其人樸魯而少文。不事經典之業。不習禮義之敎。今上甲申。龜川李先生。出莅是州。旣平徭薄征。以寬其民。則以興學校振文敎爲先務。築書室於州北龍山之趾。居其子弟之誦讀者。手定學規數十事。日親講授而勖 率之。至期歲益勤無倦。於是一方嚮風。人樂以勸四隣。稱爲絃誦之鄕。先生旣歸有年。學子懷慕不怠。爲建數楹於書室之北。圖所以奉先生像。以永其瞻式。而先生不可。竊窺而貌之。見者皆病其未似。諸生贏糧越險。往返勤苦。歲丁酉。謀於畵師秦再奚而改貌之。屬余記之。夫三代之敎人備矣。侯王邦國。旣有泮水辟雍。而下至鄕黨酇遂之間。雖比戶之閭。十室之聚。莫不有居業之地。名其宮爲庠塾。斯有其所矣。春秋而禮樂。冬夏而詩書。朝暮焉養之以舞蹈。游之以投射。斯有其業矣。閭胥族師黨正之屬。書其德義。而 鄕大夫致仕之老。羣其人而誨之。斯有其師資矣。其..

이생 반(李生蟠)에게 주는 서 - 양촌 권근

양촌선생문집 제15권/권근 저 이생 반(李生蟠)에게 주는 서 내가 급제(及第)하였을 때 나의 할아버지 성재공(誠齋公)이 경계하기를, “선군(先君)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이 공거(貢擧)를 맡았을 적에, 익재(益齋) 이문충공(李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 20미만의 나이로 급제하였으나 끊임없이 학문을 좋아하므로, 공이 아름답게 여겨 드디어 사위로 삼았었는데, 문충공은 누가 어느 글을 잘 다룬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가서 수업(受業)하고, 누가 무슨 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빌려다가 읽되, 날마다 부지런히 하여 밤을 낮삼아 하였으며, 가끔 손님이 오게되 면 벽하나 사이라, 글읽는 소리가 손님과의 대화를 방해하므로 선군께서 중지하라 명하셔도 오히려 소리만 낮추고 중지하는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동유록(東遊錄) -담헌 이하곤(澹軒李夏坤)

동유록(東遊錄) [지은이]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생졸년] 1677년(숙종 3) ~ 1724년(영조 즉위년) 금강산으로 향하다 갑오년(1714년, 숙종 40년) 3월 19일.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나서 풍악(楓嶽)으로 향했다. 이유발(李惟發)과 영수암(靈水庵)의 승려 삼임(三稔)과 청담(淸潭)의 승려 신숙(信淑)이 뒤따랐다. 도마치(倒馬峙)를 넘어서 삼승촌(三升村)을 지났는데, 이곳은 이동상(李東相)이 사는 곳이다. 이동상이 항상 산수의 아름다움이 금계(金溪)에 뒤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용정(龍亭)에 많이 미치지 못했다. 점심 때 음성(陰城)에 도착했다. 현감(縣監) 이세기(李世機)가 그 아들 이묵(李黙)을 데리고 찾아왔다. 저녁에 유곡(柳谷)의 별장(別將) 집에서 잤다. 금강산으로..

유금강록(遊金剛錄) - 이원(李黿)

■ 유금강록(遊金剛錄) 금강산 유람을 떠나기로 하다. 금강산(金剛山)은 강원도(江原道)의 진산(鎭山)으로, 북쪽으로는 안변(安邊)에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강릉(江陵)에 닿아 있으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춘천(春川)의 경계로 통한다. 흡곡(歙谷), 통천(通川), 고성(固城), 간성(杆城), 회양(淮陽), 금성(金城), 양구(楊口), 낭천(狼川)등 여러 군들이, 동쪽과 서쪽으로 땅을 나누어, 삼백여 리에 뻗쳐있는 내외의 금강산 산록에 들어 있다. 고개를 경계로 삼고, 내외 수참(水站)을 정하여 서쪽을 내산으로 삼고, 동쪽을 외산으로 삼는다. 금강산은 도가와 승려들이 모이는 곳이며, 시인과 문장가가 왕래하며 노닐며 감상하는 곳이다. 나의 먼 조상인 고려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

송 반룡 여 대사 서(送盤龍如大師序) - 최해(崔瀣).

송 반룡 여 대사 서(送盤龍如大師序) 지은이 : 최해(崔瀣). 글쓴연도 : 1354년(공민왕 3) 반룡정사(盤龍精舍)는 내가 보지 못했다. 젊어서 이 미수(李眉叟=李仁老의 字)의 시(詩)를 뒤져보니 시집 가운데 대숙도리(大叔闍梨)와 더불어 왕복한 시가 없는 권이 없는데, 그가 능히 수습하고 무마하여 성립하게 한 것을 칭도하였다. 처음에 도리(闍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다만 부도(浮屠)가 되었으나 독실한 행위는 사부로서도 미치지 못할 바가 있음을 기특히 여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뒤에 이 씨의 종인(宗人)을 만나서 물어본즉 실로 반룡사(盤龍社)를 개설한 승통(僧統) 일공(一公)이었다. 사(社)는 부처를 배우는 자가 자포자기하는 데 그치는 것을 민망히 여겨 격려를 가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라 하니, 더구나..

대나무

■죽(竹) 대나무는 단단해 보이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요. 유약해 보이지만 또한 그런 것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활용하기 참 좋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대나무의 본질에서 많은 교훈을 삼게 됩니다. 대나무의 죽순이 단번에 쑥 자라는 것에서 사람 또한 선천적으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 하루 아침에 께달음이 향상됨을 알 수 있고 대나무가 늙어갈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것에서 후천적으로 노력한 만큼 사람의 힘은 점진적으로 증진 되감을 알 수 있습니다.

군자는 남을 낮춰보지 않는다.

군자는 남을 낮춰보지 않는다. 사슴은 정(精)을 기르고 거북이는 기(氣)를 기르고 학은 신(申)을 기른다. 그래서 장수하고 이들은 고요한 곳에서는 기(氣)를 달련하고 움직이는 곳에서는 신(申)을 달련한다. 따라서 군자(君子)는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을 모욕하지 않으며 무식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군자에게는 원망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