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140

개성 동대문 상량문 대의(開城東大門上樑文 代擬)

■ 개성 동대문 상량문 대의 (開城 東大門 上樑文 代擬) 신좌모(申佐模) 撰 [생졸년] 1799(정조 23) ~ 1877(고종 14)] 肇國在西土。命周維新。迺立爲東門。按秦之故。楣扁特揭。棖闑重光。顧勝國五百年䧺都。寔右畿三十州要地。左靑石右白峙。壯關輔之襟喉。前朱雀後紫霞。儼殿宇之軆勢。金剛城之羅閣萬二。尙傳姜太史規橅。勃禦塹之環門十三。可徵徐皇華圖誌。逮我本朝開國。乃有半月築城。循男山而歷太平都察。北榦東支道里凡二十許。設女堞而立進言訥理。南大西小閭閻可八萬餘。自漢師鼎遷以來。廢不修繕。而商旅萃集於是。任其頹夷。種穄之田疇半荒。兔葵燕麥。栽松之嶽石全露。虎倒龍顚。不特居人過客之所嗟傷。抑亦分司留臺之所愾歎。屬我后翠華之臨幸。適是時玄黓之復回。謁齊厚而歷奠麗陵。追三恪列爵之典。展穆淸而親御太學。想六聖駐蹕之儀。粤瞻顧望。撫基迹之桓掇。周咨詢訪。愾關防之踈虞。肆當後癸..

경회루상량문 의(慶會樓上樑文 擬)

■ 경회루상량문 의(慶會樓上樑文 擬) 신좌모 저[申佐模 :1799 (정조 23) - 1877(고종 14)] 伏以太微列輔弼之垣。階三能於上紫。方輿辨神明之奧。柱八極於中黃。上棟下宇。取諸古者聖王爲宮室。四戶八窓如一。蓋云僊人好樓居。斯皆憲經緯於乾淸坤寧。亦以寓弛張於觀游節佚。肆昔虞殿之百工和。薰兮有風。周臺之庶民攻。成之不日。花萼勤政之對跱。乃在興龍舊坊。瓊林賜宴之親臨。厥有釣魚故事。厥或殫雕繪之巧思。窮鉅麗之瓌觀。別風嶕嶢。亘雙蜺而宛委。落星縹緲。齊五鳳而騫翔。豈若玆慶會樓之値千載之休期。明良相得。標二字之嘉號。頌禱斯興也哉。夫斯樓也。自太祖鼎定之初。召羣臣晉接之所也。五百興間有名世。周同德同心。二三豪出而爲時。漢羣策羣力。盖嘗奔走於干戈之際。備更險艱。故玆雍容於杯酒之間。與共安樂。遂乃創自傑構。揭厥華楣。黼座儼日月之章。所討論者政謨治法。釦砌聽星辰之履。所引對者耆舊親勳..

영호사(靈湖祠)

영호사(靈湖祠) 1545년 창건. 1785년 중건. 1916년에 재건된 망호정(望湖亭)은 여말(麗末)의 대유(大儒) 익재(益齋) 이제현(李濟賢 : 1282∼1367)을 제향하는 영호사[靈湖祠 :1916년 영당(影堂)으로 건립]의 강당 겸 제실로 이용되고 있다. 망호정(望湖亭) 마을은 경주이씨의 동족마을로 동각(洞閣)으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족보(族譜 :숙종 甲子譜)와 많은 문계, 동계(洞契)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 망호정은 사우(祠宇)의 삼문(三門)밖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소재지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624번지 ↑영화문 ↑망호정(望湖亭)의 노송(老松) ↑망호정뒤 영호사에 들어서는 삼문 ↑영호사의 삼문 ↑영호사 ↑영호사 영당 내부 17世 익재공(益齋公)을 주벽(主..

진주 촉석성문기(矗石城門記)

■ 촉석성문기(矗石城門記) 진산 하륜(晋山 河崙) 찬(撰) [생졸년] 1347년(충목왕 3)∼1416년(태종 16)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되풀이되는 것은, 대개 그 하늘 운세의 성함과 쇠퇴함의 이치와 사람 사는 일의 성공과 실패가 서로 인연이 되어 그러한 것이다. 옛사람은 인간으로서의 할 일을 닦음으로써 하늘의 운수에 응하였기 때문에, 도둑떼에 의한 난리가 혹시 일어나더라도 끝내는 능히 우려함이 되지 않게 하였다. 나는 우리 고향의 성(城)에서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내가 옛적 총각이던 시절에 여기서 유학하며 늘상, 성 둘레 구덩이의 남겨진 빈터를 보았으되 그 오래됨을 알지 못했고 나이 많은 어른에게 여쭈어 봐도 또한 능히 알 수가 없었다. 이 무렵엔 백성들의 살림집들이 오손 도손 즐겁게 ..

반구정기(伴鷗亭記)

■ 반구정기(伴鷗亭記) (반구정은 임진강 아래에 있다). 미수 허목 찬(眉叟 許穆 撰) [생졸년]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반구정(伴鷗亭)은, 먼 옛날 태평 재상 황 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의 정자이다. 상국이 죽은 지 2백 년이 채 못 되어 정자가 헐렸고, 그 터전이 쟁기 밑에 버려진 땅이 된 지도 1백 년이 된다. 이제 상국의 후손 황생(黃生)이 강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이름 그대로 반구정(伴鷗亭)이라 하였다. 이는 정자의 이름을 없애지 않으려 함이니 역시 훌륭한 일이다. 상국의 사업이나 공렬은 어리석은 사람도 다 왼다. 상국은 조정에 나아가 벼슬할 적에는 임금을 잘 보좌하여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모든 관료를 바로잡았으며, 훌륭하고 유능한 자를 직에 있게 하여 온 ..

광화문(光化問)

↑1968년 일본의 총독부 건물을 흘어내고 복원된 광화문 전경 ↑광화문 편액 광화문(光化問)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고.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있다. 중앙에 있는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1820~1898)의 경복궁 재건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6·25 동란 때 또 파괴됐었다. 1968년 제3공화국 때 복원됐지만 원래 위치와 모..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

■ 열읍원우 사적(列邑院宇事蹟) 1759년(영조 35)과 1763년경에 中央의 지시에 따라 전국 각 읍에서 읍에 있는 書院·祠宇·影堂의 事蹟을 조사· 정리하여 보고한 것을 中央에서 各道別로 合編한 책이다. 간혹 正祖年間 이후의 것도 있다. 10책중 제1-3책은 全羅道‚ 제4책은 黃海道‚ 제5-7책은 慶尙道‚ 제8-10책은 忠淸道의 것인데 책의 크기‚ 내용의 量이나 詳略이 각각 다르다. 내용은 대체로 書院·祠宇의 賜額與否와 간략한 沿革을 앞에 적고 이어 主享·配享人의 行蹟‚ 관계전물의 上樑記·重修記‚ 건립·賜額 등과 관련된 上疏등의 文字들을 정리·수록한 것이나 各邑에서 각각 작성된 것이고 대상 院宇가 다양하였으므로 내용의 양식이나 분량에서 차이가 많다. 각 책별로 수록된 院宇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각 책..

우리나라 서원(書院)

■ 우리나라 서원현황(총 614개소) □ 우리나라는 옛날에 서원이 없었으나 가정(嘉靖 :가정은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522~1566) 연간(1542)에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에 풍기군의 속현인 순흥(順興)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본관(本貫)이며, 그가 살았던 옛터이므로 거기에다 그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선비들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곧 백운동(白雲洞)이다. 《후청쇄어》 □ 이황(李滉)이 세붕을 이어 군수가 되어, 조정에 건의하여 송(宋) 나라의 고사에 따라 사액(賜額)한 것과 책을 내려줄것,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종 5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하고, 또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서원에 사액하..

경회루기(慶會樓記) - 하륜

■ 경회루 기(慶會樓記) 하륜(河崙) 찬(撰) 전하『殿下, 태종(太宗)』 즉위 13년 봄 2월에 뒷 대궐 서루(西樓)가 기울어지고 또 위태하므로, 경복궁(景福宮) 제거사(提擧司)에서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여 전하께 아뢰니, 전하께서는 놀래어 탄식하며 이르시기를,“우리 선고(先考)께서 창업(創業)하시고 처음으로 세우신 것인데, 이제 벌써 그렇게 되었단 말이냐.”하시고, 이내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에게 하명(下命) 하시기를,“농사 때가 가까웠으니, 아무쪼록 놀고먹는 자들을 부려서 빨리 수리(修理)하도록 하라.”하였다. 그래서 박자청 등은 지면(地面)을 헤아려서 살짝 서쪽으로 당기고, 그 터에 따라 약간 그 규모를 넓히어 새로 지었으며, 또 그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누(樓)를 에워서 못을 팠다. 완..

동호정(東湖亭)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842번지/사진 출처 >엽토 51 ↑동호정 - 정면사진 >엽토 51 ↑동호정 상량문(東湖亭上樑文) ↑장만리(章萬里). 선생 충효정려각/사진 : 감래킹 ↑장만리 정려비 ■ 장만리(章萬里) 조선 선조때의 학자로 자(字)는 문숙(文叔) 호는 동호(東湖)로 본관(本貫)은 거창이다. 선생은 함양군 서하면 황산마을 태생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왕을 등에 업고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피난 하였는데,선조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호성공신의 원종 공신에 책록하였으며 고종황제는 1892년 좌승지에 추증하고 충신 정려를 내렸다. 훗 날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 곳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때때로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선생께선 당시 성리학에 정통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던 충의지사로서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