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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성문기(矗石城門記)

야촌(1) 2010. 8. 19. 23:28

■ 촉석성문기(矗石城門記)

     

진산 하륜(晋山 河崙) 찬(撰)

[생졸년] 1347년(충목왕 3)∼1416년(태종 16)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되풀이되는 것은, 대개 그 하늘 운세의 성함과 쇠퇴함의 이치와 사람 사는 일의 성공과 실패가 서로 인연이 되어 그러한 것이다. 옛사람은 인간으로서의 할 일을 닦음으로써 하늘의 운수에 응하였기 때문에, 도둑떼에 의한 난리가 혹시 일어나더라도 끝내는 능히 우려함이 되지 않게 하였다. 나는 우리 고향의 성(城)에서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내가 옛적 총각이던 시절에 여기서 유학하며 늘상, 성 둘레 구덩이의 남겨진 빈터를 보았으되 그 오래됨을 알지 못했고 나이 많은 어른에게 여쭈어 봐도 또한 능히 알 수가 없었다. 이 무렵엔 백성들의 살림집들이 오손 도손 즐겁게 모였고, 밥짓는 연기가 서로 어우러졌었다.

 

바다로 침입해 온 도적떼의 좀도둑질이 비록 어쩌다 가끔 일어났으나 강주(진주의 옛 이름)와 길안의 토벌로써도 또한 적을 꺽어 쳐부수기에 넉넉하였다. 합포(合浦=마산의 옛 이름)의 진(군사 요지)에서 병사를 나누어 서로 구원하면 우뢰처럼 엄하게 바람같이 몰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참(城塹: 성둘레 방어용 구덩이를 판 시설)을 수리하는 일을 급한 임무로 알지 않았다. 내가 이미 갓을 쓰고 벼슬에 종사한 지 십여년인데, 바다 건너 도적떼들이 뭍으로 올라오는 일이 해마다 더욱 늘어만 갔다.  

  

정사 년(1377) 가을에 조정의 의논이 국경지대의 방비를 소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 주와 현의 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곧 옛터에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흙담이 무너지니 임무를 맡았던 자가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기미년(1379) 가을에 지금 지밀직(知密直-從二品)이였던 배공이 강주의 진장(진의 장군)으로 와서, 이곳 강주목(康州牧=오늘날 진주)의 관리에게 위로부터의 지시사항을 알려 다시 이를 쌓게 하였다. 참좌(參佐-벼슬이름)를 보내어 공사 일을 감독케 하며 흙을 바꾸어 돌로써 쌓게 했는데 일이 채 반도 못 되어서 왜구에게 함락되었으나 강성군의 산성에 의지하여 고을 사람이 거기서 거처한바 있었고, 도적떼의 칼날을 물리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이 비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들여 넣을 수 없고, 또 주(州)의 마을에서 거리가 멀므로 미처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몹시 급작스러울 때는 거기까지 능히 가 닿을 수가 없었다. 왜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께서 백성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영을 내려 고을의 성을 이제 쌓고 수리하여 마칠 수 있도록 하라 이르니, 듣는 자가 모두 그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장정들에게 부역을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이 안 되어 끝나게 되었는데, 성의 둘레가 팔백 걸음, 높이는 스물 넉자가 넘었다.  기이하게 문을 세 개 설치하니 서쪽은 의정문(義正門)이라 부르고, 북쪽은 지제문(智濟門)이며, 남쪽은 예화문(禮化門)이라 했는데, 모두 그 위에 다락을 만들었다. 

 

올라가서 사방을 돌아보고 청천(菁川=남강의 옛 이름)이 서쪽을 빙 둘렀고 긴 강이 남쪽에 흐르며 품자 모양으로 생긴 못이 동쪽에 벌려있고 세 군데 못은 그 북쪽에서 물이 돌아 흘러 모인다. 또 구덩이를 성지(城池) 사이에 파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꺾어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게 하였다. 

 

형세가 뛰어남이 진실로 성 위의 한 사람이 성밖의 백 사람을 가히 당해낼 만하였다. 성이 완성되니 왜구가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여 모든 환경이 믿음직하고 편안하였다.  아! 만드는 어려움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어려움만 못하고, 시작이 있는 어려움이 더더욱 끝맺음이 있게 하는 어려움만 같지 못한것인데, 일한 것은 반이면서 공로의 업적은 곱절이 되는 것을 내가 김공에게서 보았도다.    

 

공의 휘(諱)는 중광(仲光)이니 고을과 백성을 위한 정무에 힘써서 대체로 덕이 뛰어난 웃어른다운 바탕이 있었다. 일찍이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었을 때, 곧잘 두 마음을 품고 옳은 것을 따르지 않던 그 지방습속이 그의 의로움에 감동하여 복종하였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다스림에 능하다 하여, 재상들이 바삐 천거하여 여기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판관(判官-從五品) 이었던 이군(李君) 사충(仕忠)도 역시 단정한 사람으로서 김공을 도와 이 성을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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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矗石城門記

 

自古以來。理亂循環。蓋其天數之盛衰。人事之得失相因而然也。古之人。修人事以應天數。故寇亂或興。而終莫能爲患也。余於吾鄕之城。有感焉。余昔總角之日。遊學于此。每見城塹之遺基。不知其歲月。問之耆舊。亦莫之徵。當時閭閻煕煕。煙火相望。海寇之鼠竊者。雖或間發。康州,吉岸之代。亦足以摧挫。而合浦之鎭。分兵相救。若雷勵而風飛。然人不知修城塹爲急務也。余旣冠。從宦十餘年來寇之登陸者歲益深。在丁巳之秋。廷議重備邊。遣使諸道。分理州縣之城。鄕人卽舊基。築以土。不能經久。隨復頹圯。奉使者豈得辭其責。己未秋。今知密直裵公。來鎭康州。移牒牧官。俾復修之。遣參佐督其役。易土以石。功未半而寇陷。賴江城郡之山城。一鄕人有所依據。得以却寇鋒。然城狹而高。不能以容衆。又去州理遠。倉卒勢不能及。寇旣退。牧使金公。因民情而出令曰。州之城。今可以畢修矣。聞者咸願爲之役。於是。丁均其役。躬自監督。不日而畢。城周八百步。高二仞有奇。置門三。西曰義正。北曰智濟。南曰禮化。皆樓其上焉。登而四顧。則菁川繞于西。長江奔于南。品字隍列於東。三池匯其北。又開塹于城池間。自西而東。折而又南。以至于江。形勢之勝。固可以一嘗百矣。城旣成矣。寇不復敢近。而一境賴而安。嗚乎。作之之難。不如興復之爲難。有始之難。不如有卒之爲尤難也。事半而功倍者。余於金公見之矣。公諱仲光。爲政。務大體。有長者風。嘗爲濟州牧。反側之俗。服其義。及還朝。宰相以能理劇擧。故有是任。判官李君任忠。亦端人也。助公以成。 <끝>

晋山 河崙 記

 

[자료출전] 

◇浩亭先生文集卷之二

 

진주성(강변에 촉성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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