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224

孝子 贈 監察 李公 旌閭記

이지영「李祉榮 ? ~ 18??」 孝子贈監察李公旌閭記 - 익재공파 今上二十一年甲申。命旌故孝子李祉榮之閭。贈司憲府監察。因多士龥也。據啓辭。略曰生世孝家。克趾先庥。定省溫凊。不敎而能。有不安節。輒涕泣不食。一再飯。惟親是視。疾革。嚼指刲股。延已絶之縷。毁逾於禮。幾幾滅性。服闋。猶朔望哀展。風雨不以尼。鄕人士一辭稱至孝。將擧其行於道繡。公瞿然曰。吾於子職不能盡。而又重吾不孝耶。竟尼之。公殆所謂自知不足者歟。其他百行。不但以一孝成名。而平居不以賢知先人。孝子哉若人。君子哉若人。公評在世。皋唳聞天。旌贈遄降於身後七年。有本者如是歟。李氏慶州世家。羅麗奕甚。益齋先生德業文章。百世宗仰。長水公仕國朝。與金佔畢先生有道義契。戊午懲毖。遯湖南之武靈。至今稱衣纓古家。而公紹述之。見今文敎椓喪。滔滔胥淪。而後承於公者。皆讀聖賢而談仁義。吁盛矣。孫鍾澤,曾孫孔雨。以記事之文。不鄙命余。夙昔相從。不敢..

상주목사 이광좌 청덕선정비

작성일 : 2009. 11. 06 牧使李侯光佐淸德善政碑 政幷龔黃 丁亥八月 日 - 건립위치 : 공성면 거창리 693-1 - 건립년대 : 1707년 8월 - 규 격 : 117×46 × 14㎝ - 재질형태 : 화강석, 민갓머리 - 목사 이광좌(牧使 李光佐) 상주목사 재임기간은 1705(숙종 31)~1706(숙종 32)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 (雲谷)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현손(玄孫)으로 아버지는 장령 세구(掌令 世龜),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벼슬은 외직으로 상주목사, 전라도, 평안도,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왔고. 여러 벼슬 을 거쳐 1723년 우의정(右議政), 1725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분무원..

통도사 선자비위(扇子=부채)

■ 통도사 선자 바위(이름바위라고도 한다). 122(8-12) 서상붕,조석찬,이현직바위(선자바위 본체 동쪽 4단) ●농상공부주사 서상붕 ●철종 때 기장현감 조석찬 ●헌종 때 부산첨사 이현직 ●경상북도관찰부주사 강준 바위번호122(구역번호8-12) 서상봉,윤석찬,이현직바위(선자바위본체동쪽4단) 38명 연번호 새겨진한자 한글표기 조선왕대 연대 비고 (1) 8명 1724 吳炳坤 오병곤 1725 徐相鵬 서상붕 고종32년 1895 농상공부 주사 1726 申興道 신흥도 1727 申龍或 신용혹 1728 徐義瀚 서의한 1729 金鍾奭 김종석 1730 鄭在吉 정재길 1731 李永基 이영기 (2) 13명 1732 徐世? 서세묵 1733 鄭義斗 정의두 1734 崔有珩 최유형 1735 金相宇 김상우 1736 金啓鎭 김계진 1..

경복궁 신무문 편액 글씨 - 이현직(李顯稷)

일제 강점기 성벽이 무너진 신무문(1920년대 모습) 신무문은 조선 세종 15년(1433년)에 세워져. 성종 6년(1475년)에 방위를 관장하는 사신(四神) 가운데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玄武)를 뜻하는 '신무문(神武門)'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함께 소실되었고, 고종 2년(1865년)에 경복궁 중건과 함께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 문은 평상시엔 닫아두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음기(陰氣)가 궁궐을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기우제를 지낼 때나 왕이 신무문 밖 활터 등으로 행차할 때에만 이 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고종 33년(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이 이 문을 통해 러시아대사관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 천장 (사진 출처: 한겨레신문) 출입구..

순찰사 이형좌 애휼영세 거사비

작성일 : 2016. 09. 30 순찰사 이형좌 애휼영세 거사비(巡察使 李衡佐 愛恤永卋 去思碑) 강원 문화재/평창 문화재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 ↑운교삼거리 "산채뜰" 가게 마당 입구에 있다. ↑巡察使 李 㕣 衡佐 愛恤永卋 去思碑(순찰사 이 공 형좌 애휼영세 거사비) :강원도 순찰사 이형좌가 백성을 돕고 사랑해서 긴 세대 동안 간 것을 생각하는 비. 崇禎 後 二 庚戌 十月 日 立(숭정 후 이 경술 십월 일 립):1730년 음력 10월에 세움. ↑뒤편의 새긴 날짜를 새로 크게 새기면서 "崇禎後" 다음에 "二"자를 빼먹었다. 잘 살펴보면 "崇禎後庚戌" 글자는 크고 잘 못 새겼고, "十月日立" 글자는 작고 잘 새겼다. 출처 : 닥밭골 - 심충성

청송 주산지 축조 송덕비(靑松 注山池 築造 頌德碑)

작성일 : 2020. 10. 30(금) 처사 이진표(處士 李震杓) 공은 경주이씨 국당공 후 20世 월성군(月城君) 정견(廷堅) 10代孫이다. 靑松 注山池를 築造한 處士 李震杓 頌德碑 (청송 주산지를 축조한 처사 이진표 송덕비) ↑주산지 이공 제언 성공 송덕비 [송덕비 내용] (앞면) 乾隆三十六年辛卯十月日立 李公堤堰成功頌德碑 一障貯水 流惠萬人 不忘千秋 惟一片碣 [국역] 1771년(영조 47) 시월에 세우다. 이공의 제방축조 성공을 기리는 송덕비 정성으로 둑을 막아 물을 가두어 만(인)에게 혜택을 베푸니,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한 조각 돌을 세운다. [뒷면] 處士月城李震杓 子錫玹 錫瓘 孫聖培 瓘培 義培 首 折衝將軍 林枝萱 子榮倍 倡 典涓寺 參奉 林枝英 子付准 內資寺 直長 林次明 子重達 林萬輝 子聖昌..

충무공 이수일(1554~1632) 장군 유품(교지)

작성일 : 2011. 01. 23(일) ↑병신 1596년 8월 27일(양력 10월 17일) 교지 ↑계사 1593년 음력 7월 26일 ↑을미 1595년 음력 1월 8일 ↑갑오 1594년 음력 11월 8일 ↑계사 1593년 음력 3월 10일 ↑무신 1608년 ↑을축 1625년 음력 7월 10일 ↑정사 1617년 음력 10월 9일 ↑을사 1605년 음력 11월 8일 ↑정사 1617년 음력 7월 7일 ↑임진 1592년 음력 10월 6일 ↑갑자 1624년 음력 5월 일 ↑계미 1583년 음력 9월 일 ↑정유 1597년 음력 5월 4일 교지 ↑임자 1612년 음력 2월 20일 교지 ↑임진 1592년 음력 6월 초 ↑을유 1645년 음력 6월 10일 ↑정경부인 전주이씨 부(祔) ↑을사 1605년 음력 8월 7일 교지..

조선시대 사립도서관 ‘완위각’

[뉴스] 조선시대 사립도서관 ‘완위각’ 178억 6천만원 들여 복원한다. ↑완위각지 발굴 현장 모습[2009] ↑인장이 찍힌 완위각(만권루) 소장 책 ↑보존 중인 완위각(만권루) 소장 책 한 시대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책만 한 게 없다. 더욱이 책이 최고의 지식 전달 매체이자 고도의 문화적 산물이었던 전통사회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장서(藏書)는 최고의 문화가치로 한 시대를 통관할 수 있는 실마리를 현대인들에게 제공해 준다. 조선 숙종 때, 오늘날의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399번지 일원에 서적 1만 권을 소장한 사립도서관 ‘완위각(宛委閣)’이 있었다. 완위각은 조선시대 4대 도서관의 한 축으로 ‘만권루萬卷樓)’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711년(숙종 37)~1712년 사..

[천년벗과의 만남] - 장서가 이하곤의‘만권루’

2020.07.16 군 복원계획 수립 중 강풍에 붕괴, 완위각 장서 700여 권은 보관 중 향토사연구학자, “복원 앞둔 비지정문화재 수시로 모니터링 해야” 2019년 무너진 초평면 양촌마을에 위치한 완위각((宛委閣,사랑채)잔해들이 천막에 덮여 있다. 진천군이 담헌 이하곤의 후손으로 부터 기증받아 보관중인 완위각 장서들(진천군제공) 조선후기 민간도서관 진천 완위각지 사랑채가 지난해 11월 비바람에 무너진 가운데 군이 완위각 소장 장서 700여 권을 어렵게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고 밝혀 다행이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복원을 염두에 둔 비지정문화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 399번지 일원에 위치했던 진천 완위각지 사랑채는 지난해 11월 오후 강한 비바람에 붕괴됐다...

이하곤과 진천 완위각

마지막 남은 완위각 사랑채 건물 李澤容(이택용)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종이책이 의미가 있을까? 더욱이 종이책을 많이 소장한 장서가(藏書家)의 존재가 가치로울까? 이른바 ‘디지털 독서 시대’가 도래한 이래로 문닫는 서점이 늘어가고, 생존 경쟁에서 밀린 종이책 출판업계가 울상이다. 책을 사서 책장에 꽂아두는 것을 낙으로 삼는 독서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독서만큼은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고 싶다.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이 친근하고 익숙하다. 뾰족하게 깎은 정갈한 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더러는 찌지를 붙이기도 한다. 그리고 여전히 더 많은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우리시대에 책이, 그러한 책을 소장한 장서가가 대수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