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통도사 선자비위(扇子=부채)

야촌(1) 2020. 12. 13. 22:44

■ 통도사 선자 바위(이름바위라고도 한다).

 

122(8-12) 서상붕,조석찬,이현직바위(선자바위 본체 동쪽 4단)

 

●농상공부주사 서상붕

철종 때 기장현감 조석찬

헌종 때 부산첨사 이현직

경상북도관찰부주사 강준

 

 

 

 

바위번호122(구역번호8-12) 서상봉,윤석찬,이현직바위(선자바위본체동쪽4단) 38명
연번호 새겨진한자 한글표기 조선왕대 연대 비고
(1) 8명
1724 吳炳坤 오병곤      
1725 徐相鵬 서상붕 고종32년 1895 농상공부 주사
1726 申興道 신흥도      
1727 申龍或 신용혹      
1728 徐義瀚 서의한      
1729 金鍾奭 김종석      
1730 鄭在吉 정재길      
1731 李永基 이영기      
(2) 13명
1732 徐世? 서세묵      
1733 鄭義斗 정의두      
1734 崔有珩 최유형      
1735 金相宇 김상우      
1736 金啓鎭 김계진      
1737 孫養浩 손양호      
1738 秋長福 추장복      
1739 崔得宇 최득우      
1740 崔興翔 최흥상      
1741 白在一 백재일      
1742 李行植 이행식      
1743 尹錫來 윤석래      
1744 孫漢斗 손한두      
(3) 17명
1745 金義旭 김의욱      
1746 尹鳳錫 윤봉석      
1747 尹龍奎 윤용규      
1748 李光柱 이광주      
1749 李重璹 이중숙      
1750 李義淳 이의순      
1751 曺錫瓚 조석찬 철종10년 1859 기장현감
1752 自 基永 자 기영      
1753 韓龜爀 한구혁      
1754 金錫吉 김석길      
1755 金泌銖 김필수      
1756 李顯稷 이현직 헌종5년 1839 부산첨사
고종7년 1870 형조판서
1757 宋熙直 송희직      
1758 熙昇 희승      
1759 姜浚 강준 고종38년 1901 경상북도관찰부주사
1760 金光億 김광억      
1761 徐璟祖 서경조      

 

통도사(通度寺) 이름바위 122번바위는 선자(扇子)바위 동쪽면 4단에 해당한다.

동쪽 면이 땅에 닿는 발치 부분인 것이다. 여기에 모두 3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나 이 가운데 신원이 드러난 사람은 단 네 명뿐이다.

 

121번바위에서 말한 것처럼 선자바위 동쪽면은 단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위에 새겨진 이름의 수가 늘어나는 반면 신원이 밝혀지는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선자바위 동쪽면은 편의상 4단으로 나누어 119번에서 122번바위로 이름을 붙였다.

가장 윗단인 119번바위에는 1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11명의 신원이 확인돼 확인율은 78%에 이르렀다. 둘째단인 120번 바위에도 2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20명의 신원이 밝혀져 76%였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오면서 확인율이 급격히 떨어져 셋째단인 121번바위에는 새겨진 이름 44명 가운데 확인된 수는 12명에 불과해 확인비율은 27%에 불과했고, 마지막 넷째단에는 새겨진 38명 가운데 확인된 수는 단 4명에 불과해 고작 10%에 그쳤다.

 

이처럼 마지막 단에 이르러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 것은 행세하던 사람들은 모두 끝자락에 이름을 새기는 것을 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22번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 가운데 겨우 신원이 확인된 농상공부주사 서상붕(徐相鵬), 기장현감(機張縣監) 조석찬(曺錫瓚), 부산첨사(釜山僉使) 이현직(李顯稷)의 이름을 따 서상붕,조석찬,이현직(徐相鵬.曺錫瓚.李顯稷) 바위로 이름 지었다.

 

 

 

농상공부주사 서상붕

 

122번 바위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며 모두 3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오른쪽의 첫째무더기는 다시 아래 위 두 줄로 이름을 새겼고, 왼쪽의 둘째무더기는 한 줄 뿐이다.

 

오른쪽 무더기에는 윗줄에 11명, 아랫줄에 10명 등 2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사람은 서상붕(徐相鵬) 한 사람 뿐이다.

그는 고종 32년(1895) 농상공부 주사였다.

 

 

서상붕(徐相鵬)은 의례에 밝았기 때문인지 각종 의례에 예식위원으로 차출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고종 40년(1903)에는 경시예식위원(慶時禮式委員)이 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지방관을 지냈다.

고종 41년(1904) 영평군수(永平郡守), 고종 43년(1906) 광양군수(光陽郡守)에 임명된 것이다.

 

122번 바위는 처음엔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낙엽이 쌓여 흙이 되면서 바위 아래 자락에 새겨진 이름들이 묻혀버린 것이다.

오른쪽 첫째 무더기가 더 심했다.

 

그런데 뒤에 덮힌 흙을 파내면서 이름은 드러나는데 이번에는 이들의 신원이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살펴보고,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찾아보고, 총독부직원록(總督府職員錄)을 뒤져도 쉽사리 특정할 수 있는 이름들이 없다.

 

그때서야 이 부분에 이름을 새긴 사람들의 신원이 왜 잘 확인되지 않는지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높은 관직에 오르는 등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나 기품을 따지는 여유 있는 한량들은 미리부터 세월이 가면서 묻혀버릴 자리를 피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항상 나쁜 자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차지인 것 같아 씁쓰레하다.

 

 

 

여기에 이름을 새겼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21명은 다음과 같다.

오병곤(吳炳坤), 신흥도(申興道), 신용혹(申龍或), 서의한(徐義瀚), 김종석(金鍾奭), 정재길(鄭在吉), 이영기(李永基), 서세묵(徐世?), 정의두(鄭義斗), 최유형(崔有珩), 김상우(金相宇), 김계진(金啓鎭), 손양호(孫養浩), 추장복(秋長福), 최득우(崔得宇), 최흥상(崔興翔), 백재일(白在一), 이행식(李行植), 윤석래(尹錫來), 손한두(孫漢斗) 등이다.

 

이 가운데 윤석래(尹錫來)는 같은 이름에 조선 경종 때(1720~1722)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낸 사람이 있지만 글자가 새겨진 위치나 크기로 미루어 보아 동일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철종 때 기장현감 조석찬

 

122번 바위 두 번째 무더기인 왼쪽 면에는 1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여기서는 세 사람의 신원이 확인됐다. 철종 10년(1859) 기장현감(機張縣監)을 지낸 조석찬(曺錫瓚), 헌종 5년(1839) 부산첨사(釜山僉使)를 지낸 이현직(李顯稷) 그리고 고종 38년(1901) 경상북도관찰부(慶尙北道觀察府) 주사를 지낸 강준(姜俊)이 그들이다.

 

먼저 철종 10년 기장현감(機張縣監)을 지낸 조석찬(曺錫瓚)이다. 철종 3년(1852) 수문장(守門將)이 되었고, 철종 7년(1856) 훈련주부(訓鍊主簿)를 지낸 뒤 철종 10년에 기장현감으로 내려왔다.

 

철종 13년(1862) 기장을 떠나 우림장(羽林將)으로 되돌아갔고, 고종 1년(1864) 본청기사장(本廳騎士將), 고종 12년(1875) 본영천총(本營千摠)을 지냈다.

 

 

 

헌종 때 부산첨사 이현직

 

이 무더기에서 두 번째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헌종 5년(1839) 부산첨사(釜山僉使)를 지낸 이현직(李顯稷)이다. 이현직은 순조 26년(1826) 훈련주부(訓鍊主簿)가 되었다. 양부인 아버지 이격(李格)이 병사(兵使)를 지내 음관으로 벼슬에 나간 것이다.

 

순조 27년(1826) 도총도사(都摠都事), 순조 29년(1829) 고성현령(固城縣令), 헌종 1년(1835)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완도)를 거쳐 헌종 5년(1839) 부산첨사(釜山僉使)가 되었다. 비록 첨사라고는 하나 품계가 종3품인데 비해 새겨진 이름의 크기가 매우 작아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온 시기가 178년 전이라고 상기해보니 이해가 된다. 이곳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크기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전에 새겨진 것으로 확인되는 이름은 경종 3년(1723) 6월에 암행어사로 내려와 87번바위에 이름이 새긴 유수(柳綏)와 같은 해 겨울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관내 지방관들로 있으면서 함께 이곳에 와 2번바위에 이름을 새긴 동래부사박내정(東萊府使朴乃貞), 영산군수이사윤(靈山郡守李師尹), 밀양부사이희주(密陽府使李熙疇), 양산군수장후상(梁山郡守張后相) 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이름 글자를 작게 새겼다.

이로 미루어 당시는 벼슬한 관리들이지만 이름 글자를 작게 새기는 겸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현직(李顯稷)은 부산첨사를 지낸 다음 헌종 12년(1846)에는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가 되고 헌종 14년(1848)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철종 8년(1857) 북병사(北兵使), 철종 10년(1859) 남병사(南兵使)를 거쳐 고종 4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냈으며, 고종 7년(1870)에는 도총관(都摠管)과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경상북도관찰부주사 강준

 

122번바위 두 번째 무더기에서 세 번째로 신원이 드러난 사람은 고종 38년(1901) 경상북도관찰부(慶尙北道觀察府) 주사를 지낸 강준(姜俊)이다. 그가 경상북도관찰부에서 주사로 일한 기간은 딱 1년이다. 고종 38년 1월 11일에 임명되어 고종 39년 1월 13일 면직된 것이다.

 

강준(姜俊)이 경상북도관찰부에 일하면서 짬을 내어 이곳에 와서 이름을 새긴 것인지, 아니면 자리를 그만 둔 후 편안한 마음으로 왔을지는 알 수 없다. 122번 바위 두 번째 무더기인 왼쪽 면에 이름을 새겼으나 신원이 드러나지 않는 14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김의욱(金義旭), 윤봉석(尹鳳錫), 윤용규(尹龍奎), 이광주(李光柱), 이중숙(李重璹), 이의순(李義淳), 이의순의 아들 기영(基永), 한구혁(韓龜爀), 김석길(金錫吉), 김필수(金泌銖), 송희직(宋熙直), 희승(熙昇), 김광억(金光億)

 

출처 : 이무의(李武義)의 사찰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