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조선시대 사립도서관 ‘완위각’
178억 6천만원 들여 복원한다.
↑완위각지 발굴 현장 모습[2009]
↑인장이 찍힌 완위각(만권루) 소장 책
↑보존 중인 완위각(만권루) 소장 책
한 시대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책만 한 게 없다.
더욱이 책이 최고의 지식 전달 매체이자 고도의 문화적 산물이었던 전통사회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장서(藏書)는 최고의 문화가치로 한 시대를 통관할 수 있는 실마리를 현대인들에게 제공해 준다.
조선 숙종 때, 오늘날의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399번지 일원에 서적 1만 권을 소장한 사립도서관 ‘완위각(宛委閣)’이 있었다. 완위각은 조선시대 4대 도서관의 한 축으로 ‘만권루萬卷樓)’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711년(숙종 37)~1712년 사이에 담헌 이하곤(澹軒 李夏坤,1677~1724)이 지었고 당대의 명필가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이 찾아와 ‘완위각’이라는 현판을 써서 달았다. 윤순의 제자 이광사(李匡師,1705~1777)는 만권루(萬卷樓)란 현판을 썼다.
조선 후기 문신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독서차기(讀書箚記)>에는 진천에 담헌 이하곤의 완위각을 위시하여, 안산지역의 퇴당 류명천(退堂 柳命天)의 청문당(淸聞堂)과. 그의 아우 정재 류명현(靜齋 柳命賢)의 경성당(竟成堂). 서울 이정구(李廷龜)의 고택을 18세기 4대 만권당(萬卷堂) 임을 적시하고 있다.
그럼 완위각엔 만권의 장서를 어떻게 수장할 수 있었을까?
이하곤의 <숙가곡농사(宿迦谷農舍)>라는 시에 붙어있는 주석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청주 설운곡(雪雲谷)에 나의 증조부인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1569~1626) 께서 일찍이 이곳에 건물을 짓고 수천 권의 책을 수장(收藏)하고 계셨다고 한다..
설운곡(雪雲谷)은 청주(淸州)의 뒤쪽 끝에 있는데 화양동(華陽洞) 옥계폭포(玉溪瀑布)에서 겨우 5리(里) 떨어져 있다. 정자는 이미 퇴락했고 그곳에 승려 몇 명이 암자를 지어놓고 지키고 있다.
그나마 암자에는 우물이 없어 시내 동쪽의 사담(沙潭)에 옮겨지으려 하고 있다. 사담(沙潭)은 청주 뒤쪽 끝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는데 경치가 아주 빼어나다. 이곳이 우리 집안의 별장이다라고 했다.
그럼으로 완위각은 증조부 때부터 세전되어오던 고금의 수많은 서적과 이하곤 당대까지 수집한 서적이 기반이 되어 만권의 장서로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완위각에 수장한 서적의 종류가 다양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타 장서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반 유학자들의 장서가 경서(經書)에 치중한 것이었다면 완위각의 장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패관소설. 의약. 복서(卜書=점괘).불서(佛書).노장(老長)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서화. 묵각(墨刻) 골동품도 상당히 많이 소장했다.
이러한 계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이여송(李如松,1549~1598)의 좌 참장(左參將)으로 조선에 왔던 낙상지(駱尙志) 장수가 그의 접반관이었던 벽오 이시발의 학문과 병법의 출충함에 매료되어 벽오 어머니 안동김씨를 찾아뵙고 아들과의 의형제를 허락해줄 것을 청했는데 1594년(선조 27) 귀국 후에는 고서 수천 권을 보내왔다고 한다.
벽오로 말하면 조선시대 5대 경학가(經學家)의 한사람으로 불리는데 경주부윤 시절에는 선조 이제현의 『익재난고(益齋亂藁)』.『역용패설(櫟翁稗說)』, 『효행록(孝行錄)』 등을 중간하였고 서법첩(書法帖-1599년』.『구인록(求仁錄)』.『심경부주(心經附註)』.『가례(家禮)』.『경국대전(經國大典)』.『소미가숙점교부음통감절요(少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1603년』등 여러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의 증손자 하곤(夏坤)은 현종 13년(1672)에 좌의정을 지낸 화곡(華谷) 경억(慶億, 1620~1673)의 손자로 당대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역임한 회와(晦窩) 인엽(寅燁,1656~1710)의 아들이다.
그리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1646~1714)은 그의 고모부가 되고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2)는 그의 장인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제자이기도 한 담헌은 여행과 시 서화를 즐기며 평생 포의(布衣-무명옷)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는 장서와 골동품. 서화의 수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산수와 서화의 평론에 뛰어나 명인들의 제식(題識) 같다는 조귀명(趙龜命,1693~1737) 서예가의 말처럼 뛰어난 평론가이기도 하다.
담헌은 신분을 뛰어넘어 당대 명사들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였는데. 시인 이병연(李秉淵)· 문신 신정하(申靖夏)· 홍중성(洪重聖)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화가 윤두서(尹斗緖)· 정선(鄭敾)· 문인 조귀명(趙龜命)·등과 같은 사대부들과 교유하는 한편, 한류 역관 시인 홍세태(洪世泰)·문장가 정래교(鄭來僑)· 정민교(鄭敏僑) 형제와. 서예가 이수장(李壽長) 등과 같은 여항인(閭巷人-벼슬하지 않은 일반 백성)과도 교유하였다.
당시 궁벽한 충북의 진천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와 예술가, 사대부와 여항인의 회합처가 되었는데. 다름 아닌 완위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하곤 당대뿐만 아니라 20세기 초까지도 정인표(鄭寅杓,1855~1935), 정인보(鄭寅普,1893~1950) 등과 같은 걸출한 근대 학자들이 찾아와 공부한 곳이기도 하고, 한말에는 이상설(李相卨,1870~1917), 정인보(鄭寅普) 홍승헌(洪承憲,1854~1914) 등 우국지사들의 은신처로 활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담헌은 그들과의 교유를 통해 많은 전적과 서화를 수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담헌이 책을 구하는데 얼마나 열정적이었는가는 성균관 대사성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그의 아들 남록(南麓) 이석표(李錫杓,1704~1751)가 쓴 『선부군행장』에 아버지는 갖고 싶은 책을 만나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팔아서라도 구입할 정도였다는 일화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당시 ‘완위각’의 장서들은 우리나라 젊은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면서 이 집에 들러 원하는 책을 찾아 실력을 다듬기도 하고, 주변 고을의 유생들이 모여 강론과 토의를 하면서 학식을 연마하기도 했다.
또한 당대 명사들도 이곳을 찾아 책도 읽고 담론으로 친분을 교유하는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완위각은 18세기 조선의 학문에 크게 기여한 도서관이었지만 일본 강점기 및 한국전쟁 등 역사의 질곡과 더불어 불에 타 소실되고 다행히 800여 권의 장서만 남았는데 이중에는 벽오 이시발의 장서인(藏書印)이 있는 서적들이 여러 권 전하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 오늘날 규장각에도 100여 책의 만권루 장서가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엽(李寅燁)에게 내사(內賜=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내림)된 서적도 포함되어 있어 만권루 장서가 이시발부터 이하곤에 이르는 4대에 걸쳐 형성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완위’란 뜻은 중국 고문에는 장서(藏書) 혹은 한림(翰林)이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역사서 춘추(春秋)에는 하왕조의 시조인 우(禹) 임금의 능(陵)이 ‘완위산’에 위치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완위각지(宛委閣址)’는 2003년 학술조사와 2009년 발굴조사 결과 본채 등 모두 7개의 한옥 건물이 있던 것으로 조사되었고 지금까지 사랑채 한 동만 남았다가 지난해 11월 폭설로 인해 무너졌다.
이와 같이 완위각의 문화재적 가치로 진천군은 2012년 이하곤의 9대손으로부터 ‘완위각 장서를 모두 기증받아 도서목록 및 역주서’를 발간하고 남아있는 사랑채를 비지정문화재로 관리하다. 2013년 도지정문화재로 신청했으나 문화재지역으로 정비 후 검토하는 것으로 지정 보류되어 이듬해 문화재 지정을 위해 완위각지 2,959㎡(896평)를 2억 6200여만 원에 매입했다.
그 후 완위각 복원계획은 2016년 문체부의 ‘충청권 유교문화권 광역관광 개발’ 일환으로 ‘초평 책마을 조성사업’으로 선정되었고. 진천군은 지난 7월 8일(수) 코로나 19로 미뤄졌던 ‘초평 책 마을 조성사업 주민설명회’를 열고 2021년부터 2026년까지 ‘고서 박물관’ ‘완위각’ ‘쌍오정(雙梧亭=李寅燁 건립한 정자)’의 복원에 총 178억 6000만원(국비 87억 3000만원, 도비 17억 4600만원, 군비 73억 8400만원)이 투입될 계획이다.
아무쪼록 오문의 문화유적 ‘완위각’이 복원된다는 것은 후손들과 문중인사 그리고 진천군 및 충북지역 역사학계의 부단한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앞으로 복원이 이뤄지면 선조의 독서에 대한 열정이 오늘로 이어지고 미래지식정보시대의 풍성한 앞날을 예견하는 온고지신의 상징이 될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 :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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