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경복궁 신무문 편액 글씨 - 이현직(李顯稷)

야촌(1) 2020. 12. 13. 11:44

일제 강점기 성벽이 무너진 신무문(1920년대 모습)

 

신무문은 조선 세종 15년(1433년)에 세워져. 성종 6년(1475년)에 방위를 관장하는 사신(四神) 가운데 북쪽을 담당하는 현무(玄武)를 뜻하는 '신무문(神武門)'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함께 소실되었고, 고종 2년(1865년)에 경복궁 중건과 함께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 문은 평상시엔 닫아두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음기(陰氣)가 궁궐을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기우제를 지낼 때나 이 신무문 밖 활터 등으로 행차할 때에만 이 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고종 33년(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이 이 문을 통해 러시아대사관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 천장 (사진 출처: 한겨레신문)

 

출입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입니다. 그 천장에는 북방을 관장하는 상상의 동물인 현무(玄武)를 그려놓았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을 중심으로 동쪽 정문인 건춘문(建春門)에는 청룡과 황룡, 서쪽 영추문(迎秋門)에는 백호(白虎), 남쪽 광화문(光化門)에는 주작(朱雀)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음양오행설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무문(神武門)현판은 조선 말 공조와 형조판서를 역임한 이현직「李顯稷,1797년(정조 21)∼1876년(고종 13)의 글씨이다.

 

선생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字)는 백형(伯衡)이다. 1865년 총융사(摠戎使)가 되었고, 이듬해 어영대장(御營大將)과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있으면서 경복궁 중건을 감독하였다.

 

그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고종 8) 4월 조선과 미국과의 전쟁」가 거의 끝나갈 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1871.05.28/지금의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 신무문(필자가 군대있을 때 위병 근무 서던 문입니다).


신무문은 한동안 보안과 경호의 문제로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 9월 29일에 일반에 개방되었는데, 신무문을 국민에게 열어줘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 청와대

 

신무문 밖으로 나가면 바로 청와대(靑瓦臺)가 마주 보입니다.

원래 이곳은 경복궁의 후원입니다. 왕 또는 문관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연회를 하였던 융문당(隆文堂)과 그리고 과거시험의 무과와 활쏘기 시합, 군사들의 교체훈련 및 사열 때 사용하였던 융무당(隆武堂)을 비롯하여 옥련정(玉蓮亭) 등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농재(慶農齋)와 그 주변 건물 앞에는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內農圃)도 있었습니다.

또 그 윗부분 높은 지대, 즉 경무대(景武臺)는 왕이 친히 군사훈련을 점검하기도 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했던 곳입니다. 일제는 이를 모두 철거하고, 이곳에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총독 관저를 세웠습니다.

 

이후 총독 관저는 이승만 대통령 때 대통령 관저로 쓰이면서 경무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4·19혁명 이후 청와대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경복궁 신무문(景福宮 神武門)

1.소개

경복궁의 북문(北門)이다. 단, 정북(正北)이 아닌 서북쪽으로 치우쳐있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 때 관료인 이현직「李顯稷,1797년(정조 21)∼1877년(고종 14)」이 썼다.

 

2.이름

신무(神武)’는 ‘신령스러운(神) 현무(玄武)’라는 뜻이다. 4신 중 현가 북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므로, 경복궁의 북쪽문에 ‘무(武)’ 자를 넣은 것이다.

 

3.역사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없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동, 서, 남쪽에만 궁문을 두었고, 북쪽 궁성은 목책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다 1433년(세종 15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북문을 지었다.#

하지만 문을 세웠어도 이름은 짓지 않았다. 이후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徐居正)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을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곧 복구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4.용도

평소에는 닫혀있었다.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북쪽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이 음(陰)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비상시나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또는 왕(王)이 비밀리에 궁(宮) 밖을 나갈 때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 중 · 후기에는 문 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會盟壇)이 있어 임금이 신하들과 회맹제(會盟祭: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에 참석할 때 이용했다.

 

5.특징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및 서문인 영추문(迎秋門)과 구조가 같다.

단, 육축의 높이와 폭이 1자 반 정도 작다.

 

아치(門)을 낸 석축 위에 단층짜리 문루(門樓)를 올렸다. 문루 4면의 가장자리 앞에는 벽돌로 쌓은 통여장이 놓여있다.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가 달려 있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雜像)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문루의 내부는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다. 가운데칸 천장은 구조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가장자리 쪽 들보 위는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문루의 바닥은 전부 전돌을 깔았으나 가운데 칸만 마루를 깔았다.

 

아치형 문은 겉에만 아치를 구성하고 내부의 천장은 반자로 덮어 놓은 모습이다. 반자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문짝은 붉은색 나무판이며 문짝 위에는 문둔테를 두었다.

 

경복궁 안쪽 부분의 석축 양쪽에 문루로 올라갈 수 있는 돌 계단을 두었다. 계단에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계단과 문루 사이의 통여장 가운데에는 전돌을 쌓은 문을 두었다.

 

6.여담(餘談)

1519년(중종 14년) 11월에 일어난 기묘사화가 시작된 곳이다. 중종은 한 밤중에 승지들도 모르게 홍경주, 김전, 남곤, 심정 등 훈구 대신들을 불러 신무문으로 들어오게 했고, 훈구 대신들은 비밀 회의를 열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숙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기묘사화를 ‘신무의 난’,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한다.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때,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을 빠져나갔다.

 

1954년에 경복궁이 일반에 개방될 때 신무문도 같이 개방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부대(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가 신무문 안쪽에 주둔하면서 폐쇄되었다.

 

1990년대에 군부대는 이전했지만 이후로도 근처에 청와대가 있어 보안 상의 이유로 닫혀있다가 2007년 9월 29일 건청궁 복원공사 완료에 맞추어 45년 만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이후로는 관광객들이 청와대 인증샷을 찍을 때 오가는 곳이 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자료 일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