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141

가장이씨금석록서(家藏李氏金石錄序) - 李裕元

■ 가장이씨금석록서(家藏李氏金石錄序) 월성이유원경춘저(月城 李裕元 景春 著) 古之金石。刻紀名卿賢士功烈行治也。夫勳則鏤彜鼎。德則勒貞珉。配金匱石室之藏。使振其聲而壽其傳。是以牲繫屹而先聖題。豊碑作而隧道光。此得直不華。無以掩諸幽者也。我李氏起自三韓。迄于羅麗。代出碩德聞人。銘功德則咸歸韓氏。立圓石則必仿趙刻。元魯山之四絶莫擬。而宿貯司馬公十歲作也。迺聚家中先世碣文。作爲一部藏籍。非治金伐石。垂耀無極。抑表石馬以識白楊之多矣。昔公孫文子擇不食之地。而後世知瑕丘之樂者。賴文獻之久也。印搨舊本。雖爲文獻中西序弘璧。然惜不能廣庋諸族。用墨板剞劂。便於竹素紙札。轉相謄寫。若要前世載筆之士。見其罅搜抉證。必睨視讐校之役。抱槧懷鉛。汲汲無暇也。凡金石文。出於當時所作。皎皎可信。勤渠鄭重。以遺來世。惟恐不遠。好古博雅者。重之以寶玩。攷拓實事求是。則古人不恨今人也。噫。今我編輯。卽我家史也。行..

오천선생문집서(梧川先生文集序) - 李裕元 著

■ 오천선생문집서(梧川先生文集序) 월성 이유원 경춘 저(月城 李裕元 景春 著) 古人文章。明道德通世務。如典謨之言。明白坦易。無深怪險僻之語。乃可爲經藉之皷吹。政化之黼黻也。梧川先生在英廟盛際。謀王軆斷國論爲己任。所製文字。無非是格君心正士趨協民風。大者灝噩。有都兪吁咈之象。小者精微。有比興正變之軆。至若當謹嚴處。衮鉞誅褒。莫越於春秋之義。所以協贊皇猷之文富。飛影摛光之作尠。巾衍畧干卷。編輯成帙。使某校讐之。噫。先生之文。委積於公車。炳烺於文苑。如星日之散爲明光。麟鳳之出爲稀瑞。戊辰一䟽。可以知先生平生。何必盡見其文而論其德也。所陳言議。不外乎忠君愛民。臯陶賡歌。周召訓誥。奚獨專美於典謨。而爲政化之本哉。易曰見龍在田。天下文明。先生處人臣之極地。言以足志。文以足言。使世道文明。則有以知先生之志也。昔先生手校白沙先生集。而我先君文貞公始入鋟梓。今於先生之集。某敢有是役。後日欹劂。..

기봉집 서(騏峰集 序) - 이시성 저(李時省 著),

기봉집 서(騏峰集 序) 鰲恩君 敬一謹書 余自髫齔。稔聞吾宗古有文章士騏峰公。公自少肆力公車業。然雅不欲尋摘章句。爲粉餙塗澤計。博極經史。沉潛醲郁。其所謂厚積而薄發者歟。甞聞公少入山寺。讀范睢傳萬遍。出洞見山川草木。皆范睢傳云。其用工之勤。槩可想見。發爲大策。縱橫三千字。纚纚可讀。以是屢魁發解。爲一代功今家所傳誦。它詩文。亦甞見賞於當時士友間。以位未通顯。鮮爲時俗所推詡。略干遺文之散佚者。尙埋沒於蠧蝕蛛纏之中。良可惜也。今其後孫箕煥輩。袖公詩文數卷來。眎余曰。吾祖著述之富。想不至此。而爲吾祖之孫者。擧滾汩憂亂。未有以文學世其家。惟此殘篇斷藁。迺經明谷崔相公所刪定者。今將相率鳩財。爲鋟梓計。請余節其粹而弁之首。余受而讀之。文固汪洋贍博。詩亦辭達理鬯。可驗公磨杵之工。方諸絺章棘句。炫耀人耳目者。不啻燕越矣。何必求綺麗鏗鏘爲哉。况已經崔相國之繩削。相國近古之宗匠。愚且甲管矣。公諱時省。於吾..

백사선생집서(白沙先生集序)

■ 백사선생집서(白沙先生集序)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1638) 하늘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걱정해 주는 것이 지극하긴 하다. 그러나 평지도 어느 땐가는 비탈이 되고 한 번 갔다가는 다시 돌아오는 법으로서 세상에 변고가 없을 수 없는 것은 대개 기수(氣數)와 관계되는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하늘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장차 변고가 일어나려 할 때에는 하늘이 반드시 영걸(英傑)스러운 인물을 내려보내 이에 대한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공적을 성취하게 하기도 하고 풍도(風度)를 확립하게 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것에 힘입어서 세도가 계속 유지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인물로 말하면 태어날 때부터 그야말로 천지(天地) 사이의 간기(間氣 : 특출한 정기(精氣))를 품부 받은 존재라 할 것인데..

용재유고(慵齋遺稿)

용재유고(慵齋遺稿) 1824년(순조 24) 초간본으로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전기 문신·학자 李宗準의 慵齋先生遺稿 卷頭에 金熙周, 李在緝의 序文이 있고, 卷末에 李種杞, 金道和, 權相翊, 盧相稷의 跋文이 있다. 본문에는 詩, 疏, 啓, 跋, 墓碣, 行狀, 行錄, 墓碣, 上梁文, 摭遺, 補遺 등이 수록되어 있다. 크기는 20.4(가로) X 28.7cm(세로)이다. 조선 1454년(세조 元年)∼1499년(연산군 5) 때의 문신·학자인 이종준(李宗準)의 시문집. 1책 목판본으로 1824년(순조 24) 후손 이창욱(李昌郁)이 편집하고, 권사협(權思浹)과 이순빈(李淳賓)이 교정하여 초간본(初刊本)을 간행함 [시대] 조선후기 [간행연도] 1824 [세계] 경주이씨 월성군파 후손(慶州李氏 月城君派) 권수제..

제정선생 문집(霽亭先生文集) 해제(解題)

■ 제정집(霽亭集) 해제(解題) 형태서지 권수제 霽亭先生文集 판심제 霽亭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36年刊 권책 4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2.5×17.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 소장도서번호 D1-A284B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3 저자 성명 이달충(李達衷) 생년 1309년(고려 충선왕 1) 몰년 1385년(우왕 11) 초명 達中 자 止中, 仲權 호 霽亭 본관 慶州 시호 文靖 특기사항 金九容 등과 교유 가계도 李世基(密直副使) 18世 │ └ --------李蒨(僉議參理) 17世 ∥ 朴氏(延昌郡夫人) │ └ --------李達衷(이달충) 18世 ∥ 橫城趙氏(政堂文學 趙文瑾의 女) ∥ l ∥ ㅣ--------이준[李竴(密直戶部典書)]19世 ∥ ㅣ ∥ ..

관란집(觀瀾集) - 이승증(李承曾) 著

■ 관란집(觀瀾集) 관란 이승증선생문집 석판본 3권1책. 19世 교감공 존사(校勘公 存斯)의 六代孫임. 간행연도 : 1863년[중간본] 필자 소장본(경매일자 : 2009. 09. 11) 필자 소장본(1863년 간행본) ● 문집개요 및 간략 해제. 1821년(순조 21) 傍孫 홍리(弘离)와 7대손 은호(彦灝) 등이 편집 간행한 초간본을 보완한 것으로‚ 1863년(철종 14) 9대손 익경(益慶)과 방손 운정運楨) 등이 중간하였다. 책머리에 오한원(吳翰源)의 서문을 이민수(李民秀)가 쓴 것과 장시하(蔣時夏)의 구서가 있고‚ 책 끝에 성구세(成龜世) 외 5인의 발문이 있다. <故微士觀瀾李先生行狀>을 보면 <九容箴>·<九思箴>·<六有箴>·<三畏箴> 등을 지어 자신을 경계했다고 하는데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임진왜..

벽오유고 목록(碧梧遺稿目錄)

벽오유고(碧梧遺稿) [저자] 이시발(李時發, 1569(선조 2) ~ 1626(인조 4)) 지음 [간행년] 미상 [책 소개] ◇한국문집총간 제74집 ◇본 문집의 저본은 편집 및 서사(書寫) 경위가 불분명하다. ◇원집7권. 부록1권 합4책(308판)의 사본(寫本) 이다. [주요목차] 碧梧先生遺稿卷之一 賦 詩 碧梧先生遺稿卷之二 詩 挽詞 碧梧先生遺稿卷之三 疏箚 碧梧先生遺稿卷之四 疏箚 啓辭 議 碧梧先生遺稿卷之五 箋 敎書 書 墓誌 祭文 上樑文 碧梧先生遺稿卷之六 雜著 附○傳○記○序○跋 碧梧先生遺稿卷之七 碧梧先生遺稿卷之 附 ■ 벽오유고(碧梧遺稿) 조선후기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 1569년 ~1626년)의 문집이다. 본집은 후손 이정희(李晶熙) 씨와 방손(傍孫) 이춘희(李春熙)씨가 소장하고 있는 8권 4책의 필사본..

술지부(述志賦)-이원(李黿)

이원(李黿 )선생께서 예조좌랑에 재직시 태상관(太常官)의 봉상시(奉常寺)를 겸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諡號)를 내리자고 청했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 4) 무오사화(戊午士禍)때, 평안도 곽산(郭山)으로, 귀양가서 본인의 비통한 심정을 지은 글입니다. 선생께선 이곳에 유배된 후, 2년뒤 1500년(연산 6)에 다시 전라도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문인(文人)이라 하여,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벌을 가중시켜 연산군(燕山君)으로 부터 능지처참(陵遲處斬)당했다. 이로서 선생의 부모형제(父母兄第) 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고의 삶을 겪었다. --------------------------------------------..

제정문집 서(霽亭先生文集 序) 

■ 제정선생문집 서(霽亭先生文集 序) 지은이 : 이인행(李仁行) 제정(霽亭) 이문정(李文靖)공은 고려 말엽에 이름난 유학자이다. 대대로 문한(文翰)의 가문으로, 나이 18세에 장원으로 발탁되어 사한(史翰) 정언(正言)으로 말미암아 차례로 국자좨(國子祭酒-高麗時代國子學의 校長) 이부판사(吏部判事-從一品)에 올랐으니, 모두 최고의 인재 선발 이었다. 성품은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았으니, 공민왕 때, 팔관회(八關會)에 담당 관리가. 관세막(盥洗幕)을 설치하고, 번(藩)을 세워 내외를 구분 하거늘 공(公)이 막지부(地部)의 수장이 되어, 하여금 그 번(藩)을 거두게 하였다가, 주상의 노여움을 받아 화(禍)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으나, 좌우에서 힘써 구함에 힘입고 또 문학에 중한 명망이 있음으로 노여움을 풀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