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사선생집서(白沙先生集序)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1638)
하늘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걱정해 주는 것이 지극하긴 하다. 그러나 평지도 어느 땐가는 비탈이 되고 한 번 갔다가는 다시 돌아오는 법으로서 세상에 변고가 없을 수 없는 것은 대개 기수(氣數)와 관계되는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하늘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장차 변고가 일어나려 할 때에는 하늘이 반드시 영걸(英傑)스러운 인물을 내려보내 이에 대한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공적을 성취하게 하기도 하고 풍도(風度)를 확립하게 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것에 힘입어서 세도가 계속 유지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인물로 말하면 태어날 때부터 그야말로 천지(天地) 사이의 간기(間氣 : 특출한 정기(精氣))를 품부 받은 존재라 할 것인데, 너무도 탁월하여 세상에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존몰(存沒)과는 상관이 없는 인물로서 그가 한번 기침하며 침 뱉은 것이나 웃으며 이야기한 것들 모두가 후세 사람들로 부터 중하게 여김을 받을 만한 그런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옛사람들로 말하면 시대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만두고라도 근대(近代)에서 그런 인물을 찾아 본다면 고상(故相)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아마도 거기에 해당되리라 여겨진다. 우리나라가 임진년 이래로 큰 변고를 당한 것이 세 번 있었다.
왜구(倭寇)가 일으킨 난리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상황에 처하여 간신히 망하지 않고 있을 때, 공이 맨 먼저 큰 계책을 세워 중국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그 뒤에는 병조 판서를 맡아 임금의 계책을 도우는 한편 분주(奔奏 : 임금의 뜻을 효유하고 임금의 성예(聲譽)를 선양하는 것)하고 선후(先後 백성을 교도(敎導)하는 것)하면서 중흥(中興)의 위업을 제대로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무함했던 것으로 말하면, 기막힌 화(禍)를 당할 위험성이 임진년 때보다도 훨씬 더 크게 잠재되어 있었던 것으로서 가령 황제가 조금만 잘못 살필 경우에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조정 신하들 모두가 의기 소침하여 종종걸음만 치면서 기꺼이 황제 앞에 나아가 그 위험스러운 상황을 처리하려고들 하지 않았는데, 공이 왕명을 받들고 단독으로 수레를 타고 가 황제의 뜰에서 호소함으로써 나라가 입은 무함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임금의 근심이 풀어지게 하였으니, 그 공으로 말하면 더욱 위대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인륜(人倫)의 변고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간악한 신하가 임금의 비위를 맞출 목적으로 극악한 음모를 꾸며 군모(君母)를 폐위(廢位)시키자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금용(金墉)의 화(禍)가 아침저녁 사이로 박두한 상황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도리가 하루아침에 남김 없이 땅에 떨어질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그때로 말하면 별의별 무시무시한 형별 기구를 갖추어 차려 놓고서 뜬소문을 퍼뜨려 선동시키며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시기였는데, 공이 눈을 똑바로 뜨고 간담(肝膽)을 펼쳐 내면서 한마디 말을 토해 내어 부자(父子) 군신(君臣)의 의리를 정했다가 결국에는 이 일로 변방의 요새지에 귀양가 죽고 말았다.
그러나 공이 한마디 토해 낸 이 말 덕분에 지극히 존엄한장추(長秋)에 불측(不測)한 화를 끝내 가할 수가 없었고 보면, 공이 버팀목 역할을 하며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한 그 공이야말로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니, 천지(天地)의 공에 참여할 만큼 크고도 높은 것이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본조(本朝)가 2백년 동안 태평 시대를 구가하다가 불행히도 공의 시대에 이르러 세 번이나 큰 변고를 당하고 말았는데, 그때마다 보기 드문 절조(節操)를 세움으로써 사직(社稷)이 길이 보전되게 하고 인륜이 다시금 펴지게 하였으니, 참으로 하늘로 부터 사명을 부여받고 간기(間氣)를 얻은 인물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서 이러한 공에 참여할 수가 있겠는가.
공은 재주가 매우 뛰어나고 학문의 세계도 무척이나 넓었는데 문장을 보면 비범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문(詩文)에 대한 재능이 샘솟듯 넘쳐 흐르는 가운데 어디에도 매인 데 없이 탁절(卓絶) 엄려(嚴厲)한 웅변을 토해 내었는데,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말하면 옛사람과 비교해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고,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들로 말하더라도 오늘날의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 분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쏟으려 하지 않았을 뿐더러 저술한 것들마저 이따금 원고를 내버려 둔 채 갈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많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아, 그러나 공의 작품이 꼭 많아야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숙손표(叔孫豹)가 불후(不朽)한 일을 논할 때 입언[ (立言 :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훌륭한 언사(言辭)를 남기는 것]을 가장 뒤에 두었는데, 문장으로 말하면 또 입언 가운데에서 말단(末端)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공이 수립(樹立)해 놓은것 자체가 천추(千秋)에 길이 빛나기에 충분하니, 구구한 문사(文詞)가 후세에 전해지든 전해지지 않든 공을 평가하는 데에는 하등 관계가 없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공의 풍도(風度)를 사모하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진부하고 지엽적인 종적(蹤迹)이라 할지라도 모두 영구히 전해지게끔 하고 싶어할 것인데, 하물며 공이 신경을 써서 언어로 표현해 내놓은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공이 세상을 하직한 지 벌써 열두 해가 지났는데 아직껏 문집이 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이공 현영(李公顯英)이 관동(關東) 지방을 안찰(按察)하고 있다가 강릉(江陵)에 온 이사군 명준(李使君 命俊)과 함께 모두 옛적에 공의 문객(門客)이었던 처지에서 개연(慨然)히 뜻을 합쳐 공의 유고(遺稿)를 한데 모은 뒤 판각(板刻)을 하였는데, 공의 여러 자제들이 이에 대한 서문을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해 왔다.
재주가 없는 나로 말하면 약관(弱冠)의 나이에 같은 동네에서 살게 된 인연으로 공을 찾아뵈었다가 국사(國士)의 대접을 받았던 터인 만큼 지금에 와서 고루(固陋)한 말로나마 수식을 하여 이번의 역사(役事)를 돕는 것이야말로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일이기에 대략 공의 평소 행적을 서술함으로써 하늘이 공을 세상에 낸 뜻이 우연치 않았던 것임을 보이는 바이다.
아, 공과 같은 인물이 아니라면 문장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어찌 멀리 후세에 전해질 가치가 있다 하겠는가. 뒤에 이것을 보는 자들 또한 무엇을 근본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주01]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다.
[주01]평지도---법: 우주의 순환 법칙을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泰卦) 구삼 효사(九三爻辭)에 “평지치고 비탈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갔다가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다.
[주02]정응태(丁應泰)가---것: 임진왜란 때 경략(經略) 형개(邢玠)의 참모관이었던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가 “조선에서 왜(倭)를 꾀어 중국을 침범하고 요하(遼河) 동쪽을 탈환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 하고, 또 “조선에서 조(祖)니 종(宗)이니 하는 칭호를 멋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주문(奏文)을 올려 우리나라를 무함하였다.《燃藜室記述 卷4 楊鎬劾去遣使 辨誣條》
[주03]금용(金墉)의 화(禍) : 임금ㆍ황후ㆍ태자ㆍ태후가 폐위되어 유폐되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양후(楊后)와 민회태자(愍懷太子)가 모두 금용성(金墉城)에 갇혔고, 위(魏) 나라 임금 조방(曹芳)이 사마사(司馬師)에 의해 금용성으로 옮겨졌으며, 진 나라 혜제(惠帝) 역시 폐위된 뒤 금용성에 연금되었다. 《讀史方輿紀要 河南 河南府 洛陽縣》
[주04]장추(長秋) : 후한(後漢) 명덕마황후(明德馬皇后)가 거처했던 궁전 이름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비유한 말이다. 《後漢書 皇后上 明德馬皇后紀》
[주05]숙손표(叔孫豹)가---두었는데: 춘추 시대 때 노(魯) 나라 대부 숙손표가 진(晉) 나라에 갔을 적에 범선자(范宣子)가 길이 썩지 않을 일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가 대답하기를 “최상의 것은 덕을 남기는 것이고, 그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며, 그 다음은 말을 전하는 것이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라고 하였다. 《春秋左傳 襄公 24年》
[자료문헌
계곡집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6권 >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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