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임금이 내린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이경휘

야촌(1) 2018. 11. 20. 01:48

■ 임금이 내린 명을 받들 수 없다고 한 - 이경휘

 

이경휘[李慶徽, 1617년(광해군 9)~1669년(현종 10)]의 자는 군미(君美), 호는 묵호(默好) 또는 춘전거사(春田居士) 이다.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이경윤(李憬胤)의 증손이다. 조부는 이대건(李大建)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시발(李時發)이다. 어머니는 신응구(申應榘)의 딸이다.

 

공은 나이 17세 때인 1633년(인조 11년)에 진사가 되고, 1641년(인조 22년)에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고 춘추관기사관, 강화유수, 경기감사, 이조판서를 역임했다.공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충익공(忠翼公),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이 바다에 해 두개가 아름답게 떠오르는 꿈을 꾸고서 공과 훗날 좌의정에 오른 아우 화곡(華谷) 경억(慶億) 형제가 잇따라 출생하였는데. 모습이 준걸스럽고 노는 것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으며, 문리(文理)가 일찍 성취되어 여섯 살 때 항우전(項羽傳)을 읽을 정도였다.

 

이때 아버지가 서관(西關=평안도)에 있을 때였으므로 방백(方伯=監司) 박엽(朴燁)이 와서 뵈었는데 공이 옆에서 모시고 있었다. 아버지가 박엽에게 절을 하라고 명하자, 공은 즉시 서서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방백(오늘날의 도지사)께서 포악하여 살인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어찌 절을 하겠습니까?” 하며 거절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660년(현종 원년)에 이경휘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는데, 현종(顯宗=조선 제18대 왕)이 정청(政廳=정무를 보는 관청)에서 묻기를, “의관(醫官) 양제신(梁濟臣)을 일찍이 수령(守令)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지금 의망(擬望=관원을 임명할 때, 이조에서 후보자 세사람을 추천하던 일)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힐문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의관(醫官=의업에 종사하던 관원)이 수령에 제수되는 일은 전례에 없는 일입니다. 어명은 이미 받았으나 감히 그 명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는 임금이 여러 차례 하교 하였으나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화가 난 현종은 이경휘를 체직(遞職) 시키고 양제신을 양천현감(陽川縣監)으로 제수 한 후 공을 오랫동안 관직을 낙점하지 않았는데, 찬성(贊成) 송시열(宋時烈)과 전적(典籍) 이수인(李壽仁)이 진언(進言)하여 논구(論救) 하였고 임금 역시 곧 후회하였다.

 

언젠가 현종은 정승 정태화(鄭太和)에게 이경휘 형제 중 누가 더 나으냐고 물었다. 이 때 정태화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들 형제는 난형난제(難兄難弟)라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말하였다.

 

"내가 보기엔 이경휘가 장자 재목이다. 이상진[李尙眞,1614년(광해군 6)~1690년(숙종 16), 본관은 전의(全義), 우의정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뽑힘]이 전에 그의 막료로 있을 적에 자신의 진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때였는데 이경휘만은 알아보고 많은 다른 추천을 배제하고 그를 적극 천거한 것을 보았다."

 

이경휘의 추천을 받은 이상진은 뒤에 명 재상이 되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이경휘의 안목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원문 : 대동기문(大東奇聞) - 강효석[姜斅錫.1926] /역자 : 권영대[공역]이정섭, 조명근.

         조선왕조 오백 년의 선비정신(하-7)-서울 화산 문화, 1997

 

 

휘 유필

〈이경휘 편지〉, 『근묵』, 1660년(현종 1), 선생의 춘추 43歲 때의  행초서로, 황해도 관찰사(오늘날 황해도 도지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크기는 29㎝(세로)×39.6㎝(가로),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균관대학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