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성균진사 이병 묘지명(成均進士李炳墓誌銘)

야촌(1) 2010. 7. 21. 22:55

■ 成均進士李公墓誌銘   

    ◇국당공후 정순공파

 

서암 신정하 찬(恕菴 申靖夏 撰)

(1680~1715)

 

지난 광해조(光海朝) 때에 간옹(艮翁) 이공(李公)이 직언(直言)을 했다가 해도(海島)로 쫓겨났는데, 그의 맑은 명성과 곧은 절조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고 있다.

 

그런데 간옹의 손자인 진사 병(炳)이 기사년의 화(禍)를 당하여 화색(火色)이 매우 치성한 가운데 서울 지역의 선비 수백 인을 거느리고 대궐에 엎드려 상소하여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이 무함받은 것을 극력 변호했다가 죄에 걸려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었으니, 사문(斯文)을 보위하고 세도(世道)를 다행스럽게 한 것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사대부(士大夫)들이 공을 아는 이건, 모르는 이건 간에 모두 훌륭하게 여겨 감탄하면서「명망 높은 할아버지의 기풍이 있다.」고들 하였다. 나는 항상 공의 의리를 사모하면서 한 번도 공의 얼굴을 친히 접해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왔는데, 지금 공의 아들 중협(重協)이 공의 묘도문(墓道文)을 나에게 부탁하니,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행장(行狀)을 상고하건대, 공의 자(字)는 문보(文甫)이며, 계림(鷄林 경주(慶州))의 드러난 성씨로서 신라(新羅)의 개국 공신(開國功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시호가 정순(靖順)인 휘 성중(誠中)이란 분이 백형(伯兄)인 정승(政丞) 경중(敬中), 중형(仲兄)인 제정(霽亭) 달충(達衷), 종숙(從叔)인 익재(益齋) 제현(齊賢)과 함께 모두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후 대대로 관록(官祿)이 끊이지 않았는데, 휘 난(鸞)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휘 유일(惟一)은 판관(判官)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이분들이 바로 공의 고조와 증조 양세(兩世)이다.

 

간옹의 휘는 익(瀷)인데,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지평(持平)ㆍ헌납(獻納)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장령(掌令)으로 벼슬을 마쳤으며, 고(考) 휘 인실(仁實)은 진사(進士)로 벼슬하기 시작하여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로 벼슬을 마쳤다.

 

비(妣) 숙인(淑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 지평을 지내고 호조 판서에 추증된 월성군(月城君) 원량(元亮)의 딸인데, 병술년 8월 1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번거롭게 가르치고 감독하지 않았고 학업이 날로 진취되었으며, 시(詩)에 더욱 뛰어나서 한때에 동류들에게 추앙(推仰)되었다.

 

무신년과 을묘년에 두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각각 예(禮)대로 상사(喪事)를 치렀다. 정묘 년에는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가 되었으나, 이로부터 과거 공부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서 광릉(廣陵)의 갈피(葛陂)에 땅을 가려 집을 짓고는 날마다

 

그 안에서 시(詩)를 읊조리며 지냈다. 그 집 앞에 회(檜)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므로 그 밑을 깨끗이 손질하여 단(壇)을 쌓고 자리를 베푼 뒤 손님이 오면 함께 앉아 이야기하고 시를 지으면서 하루 해를 마칠 뿐이었다.


그 뒤 기사년에 죄에 걸려 유배될 적에는 마치 운명인양 편안하게 여겨 조금도 언짢은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해 가을에 마침 큰 가뭄으로 인해 석방되어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벼슬길에 자취를 끊고 문을 닫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세상에 나가 일할 뜻이 더욱 없었다.

 

그후 마침내 충주(忠州)의 선영(先塋) 아래로 옮겨 가 살면서 오직 여러 자식들에게 학문을 강수(講授)하는 것만을 일삼았고,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서 왔다갔다 배회하며, 도를 즐기면서 자신이 늙는 줄도 모르는 뜻이 있었다. 갑술년 1월 26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는데, 향년이 49세였다.


배(配) 공인(恭人)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좌랑(佐郞) 진원(振元)의 딸로 정숙하고 조용하고 인자하여 매우 부인(婦人)의 행검이 있었는데, 공의 초상 때 지나치게 슬퍼하여 몹시 야윈 것이 병이 되어 3년 뒤인 병자년 7월 5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5세였다.


공은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중국(重國)은 원명세(元鳴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의 백형인 통덕랑(通德郞) 휘 정(炡)의 후사로 출계하였는데, 공보다 1년 앞서 요절하였고, 딸은 계년(笄年 비녀 꽂을 나이, 즉 15세임)도 못 되어 공보다 1년 뒤에 요절하였으며, 차남은 곧 알문(謁文)이란 사람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금 수찬(修撰)으로 있는데, 대사간(大司諫) 홍우령(洪禹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공을 처음에는 충주의 선영 아래 장사 지내고 부인의 묘를 왼쪽에 합장했다가 뒤에 모군(某郡) 모향(某向)의 언덕에 옮겨 장사 지냈다.


공은 자품이 온화하고 후중하며 인품이 화평하고 순수하였는데, 친척들을 지성으로 구제하였고 친구 간에 신의가 있었으며, 사람을 접대하는 데에도 성의가 넘쳐 흘렀다. 공이 단천(端川)에 귀양 가 있을 적에는 북쪽 지방 인사(人士)들이 많이 공을 종유하여 배웠는데, 공의 상을 당해서는 그들 중에 최복(縗服)을 입고 삼년상을 마친 자도 있었다.

 

공이 평소에는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이 많지 않고 말수도 드물며 겸손하고 유순함이 마치 문을 반쯤 여는 처자(處子)와 같았으나, 대절(大節)에 임하여 대의(大義)를 지키는 때에 이르러서는 비록 맹분(孟賁)ㆍ하육(夏育) 같은 역사(力士)라도 그의 지조를 빼앗을 수 없었으니, 기사년의 일에서 보면 그 일단(一端)을 알 수 있다.


아, 공의 수립한 것이 이미 내력이 있고, 또 훌륭한 아들이 가학(家學)을 잘 이어서 젊은 나이로 벼슬에 올라 선비들의 기대가 대단하니, 공이 복을 다 누리지 않은 보답이 반드시 장차 후일의 경사에서 크게 발휘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손자가 할아버지 공적 이어 의리가 추상 같으니 / 孫繩祖武義秋霜
사류들이 흠송하여 그 성명 향기롭고 / 士流欽誦姓名香
대대로 바른 학문 전해서 옥서의 낭관 나왔기에 / 家傳正學玉署郞
내가 그 대강 간추리니 그 광채 무궁하리라 / 我撮其槩昭無央

 

[자료문헌]

 서암집(恕菴集) >恕菴集卷之十五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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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成均進士李公墓誌銘

 

公諱炳。字文甫。李氏系出慶州。始祖諱謁平。佐新羅太祖。有開國勳。至麗季。三世大顯。入我朝。有諱誠中。以寶文閣大提學。爲左議政。謚曰靖順。與伯兄政丞敬中,仲兄霽亭達衷,從叔益齋齊賢。以文章德業名。祖諱瀷。號艮翁。天啓壬子。連貫生進及第試三場。選翰苑陞正言。昏朝時。坐直言謫海島。仁廟改紀初。授持平,獻納。皆不就。卒官掌令。贈弘文館典翰。以亮節聞。考諱仁實。進士。筮仕歷金吾郞,京兆判官。卒官翊衛司司禦。妣淑人慶州金氏。靖社功臣持平贈戶曹判書月城君諱元亮之女。以丙戌八月十七日生公。司禦公有五子。公其第四也。司禦公鍾愛公。十二歲。始受學。公輒慧悟傍通。不煩長者口授。其才尤長於詩。初出試藝。輒占解。方弱冠時也。後再中解而不得第。丁卯。始登上庠。公則懶治程文。卜居於廣陵葛陂。終日闔戶讀離騷韓子等書有雙檜。築壇于下。日哦其間。客至。不說是非。唯談詩終晷而已。及至己巳姦壬當朝。安,李玄齡等紹述醜正之論。乘間投匭。牛栗兩先生黜文廡享。公慨然歎曰。斯文墜地矣。士其可默然退處乎。遂率畿輔儒生二百餘人。伏闕抗章。力辨其誣。言甚切直。凡再呈疏。而輒爲喉司所格。公遂叩閤呼曰。不意淸朝。復見指鹿之姦也。喉司大恚。遂捏奏于上而北遷之端川。命下之日。士大夫知與不知。皆涕洟相送。咨嗟歎息以爲艮翁有孫。秋。適大旱。公遇赦歸。則杜門家居。削迹場屋。已又挈家徙忠州先壠。築小室。日以講授諸子弟爲事。良辰美景。輒杖屨徜徉於山巓水涯。有樂而忘老之意。甲戌正月二十六日卒。享年四十九。公爲人醞藉和粹。雖處窮厄而不色。篤於故舊而洽於姻親。其謫居於端也。人士有來從學者。公一意誘掖。以至成才。及公喪。至有服衰三年者。平居。愼默不喜事。然當於爲義。輒以身任之。雖可以得禍者。無毫髮退步意。若己巳一事。亦可謂知所以用其勇。而其衛斯文而幸世道者。又豈淺尠哉。配恭人金氏。光山大姓八平章之裔。考禮曹佐郞振元。貞靜淑惠。甚有婦德。待宗族以誠。御婢媵以恩。組紝酒食。必親執之。公素有固窮節。實內助爲多。公喪。毁瘠成疾。後公三年丙子七月初五日卒。享年五十五。有二男一女。長男重國。娶元世鳴女。出後公伯兄通德郞諱炡。先公喪一年而夭。次女未笄。後公喪一年而夭。次男重協。文科侍講院司書。娶大司諫洪禹寧女。有二子二女。皆幼。始公喪。司書君纔十四歲。甫終喪而又居恭人憂。其震剝極矣。然後七年乙酉。司書君成進士。又八年癸巳。取增廣大科第二人。出入侍從。爲世所榮。於是論者謂爲公不食之報。而司書君所以立揚顯親者。於此爲無憾云。公初葬于忠州先兆內。恭人祔焉。後用堪輿家言。改卜於某所某向之原。司書君以靖夏忝有同硏契。以公事行徵銘於靖夏。靖夏不獲終辭。乃就其狀。識其大槩。用質于幽竁。銘曰。


斂而自守。處子其拙。一奮其勇。賁育莫奪。有蘊弗展。於理則愆。猶有嗣昌。不爲無天。 

 

[자료문헌]
서암집(恕菴集) >恕菴集卷之十五 >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