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공인 이씨 묘지명 / 다산 정약용의 맏형수.

야촌(1) 2010. 2. 19. 19:18

공인 이씨 묘지명(恭人李氏墓誌銘)

丁若鉉 配位/다산 정약용의 맏형수.

 

■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의 묘지명

 

정약용 찬(丁若鏞 撰)

 

용(鏞 : 丁若鏞)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연천현(漣川縣)으로 갔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선비(先妣) 숙인(淑人)이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형수와 저포(樗蒲)놀이를 하여 3이야 6이야 하며 그 즐거움이 융융하였다. 

 

수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용이 그때 겨우 9세였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고 때가 얼굴에 더덕 더덕 하였는데 형수가 날마다 힘들여 씻기고 빗질하였다.

 

그러나 용(鏞)은 또한 흔들며 벗어나고 형수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형수(兄嫂)는 빗는 빗과 세수대야를 들고 따라와서 어루만지며 씻으라고 사정하였다. 달아나면 잡기도 하고 울면 조롱도 하였다. 꾸짖고 놀려대는 소리가 뒤섞여 떠들썩하니 온 집안이 한바탕 웃고 모두들 용(鏞)을 밉살스럽게 여겼다.

 

형수(兄嫂 :李檗의 누이동생 )는 자성(姿性)이 헌걸차서 우뚝하기가 마치 장부와 같고 녹록(碌碌)하게 자잘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숙인(先淑人 : 정약용의 어머니)이 돌아가고 선군(先君) 또한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 살림은 더욱 쓸쓸하여 제수(祭需)와 닭ㆍ기장 따위의 음식 지공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형수(兄嫂)가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려갔다. 그래서 팔찌와 비녀 등의 패물을 모두 팔아 쓰고, 심지어는 솜을 두지 않은 바지로 겨울을 지냈으나 집안 식구들은 알지 못하였다. 지금 형편이 조금 피어 끼니는 이어나갈 만한데 형수(兄嫂)가 미처 누리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형수(兄嫂)의 성(性)은 이씨이니,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인데 시조(始祖)는 신라의 명신 휘 알평(謁平)이다. 뒤에 휘(諱) 정형(廷馨)이 있었는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 뒤 5대에 휘 달(鐽)이 있었는데 힘이 범을 잡을 수 있었고, 문사(文事)를 버리고 무과에 합격하여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諱) 보만(溥萬)을 낳았는데, 보만이 청주 한씨(淸州韓氏) 종해(宗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건륭(乾隆) 경오년(1750, 영조 26) 3월 24일에 형수(兄嫂)를 낳았다.

 

형수(兄嫂)는 겨우 15세가 되어 백씨(伯氏)에게 시집왔다. 경자년(1780, 정조 4)에 선군(先君 : 정약용의 아버지)을 따라 예천군(醴泉郡)에 가서 돌림병을 앓다가 죽으니 4월 15일이다. 충주(忠州) 하담(荷潭)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이는 우리 조부모와 부모의 묘역(墓域)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시어머니 섬기기 쉽지 않거니 / 事姑未易

계모인 시어머니는 더욱 어렵네 / 姑而繼母則難

 

시아버지 섬기기 쉽지 않거니 / 事舅未易

아내 없는 시아버지는 더욱 어렵네 / 舅而無妻則難

 

시숙 대우하기 쉽지 않거니 / 遇叔未易

어머니 없는 시숙은 더욱 어렵네 / 叔而無母則難

 

여기에서 유감없이 잘 하였으니 / 能於是無憾

이것이 형수의 너그러움일세 / 是惟丘嫂之寬

 

[주01] 신좌(辛坐) : 신방(辛方)을 등진 좌향. 곧 서북쪽을 등지고 정동으로부터 남쪽으로 15각도 안의 방향.

 

◇자료 : 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