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숙부인 이씨 묘지명 / 우참찬 이몽량의 세째딸

야촌(1) 2010. 2. 11. 20:55

■ 숙부인 이씨 묘지명(淑夫人李氏墓誌銘)    

   ※우참찬 몽량의 3녀임/백사 이항복의 누님

 

이항복 찬(李恒福 撰)

 

숙부인 이씨는 경주인(慶州人)인데, 신라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인 알평(謁平)의 후예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휘 몽량(夢亮)의 딸이며, 자헌대부 이조판서 눌헌(訥軒) 이 선생(李先生) 문강공(文剛公) 사균(思鈞)의 외증손(外曾孫)이다. 

 

여흥 민씨(驪興閔氏)에게 시집가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세량(世良)의 며느리가 되고 승정원 좌승지 선(善)의 아내가 되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은 숭록대부(崇祿大夫)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아내가 되어 아들 미(瀰)를 낳았는바, 미는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위(錦陽尉)가 되었고, 딸 하나는 진사(進士) 이명한(李明漢)의 아내가 되었으며, 나머지 두 남녀는 어리다.

 

처음에 부인(夫人)의 어머니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최씨(崔氏)는 눌헌의 부인 황씨(黃氏)에게 외손녀가 되는데, 막 나서부터 현덕(賢德)이 있었으므로, 부인이 여러 손자들과 달리 특별히 사랑하였다. 자라서는 참찬공(參贊公)에게 시집가서 가정(嘉靖) 계묘년 10월 초하룻날에 부인을 낳았는데, 부인이 품안에 있을 적에 황 부인이 날마다 세 번씩 물어 보았고, 태어난 지 한 돌이 되어서는 문득 부인을 데려다가 길렀다.

 

부인은 말을 하기도 전에 맑은 광채가 이미 사람을 쏘아 비췄고, 조금 자라서는 두각(頭角)이 더욱 뛰어났다. 나이 8, 9세에 미쳐서는 부의(婦儀)와 여공(女紅)을 배우지 않고도 잘 하였으므로, 바느질을 해 놓으면 손으로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황 부인이 장주(掌珠)처럼 놀리면서 차마 하루도 무릎에서 떼놓지 못하여 마지않았고, 항상 부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머리를 기울여 입가에 가까이 대고 이르기를,「우리 손녀를 얻어가는 자는 집을 보존하는 주인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때 대승선(大承宣)이 작고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심 부인(沈夫人)이 홀로되어 또한 심씨(沈氏)의 제사를 맡았었으므로, 두 집의 조천(祧遷)되지 않은 신주(神主)를 두 사당에 다 모시었다. 그리고 가업(家業)이 넉넉하였으므로, 심 부인이 중대한 종사(宗祀)와 많은 노비(奴婢)들을 생각하여, 한 아들의 재주를 어질게 여기고 그에 걸맞는 훌륭한 배필을 구하여 마침내 부인에게 장가를 들였다.

 

부인은 이때에 나이 12세였으니,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한창 죽마(竹馬)나 타고 모래장난이나 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터인데, 부인은 예(禮)로써 몸을 스스로 단속하였으므로, 문(門)에 들어가면 비어(婢御)들이 서로 놀라고, 당(堂)에 올라가면 황고(皇姑)가 기뻐하여, 며느리의 도리와 아내의 도리가 모두 의식에 맞아서 50여년 동안 가정을 화목하고 즐겁게 꾸려나갔다.

 

민승선(閔承宣)이 무신년 10월에 나이 70세로 작고하였는데, 그로부터 5년 뒤인 임자년 7월에 부인 또한 70세로 작고하여 9월 모일(某日)에 파주(坡州)에 부장(祔葬)하였다. 참찬공이 두 번 장가들어 모두 4남 5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최씨(夢亮의 繼配)에게 장녀가 되고, 가장 막내가 항복(恒福)이다. 

 

항복이 막 나서는 젖이 떨어져 부인에게서 젖을 먹었고, 젊어서는 부모를 여의고 부인에게서 의식(衣食)을 제공받았으며, 늙어서는 문정(門停)이 서로 연하여 부인을 조석으로 뵈었는데, 죽는 것은 먼저하지 못하여 부인에게 명사(銘辭)를 부치게 되었다. 지석(誌石)에 글을 새겨 영구히 전하려 하노니, 이것을 차마 한단 말인가. 이것을 명으로 삼노라.

 

자료 : 백사집 제3권 >묘지(墓誌)

 

※ 대승선(大承宣) : 승선은 승지(承旨)의 별칭이니, 즉 민세량(閔世良)과 민선(閔善) 부자(父子)가 모두 좌승지(左承旨)를 지냈으므로, 여기서 대승선은 곧 아버지인 민세량을 가리킨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