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계림 부원군 양희공 묘갈명(鷄林 府院君 襄僖公 墓碣銘)

야촌(1) 2008. 12. 14. 10:15

■ 계림 부원군 양희공 묘갈명(鷄林 府院君 襄僖公 墓碣銘)

    ◇국당공 후 제정공의 손자임(20世)

 

경기도 광주 산중에 신좌(辛坐)의 무덤이 있으니 이것이 곧 고 천관 태재(天官太宰 : 이조 판서) 이공의 묘소다

비(碑)가 오래 되어 글자가 망가저서 후세에 알려 줄 수가 없다. 후손 정호(靖浩). 보영(普榮). 동영(東榮). 세영(世榮) 등이 비를 다시 세워 각을 하려 하여 가승과 오랜 기록을 상고하여 변변치 못한 나에게 명을 청하여 왔다. 사양할 수도 없었다.

 

살펴 보건데 공의 이름은 흥적(興啇)이고, 자는 자연(子衍)이고 호는 겸탄(謙灘)이다.

신라 원훈(元勳) 알평(謁平)은 경주 이씨의 시조이다. 신라로 이어서 고려조가 들어선 뒤에 이름 있는 공경이 번갈아 일어났으니 평리(評理)로서 증직이 상서 좌복야(尙書 左僕射)인 핵(翮)과 대제학 문희공(文僖公) 세기(世基)는 공에게 五대조와 四대조(고조)가 된다.

 

증조 천(蒨)은 월성부원군으로 시호는 문효(文孝)이고 조부 달충(達衷)은 계림부원군으로 시호는 문정(文靖) 호는 제정(霽亭)이다. 부친 수(立+需)는 이조에 벼슬하여 강릉 도호부사를 지냈다. 판서와 계림군을 추증받았다.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妣) 정경부인(貞敬夫人)은 익산 이씨(益山李氏)니 정승 적(篴)의 따님 이시다. 홍무(洪武 : 明 태조의 연호) 二十三년(一三九o) 경오에 공이 출생하였다. 낳아서 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재능이 뛰어 났었다.

 

그러나 일찍이 환로에 나가서 출세하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이 많아서 관계에 이름을 걸게 되어서, 나가서 주(州)와 군(郡)을 다스렸다. 가는 곳마다 치적이 올랐다. 장천관(長天官 : 吏判)에 들어가서 품계가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올라갔다. 이어 이상[貳相 : 종一품의 우찬성(左右贊成)]을 말한다)을 제수받고, 훈공으로 계림 부원군에 봉하였다.

 

성화(成化 : 明 헌종의 연호) 을유(一四六五) 4월 2일에 하세하니 향년 76세였다. 부고가 임금에게 들리자 크게 슬퍼하고 증직을 규정에 따라 네렸다. 예조에서 그의 시법을 상의하여 양희(襄僖)라는 시호를 결정하였다.

 

지금으로부터 공의 세대까지 四백여 년이 된다. 문헌이 없어저서 징빙할 바가 없다.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린 업적이 봉군(封君)하고 관작을 네리고 사시(賜諡)한 연월일을 다 상고할 수가 없다. 단지 덜어저 나가고 뭉개진 옛 전기에 의하여 스스로 행하고 조정에 있을때, 족히 세상의 모범이 되어 풍속을 도야하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고 물건을 윤택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공의 배위는 여산송씨(礪山宋氏)니 판서 전(琠)의 따님이다. 정경 부인(貞敬夫人)을 봉하였다.

묘소는 인천 황등천 목과동(黃等川木果洞) 묘좌(卯坐)에 있다.(솔록으로 궐하였음) 명에 가로되

 

공로는 종묘와 사직에 있고

덕은 백성들에 미쳤도다.

아~은 나라 박(亳)에서 나은 상서로운 새여

나와서 후세에 전하지 못했구나.

 

무릇 모든 군자들이여

이 비를 보거든 경의를 표하라.

 

[자료문헌]

경주이씨 대동보 1권 총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