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領議政 雲谷 李光佐 墓表 陰記

야촌(1) 2008. 3. 10. 01:01

■ 영의정 운곡 묘표음기(領議政 雲谷 墓表陰記)

 

족질(族姪) 종성(宗城) 지음

 

선생의 성(姓)은 이(李)씨요, 휘(諱)는 광좌(光佐), 자(字)는 상보(尙輔), 호(號)는 운곡(雲谷),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양와선생(養窩先生) 휘 세구(世龜)의 아들로, 휘 항복(恒福)의 현손(玄孫)이요, 구당(久堂) 박 문효공(朴文孝公) 장원(長遠)의 외손이다.

 

갑술년(숙종 20, 1694)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뒤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역임하고, 이어 양전(兩銓)의 장관(長官)에 대제학(大提學)을 겸하였고, 계묘년(경종 3, 1723)에 정승(政丞: 우의정)이 되었다. 계축년(영조 9, 1733)에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수상(首相/領議政)이 된 것이 모두 세 번인데, 경신년(영조 16, 1740) 5월 26일에 졸(卒)하니 춘추(春秋)가 67세였다. 선생은 정대(正大)하고 빼어난 자질을 타고 난데다 연원(淵源)이 있는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함양(涵養)한 것이 많아 자부심이 컸다.

 

그 기상은 꿋꿋하고 웅대했으며 그 행동은 신중하면서 치밀하였다.집에 들어와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여 정성과 성실로 임금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덕망과 공업(功業)으로 조야(朝野)의 기대가 걸려 있어, 시종 한결같은 절의로 우뚝하게 빼어나 흔들림이 없었다.

 

비록, 참·소하는 말이 빗발치고 백가지로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捏造)하여 관직 자리가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지만, 오직 성상(聖上: 영조를 말한다.)께서만은 그 현능(賢能)함을 살피시어 중대사를 맡기시고 국가에 변고(變故)가 있을 때마다 선생에게 의지할 정도로 중하게 대우하였다.

 

갑진년(영조 즉위년, 1724)에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진정시킨 경우나 무신년(영조 4, 1728)의 역란(逆亂)을 평정할 때는 의리와 정성을 다하여 종묘와 사직이 공에게 의뢰함이 있었으니, 아! 아름답도다.

 

선생의 첫 배필인 풍산(豊山) 홍(洪) 씨는 판결사(判決事)만회(萬恢) 공의 따님인데, 갑신년(숙종 30, 1704)에 졸(卒)하여 <후일 선생의> 묘소에 부묘(祔墓: 옆에 묘를 씀)하였고, 계실(繼室: 두 번째 장가간 부인) 나주(羅州) 임(林) 씨는 사인(士人) 시(蓍)의 따님인데, 두 분 다 자녀가 없어 족자(族子: 친족의 아들) 종익(宗翼)을 데려다 후사(後嗣)를 삼았으니 진사(進士)이고, 서자(庶子)는 종인(宗仁)이다.

 

아, 산도 때로는 평탄해질 때도 있고, 돌도 때로 갈라질 때가 있지만 선생의 이름은 저 하늘이 다할 때까지 없어지지 않으리라. 이 봉황(鳳凰)이 와서 춤추는 양지바른 명당에 삼척(三尺)의 비갈(碑碣)을 세워 선생의 의극(衣屐)을 갈무리한 곳임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릇 상도(常道)를 지키는 자라면 감히 발길질하여 훼손하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