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창평 현령 이공 묘갈명(昌平縣令李公墓碣銘)

야촌(1) 2007. 9. 14. 21:45

■ 23世 창평 현령공 묘갈명(昌平縣令公墓碣銘)

    [생졸년] 1437년(세종 19) ~1509년(중종 4),

 

고령 신용개 지음(高靈 申用漑 撰)

 

공의 이름은 공린(公麟)이고 자(字)는 정수(禎叟)이다.

경주(慶州)의 저명한 성씨다. 육 대조(六代祖)는 제현(齊賢)인데, 호(號)는 익재(益齋)라고 불렀다.

고려조 때 귀히 되어, 벼슬이 시중(侍中)이다. 문장(文章)과 덕(德)과 사업이 아울러 한때에 높았다.

 

그 뒤로 부터 높은 벼슬이 계속되어 세상의 이름있는 가문(家門)이 되었다. 관찰사(觀察使) 윤인(尹仁)에 이르러 만호 홍중량(萬戶 洪仲良)의 따님과 혼인하여 공(公)을 낳았다. 홍씨(洪氏)역시 남양(南陽)의 문벌(文閥)있는 씨족이다.

 

공(公)이 성질이 순후(淳厚)하고, 근실(勤實) 하였다. 아름다운 자질을 가지고, 원대한 기품을 품고, 있었다. 병자(丙子 : 1456)에 나이 20세(世)로서 그의 장인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의 죄(罪)에 연좌(緣坐)되어 고폐(錮廢 : 금고하여 벼슬할수 있는 권리를 삭탈함)된 지가 거의 삼십년(三十年)이 되었다.

 

성종때 그의 모부인(母夫人 : 어머니), 홍씨(洪氏)를 절부(節婦 : 절개있는 부인)로 봉하고, 그 자제들을 등용 하도록 명하였다. 임인년(壬寅 : 1482)에 비로소 이름을 무반(武班)에 얹었다. 뒤에 추천되어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義 : 예의를 맡아보던 관아의 從六品 벼슬)겸, 한성부 참군(漢城府 參軍 : 한성부의 군사를 맡은 正七品 벼슬)이 되었다.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함열(咸悅)과, 창평(昌平)의 두 고을을 다스리는 현령이 되었다. 다 잘 다스려서 아전(衙前)은 두려워 하고, 백성은 따랐다. (손록은 궐 하였다 : 후손 기록은 생략함)

 

원(黿)은 좌랑(佐郞)이 되었더니 무오옥사(戊午 獄事 : 1498년 연산군의 무오사화 옥사)에 걸려서 귀양갔다. 갑자년(甲子年)에 이르러 정사(政事)가 더욱 난폭하여 그 죄를 추가하여 사형(死刑)에 처하였다.

 

부친(父親)과 형제(兄第)에게 자기의 죄가없이 모두 연좌(緣坐)되어 멀리 귀양 갔던 것이다. 공(公)도 이러한 관계로 창평 현령을 파직 당하고, 청주(淸州)로 귀양갔다. 삼년(三年)을 지나서 성상(聖上 : 중종)이 등극하매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관작을 주고, 귀양 보낸 사람은 석방하여 관작을 전(前)대로 회복시켜 주었다.

 

공(公)이 여러번 화(禍)를 겪었고 나이도 늙어서 스스로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원치 않고, 청주에 물러가서 한가하게 지냈다. 기사년(己巳年 : 1509)에 병으로 하세하였으니, 수(壽), 七十三世다. 윤구월(尹九月) 초하루 길일(吉日)에 주(州)의 동쪽 수락동(水落洞)에 안장 하였다.

 

여러 자제들이 서로 상의하고, 비를 세워 그 년대(年代), 덕행(德行), 계파(係派) 등을 표시하여, 자손(子孫)들에게 밝혀 주고자 하여 나 용개(用漑) 에게 명(銘)을 부탁하니, 내가 구(龜)씨와 원(黿)씨와는 마음을 서로 허락하여 형제 같은 처지다.

 

내가 공(公)을 당하(堂下 : 집 아래란 말로 겸손한 표현임),에서 뵙기 때문에 가장 믿을수 있고, 또 오래 되었다. 명(銘)에다, 사실을 적어서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것이다. 명(銘)에 가로되

 

몸에는 비색한 운을 만났으나

뒤(後) 자손들에게 넉넉히 하였네

착함에는 경사가 뒤 따르나니

난초와 구슬의 덤불이로다.

문벌의 큼이여

몰세하여 잊혀 지지 않나니

여기에 유택 정하여 놓고

영원히 길하고 편하게 보존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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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昌平縣令李公墓碣銘

 

公諱公麟。字禎叟。慶州著姓。六世祖齊賢。號益齋。貴顯高麗朝。官侍中。文章德業。高一代。自後貂蟬相繼。爲世名家。至觀察使尹仁。娶萬戶洪仲良女。生公。洪亦世族。君性淳愨。抱美質。有遠大氣。少連坐婦翁朴彭年罪。錮廢不得仕幾年。歲某甲。始筮名武班職。復薦爲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出宰咸悅,昌平。皆有善政。吏畏民懷。有八男。鼇,龜,黿,鼉,鼈,鼊,鯁,鯤。皆才子也。鼇魁進士。與龜,黿皆中文科。鼇爲佐郞。龜官沔川郡守。黿爲禮曹佐郞。鼉,鼈,鼊皆中司馬試。鯁,鯤亦學成。黿罹戊午獄竄外。甲子虐政。追加其罪。置之死。非其辜。幷坐父及兄弟。配諸遠外。公以是罷昌平。謫海南三年。遇聖主登極。哀冤死者。贈之官。放還流人。復其爵。公以累經禍患。年且老。不欲官于朝。退閑淸州舍。至某甲病逝。享年幾。是年某月日。葬于某地。諸子相與謀豎碣。表其年德系派。昭諸後。屬用漑爲銘。用漑與龜,黿氏心相許。約爲兄弟親。拜公堂下。最信且久。銘以紀實。所不敢辭。銘曰。

嗇於己。而豐於後。善有慶。蘭玉之藪。門之大。歿而不亡。宅于斯。永保吉康。

 

출처 : 申用漑 著 二樂亭集卷之十五 / 碑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