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야촌(1) 2010. 9. 15. 09:39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4호] 20090308 입력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④날개 꺾인 소현세자

 

모든 역사에는 음양이 공존한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자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개방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이어서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사적 제200호로 지정됐으나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정묘호란 때인 인조 5년(1627) 1월 만 15세의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로 향했다.

능한(凌漢)산성을 함락당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하면서 세자를 전주로 보낸 것이다.

 

정묘약조 체결 후 상경한 세자는 그해 11월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혼인했다.

그해 12월 4일 인조는 숭정전(崇政殿)에 나가 세자빈 책봉례를 행했다. 긴 악연(惡緣)의 시작이었다.

 

세자와 강빈(姜嬪)은 전운이 감돌던 인조 14년(1636:병자년) 3월 원손(元孫)을 낳았고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세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인조는 12월 17일 홍서봉을 청군 진영으로 보내 강화 협상을 지시하면서 “먼저 전날의 실수를 사과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전날 능봉군(綾峯君) 이칭(李稱)을 인조의 동생이라고 속여 강화 대표로 보냈으나 사실이 탄로나 함께 갔던 무신 박난영(朴蘭英)이 청군에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정묘호란 때도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를 왕제(王弟)라고 속여 후금군 진영에 보낸 적이 있었다.

 

청장(淸將)이 “너의 나라(爾國)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번에는 진짜 왕제인가?”라고 추궁한 결과 가짜임이 드러난 것이다. 청군은 강화 대표로 세자를 요구했는데, 인조는 전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보내면서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동궁(東宮:세자)을 청한다 한들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인조실록』은 “이때 세자가 상(上:성상)의 곁에 있다가 오열을 참지 못해 문 밖으로 나갔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강화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조선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나 세자 자신이 비국(備局:비변사)에 봉서(封書)를 내려 결자해지(結者解之)했다. 세자는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인조실록』 15년 1월 22일)라면서 인질을 자청했다.

 

청이 육경(六卿:판서)의 아들까지 인질로 요구하자 강화 대표의 한 명이던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병을 핑계로 사직해 인질을 피하려는 상황에서 나온 자기희생의 결단이었다.


인조 15년(1637) 4월 세자는 개국 이래 처음 인질로 끌려갔다. 세자 일행은 조선관(朝鮮館)이라고도 불린 심양관(瀋陽館)에서 거주했는데, 정조 14년(1790) 부사로 다녀온 서호수(徐浩修)의『연행기(燕行紀)』는 심양성 동쪽에 조선관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명·청(明淸) 교체기라는 대륙 정세의 변화 한가운데에서 소현세자는 한편으로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종일관 조선의 국익을 지켜냈다. 청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해야 했으며, 반청 행위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보호해야 했다.


심양 남탑(南塔) 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도 있었다. 소현세자 측에서 조정에 보고한 『심양장계(瀋陽狀啓)』 인조 15년 5월조는 ‘조선 노예들의 속환가(贖還價)가 수백,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전한다.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했던 심양관의 유지 비용도 큰 문제였다.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근처 4곳에 모두 600일갈이(하루갈이는 장정이 하루에 갈 수 있는 면적)의 농토를 제공했다. 조선 측은 ‘세자를 영구히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라며 거부했으나 세자는 이를 받아들여 농사를 지었다. 『심양장계』는 인조 20년에 3319석을 거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는 이 곡식으로 포로로 끌려간 조선사람들을 속환시켜 농사를 지었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곡식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심양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인조 22년(1644) 3월 역졸(驛卒) 출신의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은 목매어 자결했다. 총병(摠兵) 오삼계(吳三桂)가 지키는 산해관의 병력이 명(明)의 마지막 무력이었다.

 

『청사고(淸史稿)』 세조 본기는 “(북경 함락 소식을 들은) 오삼계가 사신을 보내 군사를 동원해 적(賊:이자성)을 토벌하자고 청했다”고 전한다. 청의 섭정왕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은 “인의(仁義)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명목은 연합군이었으나 오삼계가 성을 나와 항복서를 바친 데서 알 수 있듯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다이곤은 북경으로 남하하면서 명의 멸망을 목도시킬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대동했다.

 

인조 22년(1644) 4월 산해관을 떠난 청군은 질풍노도의 속도로 한 달 만에 북경에 입성했고 이자성은 도주했다. 세자는 일단 심양으로 되돌아갔다 그해 9월 다시 북경에 와서 약 70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 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 사상의 큰 변화를 겪는다. 세자는 성리학 이외에 서학(西學)이란 사상과 서양이란 문명세계의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세자는 성리학만이 조선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북경 남(南)천주당의 신부였던 황비묵(黃斐묵)은 그의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세자와 아담 샬의 교류를 전하면서 “세자가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 갔고 샬 신부도 자주 세자의 관사를 찾아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두 사람은 깊이 뜻을 같이했다”고 전한다.


그해 9월 북경을 수도로 정한 청나라는 더 이상 인질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조 23년(1645) 2월 세자는 만 8년 만에 영구 귀국길에 올랐다. 세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 해 전인 인조 22년(1644) 정월 장인 강석기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인조가 냉담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빈소에 왕곡(往哭)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전례가 있었다.

 

인조는 세자가 청의 힘으로 국왕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의심했다.
인조 22년 3월 세자가 청으로 돌아간 직후 반정 1등 공신 심기원(沈器遠)은 군사를 일으켜 인조를 축출하려 했다.

 

심기원은 ‘인조가 반정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추존하여 상왕(上王)으로 삼고 세자에게 전위(傳位)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심기원은 호란 이후 인조가 청에 유화적이어서 불만을 품은 것인데, 실제로는 ‘세자를 받들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려 했다.

 

회은군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잡힌 15세의 딸이 청 황실의 시녀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광해군에게 향했던 칼날이 자칫 인조에게 향할 뻔한 일이었다. 심기원 등은 사형당했으나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심기원이 세자를 추대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세자의 귀국을 환영할 리 없었다.

 

인조는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조차 막을 정도로 냉대했다.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학질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가 발병 사흘 만에 급서했다.

 

34세의 건장한 세자가 급서하자 독살설이 잇따랐다. 『인조실록』의 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외인(外人)들은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인조는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을 비호했고, 장례도 박하게 치렀다.

 

세자의 후사도 종법과 달리 아들이 아니라 동생으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인조가 몰랐다고 볼 수는 없다.

소현세자가 즉위하여 새로운 사상에 기반한 현실적 개혁정책을 펼쳤다면 인조반정으로 야기된 모든 내란과 외환은 새 시대의 출산을 위한 산고쯤으로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세자를 죽인 칼날은 부인 강빈과 그 아들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