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 702

연암 박지원 초상화(燕巖 朴趾源 肖像畵)

연암 박지원 초상화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1805년(순조 5). 12월 10일(음력 10월 20일)」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필균(弼均)이고,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황해북도 개성시 은덕동의 황토고개 남쪽 기슭에 있는 그의 무덤이다. 일제의 탄압말살정책으로 그의 무덤도 행처를 모르다가 1959년에 묘지명이 발견되어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2011년도에 북측에서 다시 조성되었다. ▲연암 박지원 묘(燕巖 朴趾源 墓),

숙녕옹주(淑寧翁主) - 조선 제17대 효종의 서녀

■숙녕옹주(淑寧翁主) 1649년(인조 27)∼1668년(현종 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선 제17대왕 효종(孝宗)의 서녀로 어머니는 안빈 경주이씨(安嬪 慶州李氏)이다. 유학(幼學) 박태장(朴泰長)의 아들인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하가하였다. 반남인(潘南人) 박필성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두었다. 옹주는 나이 20세에 천연두(天然痘=痘患)로 요절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돈녕보첩(敦寧譜牒)-2009년 3월 조선시대사학회 간행.

박필성(朴弼成) - 조선 제17대왕 효종의 사위

■ 박필성(朴弼成) [자(字)] 자는 사홍(士弘), [호(號) 설송재(雪松齋). [생년] 1652년(효종 3) [졸년] 1747년(연조 23) 壽96歲 [본관] 반남(潘南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아버지] 도정(都正) 박태장(朴泰長) ---------------------------------------------------------------------------------------------------------------------------------------------------------------- 조선후기 사은사, 주청사, 영릉도위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홍(士弘), 호는 설송재(雪松齋). 아버지는 도정(都正) 박태장(朴泰長)이다. 공(公)은 효종의 사위..

1.21 사태 - 남파 공작원 31명 청와대 습격 사건

1.21 사태 - 남파 공작원 31명 청와대 습격 사건 1968년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124군 부대. 영하 25도로 떨어진 초강추위 속에 남파 특수공작원 31명을 태운 버스가 어둠을 타고 부대를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개성 남동부에 위치한 남파 공작원 초대소였다. ⓒAP 얼어붙은 표정의 20대 초중반의 청년 장교들은 24kg에 달하는 꽉 찬 배낭을 저마다 하나씩 둘러멨다. 모두가 하사관에서 하루아침에 소위로 임관되는 파격적인 계급 승진을 며칠 전 경험한 뒤였다. 그중 2명은 대위와 중위로 승진했다. 배낭 내용물은 다양했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 벌,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 스터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이순자 여사의 회고록 -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작성일 : 2007. 04. 10 ■ 이순자 여사 회고록 "청와대에서 살아나가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 6·29를 추억함 6·29를 추억해야 하는 시간의 모퉁이에 기대앉아 6·29는 과연 그분(全斗煥 전대통령 지칭―편집자) 통치 7년반 세월중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추해 본다.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해도 6·29선언은 그분 통치의 꽃이다. 6·29는 그분에게 있어 권력으로부터의 하산작업의 절정이다. 자신이 서 있던 권력정상에 후계자를 남겨두고, 권력의 휘장 밖으로 단숨에 퇴장했던 정치드라마의 백미(白眉)이다. 난 6·29에 대한 추억을 1987년 4월 무렵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그날, 그분은 개헌논의를 중단한다는 가슴아픈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개헌작업은 좌초하고 있다. 그분 임기가 꼭 열 달 남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