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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자 여사의 회고록 -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야촌(1) 2020. 12. 9. 03:07

작성일 : 2007. 04. 10

 

■ 이순자 여사 회고록
     "청와대에서 살아나가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 6·29를 추억함

6·29를 추억해야 하는 시간의 모퉁이에 기대앉아 6·29는 과연 그분(全斗煥 전대통령 지칭―편집자) 통치 7년반 세월중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추해 본다.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해도 6·29선언은 그분 통치의 꽃이다. 6·29는 그분에게 있어 권력으로부터의 하산작업의 절정이다. 자신이 서 있던 권력정상에 후계자를 남겨두고, 권력의 휘장 밖으로 단숨에 퇴장했던 정치드라마의 백미(白眉)이다.

 

난 6·29에 대한 추억을 1987년 4월 무렵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그날, 그분은 개헌논의를 중단한다는 가슴아픈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개헌작업은 좌초하고 있다. 그분 임기가 꼭 열 달 남았을 때, 난 바로 그 열 달이 지금까지 지내온 6년의 시간보다 더 힘든 기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살 같지만 그분은 그 열 달 동안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었고, 경험하려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알려지지 않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가야만 했다. 무엇이든 처음이 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흉내내거나 빌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미지의 대격변에 내맡김으로써 이제까지 경험되지 않은 낯설고 그래서 두려운 도전을 해보려고 하는 강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길은 도무지 안전하지 않다」.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신에게 보장된 안전과 안일을 포기하고 새로운 가치를 향해 나가겠다는 야심과 사명감이 없는 한, 아무도 그 길의 첫 탐험자가 되기 위해 행장을 꾸리지는 않는다. 유럽순방에서 돌아왔을 때 그분은 활기에 차 있었다.

 

1980년대 한국이라는 그 시간대 그 상황 속에서 정치발전을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양보할 수 있다는, 심리적 도약이 그분 내부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난 심리적 도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시절 그분 내부에 일어나고 있는 분명한 변화를 표현하려는 내 의욕을 말해준다.

 

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수백년 시간을 담보로, 숙성된 정치를 누리고 있었다. 시간의 힘이 숨어있는 잘 숙성된 포도주처럼. 완전할 수 없는 것이 정치현실이라고들 하지만 유럽정치의 향기가 그분을 새로운 희망, 새로운 역사 속으로 급하게 몰아붙였다. 우리 정치 속에도 올바른 향기를 불어넣고 싶다는 간절함이 그분의 평화적 단임의지와 행복한 합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임기 첫 날부터 마지막 날 준비한 운명

열 달이라는 똑같은 시간 앞에서 그분과, 내가 시간을 보는 심정은 달랐다. 아직 열 달이나 남아 있는데도 내 마음은 벌써 화살처럼 끝나는 날을 향해 날았다.

 

그러나 그분 처지는 달랐다. 후임자를 선정해야 하는 전임자 최고의 어려운 통과의례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계자 문제 외에도 세 가지 일이 그분의 헌신적 노고를 여전히 요구하고 있었다. 성공적 올림픽을 위한 준비, 흑자가 시작된 세계 무역시장에 계속적인 활기를 불어 넣는 일, 권력이양기에 초래될 해이감을 견제하는 일들이었다.

 

처음으로 시작된 흑자경제 소식은 그야말로 낭보였다. 그동안 흑자를 위한 엄청난 노고가 있었음을 나는 안다. 그러나 모든 노고가 다 좋은 결실로 보답되지는 않는다. 수천 가지 변수가 잠복해 있는 세계무역시장은 더욱 그렇다.

 

권력이양도, 정치적 진보의 꿈도 건강한 경제라는 후견인이 필요한 드라마였다. 숨이 차도록 추구해온 세 가지 과제, 민주주의, 선진경제, 통일도 돈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것이 바로 경제의 힘이 가지는 고유한 마력 아닌가. 무역흑자의 시작은 그런 의미에서 그분에겐 가슴을 때리는 낭보였다.

 

또 하나의 행운이 있었다. 임기를 열 달 남겨둔 그 시간, 그분의 심중에는 이미 후계자에 대한 요지부동의 초상이 간직되고 있었다. 권력의 속성상 후계자 문제는 냉혹하고 비정하게 다루어지기 마련 아닌가.

 

평화적 정권교체는 제5공화국이 닻을 올리면서 함께 내놓은 출발음이다. 그 첫 마디, 그 첫공약이 제5공화국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다. 말하자면 그분은 임기 첫날부터 임기 마지막날을 준비하고 살아야 했던 셈이다. 그분 스스로 선택한 제5공화국의 사명이고, 족쇄이고, 운명이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분은 예상보다 일찍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곁에서 보고 있으면 권력이란 진실로 번개같은 영광이다.

 

그분 심중에서 동지 노태우가 후계자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그 구체적 시간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들은 사람의 순수한 영혼과 정열이 세파에 물들지 않았던 청년기에 만났다. 우정은 수십년간 계속된다. 운명적인 몇몇 사건들이 그들의 관계를 친구에서 동지로 승화시켰다.

 

내가 친구 노태우를 동지 노태우라고 쓰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수십년간 그들은 언제나 같은 세계, 같은 웅지, 같은 시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운명의 물결에 휩쓸렸을 때 같은 배를 타고 표류했고 함께 권력 심장부에 착륙했다. 이것이 그들의 40년 우정의 여로였다.

 

권력 앞에서는 우정과 의리도 무력해져

친구이며 동지인 노태우를 서슴없이 심중의 후계자로 선택했을 때 그분은 알고나 있었을까. 우리 정치사에 또하나의 우연한 운명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대통령이 되기 직전 나라의 공복으로 그분이 했던 마지막 일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책임이었다. 사건종결 후 남겨진 것은 권력 앞에선 웬일인 지 우정도 신의도 눈이 먼다는 옛 경구의 확인이었다.

 

박대통령과 가해자 김재규는 동향에 동기생이었다. 박대통령이 동향이며 동기생인 김재규에게 쏟은 우의와 신뢰는 깊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관계가 만들어낸 것은 배신과 죽음이었다.

 

그분은 그 사건의 수사 담당자였고 그 사건을 통해 박대통령의 후임자가 되는 운명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제 박대통령이 동향이며 동기생인 김재규에게 가장 큰 신뢰와 중책을 맡겼듯이, 그분도 동향이며 동기생인 노태우에게 최고의 중책을 맡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 의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동향이나 동기생에겐 절대 권력을 넘겨주어선 안된다고 말했다. 박대통령과 김재규가 만들어낸 비정한 선례는 외국정치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상습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바위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권력 앞에서는 우정도 의리도 변질되고야 만다는 권력의 속성, 권력의 운명을 그분은 믿지 않았다. 권력 계승에 대한 그 비정한 정설은, 통속적인 우정이 만들어낸 통속적인 실패로 간주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통속적이 아니라고 그분은 굳게 믿고 있었다. 적어도 그분은 40년간 자신과 노태우 사이에 깃든 우정은 통속적인 것과는 다른 뜨겁고, 순수하고, 고유하고, 가치있고, 멋진 그 무엇이라고 자신했던 것 같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흐르는 우정에 대해 이 정도의 믿음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논평의 여지가 없다.

 

권력 앞에서는 우정도 의리도 무력해져버린다는 정설을, 그분은 바로 그 우정의 자부심으로 무력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탄탄하고 견고한 불변의 것이라고 믿었고 그 우정 속에서 나라를 위한 새로운 차원의 눈부신 그 무엇이 터져나올 것이라고 그분은 확신했다.

 

그분 가슴 속의 우정의 불꽃은 그렇게 건강하고 맹렬했고, 누가 뭐라고 해도 견고하고 찬란한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후계자 노태우에 대한 수많은 견제와 모략이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이성적으로, 때로는 참 저돌적인 모습으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한 견제와 모략이, 단 한번도 그분 내부에 간직된 친구 노태우에 대한 신뢰의 초상을 흔들리게 한 적이 없었다. 한 번 사람을 믿으면 끝까지 믿는 것이 그분의 성품이긴 했지만 노태우에 대한 그분의 신뢰는 너무나 각별해서 지금도 그 두 사람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되고 있을 정도이다.

 

나는 친구 노태우가 그분 심중에 후계자로서 자리잡았을 때, 노태우는 이미 그분 친구로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헌신할 정치적 2세로서 그분 내부에서 완성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무 준비도, 예고도 없이 어느날 문득 대통령이 되어야 했던 경험 때문에 자신의 후계자에게만은 준비없이 그 자리를 맡아 자신이 겪어야 했던 대격변, 긴장, 시행착오, 힘겨운 의무감 같은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 그분 소망이었으리라.

 

준비없이 맡겨진 중책으로 인해 그분은 얼마나 많은 긴장과 불안, 그리고 힘에 부친 능력을 요구받았는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후계자에 대한 그분 배려는 그처럼 눈물겨운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임기내내 그분은 자신의 후임자에게 적절한 경험과 경륜을 쌓게 하고, 자질을 기를 수 있게 해주려고 의도적으로 애를 쓴 섬세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재임기간 동안 그분이 후임자 노태우에게 맡겨준 역할과 경력이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노태우는 예편과 동시에 정무제2장관이라는 중책을 맡아 나랏일을 배우고 있다.

올림픽 유치에 성공을 거두자마자 그분은 신설된 첫 체육부장관에 그를 임명한다. 체육부장관을 거친 그는 내무부장관도 맡고 있다.

 

83년이되자 그는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조직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그에게 또다시 그 중요한 일을 맡기던 날 그분이 내게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그 어떤 국정경험도 없이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요. 노태우에겐 그런 고생 시키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요직을 거치게 한 다음 내무부장관을 시켰더니, 내무부엔 산하기관이 많고,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큰일인데다.

 

또 아부꾼들이 몰려 제2인자라고 야단들이니 정말 정성들여 조심스럽게 키워주기도 여간 힘드는 게 아닙디다. 이젠 웬만큼 국내정치 경험을 얻게 했으니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고, 또 국제감각도 익히게 해야할 것 같아 올림픽조직위원장직을 맡기게 된 것이지요』

 

후임자 노태우에게 그분은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 국정경험의 깊이를 주고 있다.

성급한 표현을 한다면 그분은 후임자 노태우에게 구체적이고도 치밀한 대통령수업을 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 치밀한 보살핌은 그분의 임기 내내 계속된다.

그분은 노태우를 단지 심중의 후계자로 선택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분은 그에게 자신에게선 결핍되었던 치명적인 부분들을 메워 줌으로써 자신을 뛰어넘는, 자신보다 더 유능하고, 더 복많은 대통령이 되길 원했다. 그것은 생각만해도 환상적인 팀워크이다.

 

임기 동안 나라를 위해 전력투구했고, 못다한 일은 유능한 후임자가 똑같은 전력투구로 그 일을 완성시켜줌으로써, 나라 중흥에 구체적이고 눈부신 불꽃을 일으키게 하고 싶어 한 그 감미로운 꿈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분에게는 가장 지고한 의미의 우정과 신의의 완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분의 이 지성어린 배려에 후임자 노태우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권력앞에서도 버텨낼 우정의 힘을 그분은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분 행운이고 미덕이었다.

실망이나 배신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신앙처럼 후계자를 믿고 가꿔갔다.

권력앞에선 우정도 속수무책이라는 통속적 발언은, 그분의 순수 앞에서 그렇게 나가 떨어지고 있다.

 

너무 자주 단임의지 밝혀 후회

1987년 6월 2일.

 

그날밤, 그분은 청와대경내 상춘재로 중요한 손님을 초청했다.

 

전통한옥인 이 상춘재에 그분은 역사적인 한 의식, 한 절차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후계자 노태우를 대통령후보로 추천하는 의식이었다. 이 추천의식은 한시간 반동안 진행됐다. 이 의식을 통해 당시 민정당대표였던 노태우는 대통령후보로 정식 추대되었다.

 

손님들을 보내고 본관으로 돌아온 그분의 모습은 상기돼 있었다.

『난 결국 해냈소. 내년이면 난 청와대를 떠날 수 있게 됐단 말이오』

이 일성은 중요하다.

 

공식적으로 후임자를 결정한 후 집으로 돌아와 그분이 아내인 내게 쏟아놓은 이 일성은 진실로 중요하다. 그날 우리 두 부부가 마주서서 나눌 수 있었던 그 첫마디는 정말로 소중하다. 아무나 청와대를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수립 이후 그날까지 한국의 현대정치사는 청와대를 정상적으로 떠나지 못한 지도자들로 몸살을 앓아왔다.

공화국 탄생 후 42년짜리 몸살이었다.

 

청와대에 들어온 사람이면 누구나 애국심에 잠 못 이루고 유종의 미를 이루어내겠다고 결심했겠지만, 그러나 제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며 청와대를 떠난 사람은 사실상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권력의 심장인 청와대를 평화 속에서 이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청와대 경내로부터 세상의 거리는 도보로 겨우 4분거리였다. 문을 나서면 바로 바깥세상이었다.

 

청와대로부터 바로 4분 거리의 세상으로 걸어나가는 데, 40년 세월이 소요되고 있었다.

4분거리에 40년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난 해냈어. 내년이면 청와대를 떠날 수 있게 됐단 말이오』

그분이 날 마주보며 터뜨린 이 짧은 탄성은 바로 그 40년간의 운명적 숙제를 뛰어넘고 있는 행복한 자의 함성이었다.

 

『태우는 잘 해낼 거야. 내무·정무·체육부장관 등 행정부의 주요직책을 두루 맡아보았으니 정부조직 수업은 잘 된 셈이고 당에서 정치인의 생리도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으니 나처럼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잘해낼 것이 틀림없어. 그뿐인가. 군에서도 요직을 두루 거쳤으니 군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말이오. 정말 잘된 일이지』

 

그분의 기쁨은 컸다.

 

그분은 마치 당장 그 순간부터 국정의 책무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황홀하고 유쾌해 보였다. 그분 모습에서 난 비로소 우리의 하산이 최초의 걸음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산은 오를 때보다 내리막길이 힘들다는 경구를 난 그날 밤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분은 탄성과 희열 속에 있지만 그러나 하산 과정이 시종일관 그토록 감격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날 이후 그분에게선 숙면중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나는 습관이 사라졌다.

자다가 번번이 일어나는 그 강박감이 사라진 것이다. 어려운 숙제를 해냈다는 안도감과 우정의 절정을 이루어냈다는 성취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려대로 하산은 쉽지 않았다.

 

여드레 후인 6월10일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그분은 전당대회 치사를 했고, 당은 노태우대표를 차기 대통령후보로 정식 선출했다. 여드레 전 상춘재에서 있었던 중집위원회의 노후보 추천을 당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날부터 재야·학생 세력의 가두시위가 시작됐다. 일부시민들도 가세한 격렬한 시위였다.

이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은 그분을 실망시켰다. 그분은 단임을 실천함으로써 헌법을 준수하는 그 일을, 어렵지만 명예로운 일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야 세력은 그분의 단임의지 과정이며 평화적 정권교체의 시작인 차기대통령후보 추천 까지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차기 대통령후보가 선출되고 있는데 재야세력은 직선제개헌을 요구하며 도심으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불신당한 단임의지

그제서야 그분은 자신의 정치적 기교가 순수하지만 미숙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통한이 거기 있었다.

 

그분은 임기 내내 너무 자주 단임의지를 밝혔던 것이다.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제5공화국 최대의 약속인 평화적 정권교체를 언약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약속의 강조는 더 빈번했다.

어느 자리에서든 그 약속을 반복함으로써 그분은 자기 자신에게는 권력의 마성에 대한 엄숙한 경고를, 그리고 주변세력에겐 정권교체를 방해하는 무드 자체를 단절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상 그분의 이런 지속적 노력은 옳았다.

자기정화와 자기각성 같은 이런 지속적 노력이 없었다면 권력은 어디선가 곪기 시작해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다시 한번 막아버렸을 것이다.

 

『노신영장관 말이 맞았어. 내가 하도 단임약속을 강조하고 다녔더니 어느날 노장관이 건의하더군. 각하, 이제 소신을 그만큼 밝히셨으니 더이상 말씀 안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노장관의 건의는 적절했던 것 같아』

그분은 안타까워했다. 그런 건의대로 자신의 소신을 너무 자주, 솔직하게만 밝히지 않았어도 임기말을 맞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은 훨씬 쉽고 조용하고 의미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적당한 정도로만 단임에 대한 내 소신을 밝혔어야 했어. 그랬다면 임기말인 지금 야권과 재야세력의 반응은 달랐을 것』이라고 그분은 후회했다. 그런 식의 정치적 기교가 있었더라면, 지금쯤 그들은 개헌이 아니라 도리어 호헌을 외치며 헌법에 따라 제발 임기만 마치고 청와대를 나가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분 말은 옳았다. 특히 정치적 기교에 관한 한 자신은 너무 순진하고 서툴렀다는 반성은 옳았다.

내가 보기에 야권과 재야세력은 그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벅찬 분량의 그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다.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그분은 벅찼다.

 

어떻든 임기 내내 안보위기, 경제위기, 정치위기와 대결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제5공화국이었다. 외교 안보 경제에 있어 중요한 도약과 치적을 이루어낸 정부였다. 이제 평화적 정부이양만 성취해내면 국가위기 속에 출발한 정부로서는 그 시대가 요구한 역사의 몫을 행복하게 감당해낸 공화국으로 평가될 것이었다.

 

이런 시기에 직선제 개헌요구는 너무 과해 보였다. 중요한 것들은 한꺼번에 요구될 수도 성취될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전두환 매혹한 의원내각제

격렬한 직선제 개헌요구가 나온 그 상황마저도 그분은 자신의 정치적 미숙 때문이라고 인정했다. 소란한 개헌논의 속에서 유럽으로 떠났던 그분은 많은 희망과 감동을 안고 돌아왔었다.

 

그분을 매혹한 것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의원내각제였다. 유럽 정상들과의 환담과 토론을 통해 그 제도의 실용성과 합리적 장점들을 확인했었다.

 

귀국하자 그분은 개헌논의를 수락한다고 발표했다. 그분의 대안은 의원내각제였고 호헌으로부터 후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여전히 직선제 개헌만을 요구했다.

 

그분은 의원내각제가 그토록 무참히 거절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분은 너무 성급히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 보였고, 의원내각제의 장점에 매료돼 개헌논의를 허락했던 것이다. 그것이 상처받기 쉬운 그분의 순진무구였다.

 

결국 개헌논의의 본격적 무드를 허락한 것은 그분 자신인 셈이다. 그분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미숙을 인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임기는 겨우 8개월 남았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조직적인 소요는 힘을 더해갔다. 소요는 과격해지고 도심에는 최루탄이 날았다. 피차에 중대한 오해가 시작된 것이다.

 

선례가 없는 정권교체라는 예민한 과정을 다루던 그 시간, 요구하는 측도 양보하는 측도 균형을 지킬 줄 아는 양식과 이성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피차의 목표이며, 바로 그 시기 최고의 목표인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로엔 온종일 함성과 최루탄이 끊임없이 날았다. 군중은 평화적 정권교체와 직선제 개헌을 동시에 원했다. 요구하는 측은 늘 만족을 모른다.

 

운명적으로 요구하는 자는 몽상적이고 응답자는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응답해야하는 쪽은 몽상이 아니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행은 언제나 몽상보다 어렵다.

 

시위대는 매일 직선제 개헌을 외쳤다. 그분도 정부도 내각책임제 지지자였다. 자신의 단임의지가 확실한 이상, 그분은 자기 임기 중 치르게 될 대통령선거를 통해 좀더 국가에 이익이 되는 성숙한 정치체제를 선택해 정착시키고 싶어했다.

 

정치선진화가 중요한 이상이 되어 있었고, 궁극적으로 완벽한 제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최선의 제도를 선택해야 할 의무는 통치자인 자신 앞에 놓여져 있다고 그분은 생각했다.

 

대통령직선제는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다는 신선한 장점이 있는 반면, 선거과정에서 정치과열이나 국론 분열의 우려가 너무도 큰 단점이 있었다. 엄청난 선거자금으로 인한 필연적인 국력낭비라는 허점도 치명적이었다.

 

그에 비해 내각책임제는 선거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매력과 정책의 질(質)에 대해 국민들이 언제든지 불신임표시를 할 수 있다는 실용성과 강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내각책임제는 일하는 국가, 능률적인 국가의 모습에 적합했다.

 

소위 정치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 중 미국과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내각책임제를 선택하고 있는 예를 주목할 만 했다. 대통령직선제와 비교해 경제적이고 능률적이며 합리적이라는 검증 때문일 것이다.

 

그즈음 시위와 방어과정에 중대한 변화가 생겨났다.

내각책임제, 대통령직선제, 그 제도의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떠나서 내손으로 대통령을 뽑아보자는 구호가 심정적으로 국민들 사이에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국민들의 심정을 읽어내고나면 시위는 불꽃을 얻어 더 격렬하게 타오른다. 열병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럴 때 그분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좁다.

 

신념을 철회하거나 신념을 관철하는 것이다. 정치선진화에 분명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내각책임제를 관철해내거나 아니면 철회하는 것이다.

 

비록 너무 소란스럽고 낭비적이라 하더라도 직선제를 받아들이거나 단호히 직선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직선제를 거절하려면 격한 소요를 강압적으로 진정시키는 일이 남아 있었다.

 

『직선제 받으라』 남편 설득

두가지 모두 그분에겐 상처를 남길 것이다. 직선제를 수락하는 일도, 소요진압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거나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일도 최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잠못이루는 밤이 왔다. 난 두 가지 모두 그분에겐 어려운 선택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기의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그분은 박대통령시절 소요진압을 위해 연중 행사처럼 치러내야했던 위수령이나 계엄령을 단 한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은 범상치 않다. 계엄령을 통해 사회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회속에 얼마나 초법적인 조치들을 퍼부어야 하는지 그분은 알고 있었다. 초법적이란 아무리 용서해도 불법적이란 말과 다르지 않다.

 

재임기간 동안 수많은 저항에 부딪히면서도 초법적 조치라는, 손쉽지만 극단적인 그 방법만은 결코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국민에 대한 그분의 마지막 단심이었다.

 

결국 그 상황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면 그것은 임기내내 지켜왔던 자기다짐을 파기하는 명예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직선제 수락도 그분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각책임제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직선제를 수락하는 것은 신념의 포기를 의미했다.

 

그분은 잠못 이루는데, 곁에 누워 생각하니 가슴이 막혀왔다.

임기 시작부터 위기의 시대였다. 그동안 참으로 잘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어려운 시절에도 가장 쉽고 극단적인 비상사태 선포 한번 해 보지 않고, 그분도 국민도 잘 견뎌왔던 것이다.

그러나 겨우 임기 8개월을 남겨놓고 그분은 지금 그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위기가 그분 통치의 절정이 될 평화적 정권교체에 치명적인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난 현기증을 느꼈다.

평화적 정권교체는 그 시대 속에서 그분이 찾아낸 통치목표였지만, 아내인 내겐 남편을 국가의 공복으로부터 돌려받고, 아이들을 청와대로부터 옛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간절한 귀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강렬한 모성본능이 밤새도록 내 존재를 압도했다. 난 그날까지 그분 일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왔다. 어떤 간섭의 말도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분에 대한 내 원칙이고 신뢰였다.

 

그러나 이제 그 원칙은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나라와 역사에 대한 자기사명에 취해 있었다. 아내와 가족은 국가보다 우위개념일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겐 달랐다. 나에겐 무엇보다도 가족과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 소중했다.

온가족이 무조건 살아서, 평화롭게 손을 잡고 청와대를 걸어 나가는 것, 그것이 내안의 모성이 부르짓는 생존본능이고 귀소본능이었다. 무조건 살아서, 평화롭게 청와대를 나와, 옛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지금도 이 말을 생각하면 갑자기 겨드랑이에서 거대한 날개가 돋는 듯한 통증이 온다.

날개속에 가족들을 품어안고 보금자리를 찾아 날아오르는 어미새의 강렬한 귀소본능이 나의 내부에서 맴돈다.

 

직선제가 주는 폐단과, 직선제가 길러온 폐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분이 어쩔수 없이 비상사태 선포라는 극단을 선택한다면 그분은 엄청난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엄청난 저항은 살아서, 평화롭게 청와대를 걸어나가려는 우리 가족 앞에서, 이전의 역사가 그러했듯 다시 한 번 청와대의 정문을 미친 듯 받아버릴 것이다. 다시 한 번 피의 재앙이 있고, 역사는 저만치 후퇴해버릴 것이다. 현기증이 일고 절망적인 기분도 들었다.

 

가족들로 하여금 평화롭게 청와대를 떠날수 있게 해야하는 일은 내 몫이다.

내 안의 모성은 밤새도록 내게 그렇게 외쳤다. 이튿날 난 그분께 매달렸다.

 

중대한 결정 앞에서 그런 식으로 그분을 대하긴 처음이었다.

『여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환자가 기어코 먹지 않으려고 한다면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요.

 

당신의 주장이 아무리 좋고 선의로 가득차 있다 해도, 국민에게 강제해선 안되고 선택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직선제엔 결함이 많아도 사람들은 그걸 원해요. 난 제발 당신이 무사히 임기를 끝내고, 우리 가족이 이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어요』

 

얼마전 유월 초순경의 일로 기억된다. 나는 친교가 있는 여교수들로부터 많은 학생들이 대통령직선제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날 아끼는 여교수들은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고 해야 할 대학생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조언해 주었던 것이다.

 

그 조언이 그날밤 나로 하여금 그분에게 『직선제엔 나름대로 결함이 많지만 사람들은 그걸 원해요』라고 말하게 하고 있었다.

 

『혁명은 실패하면 반역?』

내 간절한 호소에 그분은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제 박영수 비서실장도 당신과 똑같은 말을 합디다』

 

그분이 다시 말했다.

『나라 장래에 막중한 영향을 끼칠 일이니 나도 사심없이 결정한 생각이오』

 

「사심없이」 ― 이 말이 가슴을 쳤다.

이번에도 그분은 기어코 옳은 결정을 해낼 것이라는 안도감이 왔다. 자신의 손익과 관계없이, 유리함과 불리함을 계량하지 않고, 순수이성으로 대할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 내가 덜컥 겁이 났다.

 

『그렇다면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런 후에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침묵이 잠시 우리를 감쌌다.

 

최고권력의 관저인 청와대라고 해도 과연 그분과 내가 그 밤에 나눈 바로 그런 식의 대화가 얼마나 많이 오갈 수 있었을까.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정치에선 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것일가. 혁명은 실패하면 반역이 된다던 글이 생각이 났다. 정치가 실패하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선거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우리 가족이 안전하리라는 본능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분의 대답이 시작됐다.

『필생즉사(必生卽死)요, 필사즉생(必死卽生)이오. 이것이 지금의 내 심정이오. 살려고 부당하게 애쓰면 죽고, 죽을 힘까지 다해 순결하게 현실을 대하면 반드시 살 수 있는 것이오』

 

난 지금도 그날 그분이 했던 그 우렁찬 말을 잊지 못한다. 임기 8개월을 남겨놓고 찾아온 최대 위기 앞에서 그분이 했던 바로 그말, 신앙고백 같은 그 말로부터 역사적 6·29선언의 막은 오르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김대중씨 풀어줄 생각이오』

『직선제를 하면 여당이 불리하다고 보는 사람도 많지만 난 그 반대요. 제도가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는 사람만이 승자요』

 

그 다음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난 직선제 후유증 때문에 신념을 갖고 반대해 왔지만, 국민이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안 이상,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오. 당신 말대로 아무리 선의의 것이라도 강제해선 안되는 법이니까』

 

나의 다음 질문은 당돌했다.

『그럼 김대중씨도 풀어주실 건가요?』

 

『물론, 그럴 생각이오』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난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분은 이미 위기의 강물을 건널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 놓고 있었다.

 

『국민들은 직선제를 원하고 있소. 그것도 강렬하게. 국민이라고 해서 내가 알고 있는 직선제의 치명적인 결함들을 모를 리 없소. 그들은 나보다 더 직선제 후유증에 진저리가 나 있는지도 모르오.

 

그런데도 국민들은 바로 그 결함투성이의 직선제를 원하고 있소. 국민들의 이 역설적인 요청 속에 분명한 메시지가 있소. 국민들은 수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직선제를 요구함으로써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한 페어플레이가 있는 대통령 선거를 갈망하는 거요.

 

후보자에게는 완전경쟁을, 투표자에게는 완전선택이 보장되는 그런 완전선거를』

그분이 완전선거의 이상을 말하는 그 순간 6·29는 그렇게 거침없이 역사적 막을 올리고 있었다.

 

국민들이 굳이 결함의 부담을 끌어안으면서조차 직선제를 원하는 절실한 이유를 안 순간 그분은 기꺼이, 가차없이 자신의 태도를 수정하고 있다. 옳다고 결정되면 주저없이 자신을 수정하고, 수정된 길로 내달리는 행동력, 그것이 그분 기질이고 그분 탄력성이다.

 

바로 그 탄력성이 열렬한 내각제 지지자인 그분 속으로, 직선제 건의가 뚫고 들어갈 수 있게 한 힘이다.

자신의 성품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옛말은 옳다. 그분 성품이 그분 자신, 가정 그리고 나라 운명까지 결정하고 있다.

 

『김대중씨를 풀어주는 문제 뿐 아니라, 이 기회에 모든 분야에 걸쳐 풀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신중하고 과감하게 풀 생각이오』

 

그분에겐 결심이 곧 행동이다.

이튿날 그분은 상춘재 앞뜰로 갔다. 중대발표가 있었다. 다음주 중으로 정국이 안정을 회복하지 못하면 대통령으로서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폭탄선언이었다. 선언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엄숙했다.

 

6·29의 공적 개막은 그렇게 시작됐다. 6·29 순산을 위한 숨가쁜 연극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적인 선의의 연극이. 그분의 극중연기는 완벽했던 것 같다.

 

외면적으로 비상조치를 말하고 있는 그분 내부에, 직선제 개헌의 완전 수락과 가능한 한 모든 민주화조치에 대한 수락이라는, 그 혁명적 심정이 담겨져 있다고 예감한 사람은 없었다.

 

그 발표 이후 이틀 동안 그분은 노대표를 만나고 있지 않다. 숨가쁜 결정일수록 그분은 자신에게도, 노대표에게도 적어도 이틀 정도의 사유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직선제 단호히 거절한 노대표

사흘후인 1987년 6월17일 오전 10시. 그분은 집무실에서 노대표와 마주앉았다. 국민의 뜻이 직선제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분의 첫마디였다. 노대표는 일언지하에 반대했다.

 

(중략)

그분은 자신이 호헌에서 개헌으로 내각책임제에서 직선제 신념을 수정한 것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할 생각이었다. 그분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분은 자신의 신념을 비겁함으로 수정한 것이 아니라, 용기로서 수정했으므로. 직전제를 수락한다면 대통령후보를 사퇴하겠다는 노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그분은 그날 직선제 수락을 고려하게 된 다섯 가지 이유를 말했다.

 

첫째, 물리적으로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비상조치가 불가피하고, 비상조치는 정권에 불명예일 뿐 아니라 경제

          와 올림픽에 타격을 준다.

 

둘째, 야당이 선거 보이코트를 하면 단일후보가 되고, 그것은 대외적 모습을 우습게 만들고, 당선된다 해도 불안한

          집권이 된다.

 

셋째, 현행 간선제를 야당이 역이용할 경우, 야당은 기습적으로 선거에 열기를 올릴 수 있고 직선제보다 돈이 많이

          드는것은 물론, 패배 가능성도 높다.

 

넷째, 설사 현행 헌법으로 선거에 승리해도 89년의 개헌논의는 불가피하게 된다. 새로운 선거는 새 자금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준다.

 

다섯째, 현행 간선제에 비해 직선제는 당선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당선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다.

 

71년 선거가 실례로 등장했다. 그해 박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3선개헌을 한 뒤여서 인기가 없었다.

경쟁자인 김대중씨는 달랐다. 40대기수론을 내세운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는 개표함을 열자 박대통령이 1백만표 이상 앞질러 당선됐다.

3선개헌, 인기하락의 치명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싸움에서 이겨낸 것이다.

 

그당시 불리한 조건에 있던 박대통령에 비하면 똑같은 직선제선거 앞에서 노대표의 경우는 다른 이유들로 훨씬 유리하다고 그분은 자신에 차 있었다.

 

노대표에게는 우선 새 인물이라는 신선미가 있다. 박대통령과 비교할 때 외모와 언변도 좋다. 더욱이 젖먹던 힘까지 쏟아진 근면성과 그 어떤 정부도 갖지 못한 기적의 패기 때문에 5공이 나라에 바친 치적도 만만치 않다.

 

영광은 노대표에게 양보하겠다』

우리는 익사 직전의 나라를 인계받아, 인공호흡을 거쳐 번영의 불꽃을 피우게 했다.

 

우리의 현대사 속에 지금처럼 번영이 구체적으로 접근해온 시대는 없었다. 이것은 그저 얻은 행운이 아니다.

우리는 무조건 나라를 살리겠다는 운명같은 사명감으로 숨이 막혔었다.

 

이제 직선제라는 완전경쟁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생애 최고의 정신으로 이룩해 놓은 치적을 정정당당하게 평가받아 보는 것도 사나이답지 않은가. 열의에 찬 그분의 설명이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왔다.

 

노대표가 그분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대표가 시간을 달라고 했다. 노대표가 시간을 요청한 것은 옳았다. 노대표에게 던진 그분의 민주화 구상은 충격, 혁명, 도약, 모험의 요소들로 탄탄하게 장전된 파격적인 그 무엇이었다.

 

시간을 요청한 노대표를 그분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짧았다.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두 개의 불꽃이, 바로 그 시간 역사 안에서 동시에 타오르고 있었다.

 

거리엔 시위라는 불꽃이, 권력의 핵심인 그분 내부에선 민주화라는 그 시대 최고의 이상을 위한, 최고 양보라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 두 개의 불꽃이 있었던 그 시절의 그 위기감이 좋다.

 

그 시절에는 그 두 개의 불꽃이 과연 위기인지, 진보인지 가려낼 길이 없었다. 불꽃은 무조건 타올랐고, 역사는 진보나 퇴보중 한가지 길로 흘러갈 것이다. 허약하고 퇴폐한 사회라면 그 가슴에 그렇게 타오를 불꽃이 있을 리 없다.

 

지금 내게 그 시절 그 두 개의 불꽃은 보다 세련된 가치, 세련된 이상을 얻어내기 위한 그 시절 우리 사회의 젊음, 생기, 강함의 증명으로 다가온다. 위기감이 아닌 찬미의 감정이 솟을 때가 바로 이런 시간이다.

 

생각할 시간을 요청한 노대표에게, 그분은 긴 시간은 없다고 했다. 민주화를 위한 그 충격적인 양보를 위해 그분은 이미 많은 시간을 사용한 뒤였다. 그분의 민주화 구성은 야당의 요구를 겨우 수용하는 소극적 규모가 아니었다.

 

한 팔로 야당의 모든 요구를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민주화를 위해 치명적이었던 부분까지도 끌어안은 대담한 순교적 정치포용이 그분의 결의 속에 있었다.

 

그 결의를 야당의 반대나 거리 시위대에 내몰린 통속적 양보라는 취급을 받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 결심에 대한 그분의 자부심이었다. 그것은 반대나 시위에 내몰려 상대적으로 급조된 결정이 아니었다. 그분은 도리어 보다 다른 가치보다 더 다른 힘에 기쁘게 굴복하고 있었다.

 

자기 결심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 때문에 그분은 노대표에게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신속히 결정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저녁 그분은 노대표의 결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중요한 한마디를 던지고 있다.

 

『나의 민주화 결심은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것이다. 이 결심은 야당과 국민을 동시에 열광시킬 것이다. 이 역사적인 발표는 발표하는 순간, 바로 그 사람을 민주화의 영웅으로 만들고 반대자들을 침묵시킬 것이다.

 

과연 누가 이것을 발표할 것인가. 누가 영웅이 되고, 누가 승부의 선두에 설 것인가. 난 나라와 노대표 당선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돕고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난 모든 영광을 노대표에게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노대표에 대한 그분 최고의 우정이었을까. 이 일은 그날 저녁 안가에서 일어났다.

귀가했을 때 그분은 조금 취해 있었고 격앙돼 보였다. 절반의 긴장, 절반의 흥분이 그분 속에 가만히 섞여 있었다.

 

그분이 가족들을 불렀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분은 그렇게 가족들을 불렀었다.

『난 오늘, 참 중대한 결정을 했다』

 

음성은 상기돼 있었다.

중요한 결정이란 말이 나는 물론 그즈음 부쩍 동지같이 느껴졌던 큰아이를 긴장시켰다.

 

『우리 가족의 청원대로 직선제수락을 결정했다. 내 돌연한 제의에 노대표는 몹시 당황했다.

당황해하는 노대표를 보니 참 미안하더라. 내가 정치적으로 미숙해 계속 야당에게 양보만 해오다가 이젠 그들이 원하는 것 이상을 다 주어버린 셈이 됐으니, 노대표는 안전하게 투쟁할 고지마저 날려버린 낭패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것이 모험적이고 혁명적이지만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고, 용기있는 선택엔 최고의 승리라는 최적의 보상이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최고의 선택, 최고의 승리, 최적의 보상. 그분은 다시 말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난 이런 선택을 했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노대표에겐 이 상황들이 쉽게 느껴질 리 없다. 그래서 난 노대표의 당선을 위해 이 결정이 가져올 모든 영광, 찬사, 이익, 부가가치, 전리품을 아낌없이 주기로 결심했다』

 

「모든 영광을 노대표에게」 그것이 그날 밤 우리 가족이 그분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가장 충격적 메시지였다. 노대표에게 영광을 양보하는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용기와 신선한 충격으로 가득찬 그분의 모든 결정들, 훗날 6·29 선언이라고 불리게 될 어렵고 가치 있는 모든 결정들은 그날 이미 그분의 손에서 노대표의 손으로 그렇게 뜨겁게 옮겨지고 있었다.

 

전두환은 악역 맡고 노태우는 영웅으로

『난 노대표에게 그 민주화구상을 내게로 가져와, 내게 반기를 들라고 했다』

 

어느날 노대표는 그 결정을 휴대하고 그분을 찾아와, 그것이 민주화조치를 위한 노대표의 구상이라고 건의한다. 그는 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대통령후보는 물론 모든 공직까지 사퇴하겠다고 강하게 반발해온다.

 

그분은 이미 4·13조치에서 직선제수락을 거부하고 호헌을 주장한 뒤였으므로, 직선제수락과 그 이상의 파격적 민주화요구를 해오는 노대표의 건의와 좋은 대조를 이룰 것이다.

 

말하자면 그분은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거부하는 통속적인 현상 유지자의 표본으로, 그리고 바로 그분이 고통과 용기로 만들어낸 민주화를 위한 파격적 결정을 바로 자신의 구상이라고 들고 와 강력하게 건의하는 노대표는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에 적절한 불꽃을 던지는 영웅의 표본으로, 그렇게 배역이 결정되고 있는 셈이다.

 

한 사람은 새 영웅의 배역을 우정의 선물로 받고 있고, 한 사람은 새로 만들어지는 영웅에게 빛을 보태기 위해 악역을 자청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민주화에 열의가 없는, 안일에 빠진, 시대정신에 뒤진, 통속적 보수주의자로서의 치명적인 악역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노대표 당선을 위해 노대표에게 모든 영광을 양보하기로 결정한 그분의 선의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란 말인가.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그분의 의지로 이미 시작된 이상, 왜 또 이런 식의 치명적이고 현기증 나는 정치시나리오가 다시 필요하단 말인가.

 

명예로운 하산이 필요한 시기에 왜 하필 악역을 자청해, 조작된 불명예를 끌어안아야 한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그분의 품성과 민주화에 대한 그분의 용기가 한꺼번에 왜곡 당한다는 것이 내겐 견딜 수 없었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이란 따로 있는 법 아닌가. 왜 하필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눈부신 부분, 가장 뛰어난 부분, 가장 광채가 찬 것, 가장 불멸의 것을 왜곡시키도록 허락하고 있는 것일까.

 

그분은 너무 엄청난 결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와 큰아이를 동시에 불안하게 했다. 사실상 그 일은 내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그분의 기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 기질을 견뎌내는 것은 평범한 내겐 언제나 힘에 겨웠었다.

 

그러나 그날 밤 일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품성도, 그 정도면 거의 자해적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잔인하기 짝이 없다는 권력의 속성 앞에서 그렇게 소년같은 심정으로 순정을 바쳐도 좋단 말인가. 권력의 속성이 그분의 순정을 삼류 멜로드라마로 전락시켜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와 큰아이는 그분께 매달렸다.

『꼭 그런 치명적인 방법밖엔 없습니까』

 

『왜 꼭 그런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왜 40년 우정만 소중하고 40년 명예는 그렇게 마구 취급당해도 좋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만류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그분 결심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분은 도리어 정열적으로 자신이 왜 흔쾌히 그렇게 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날밤 나와 큰아이가 그분에게서 확인한 것은, 그분은 이미 7년간 나라가 자기 삶의 테마였고 그리고 바로 그밤에도 그분의 세계는 아직도 국가와 역사 앞에 무엇인가 유익한 것을 보태야 한다는, 바로 그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분의 그 열정 앞에 나와 큰아이의 소박하고 실질적인 가족으로서의 근심은 속수무책이었다.

가족도 그분을 막을 수 없었으므로 이제 소위 6·29선언이라고 불리도록 운명지어진 민주화구상안, 그분 7년 통치의 절정의 꽃인 그 영광의 화환은 고스란히 노대표에게 넘겨지고 헌정된 셈이었다. 그날 난 그것이 권력이동의 구체적 첫 순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해서 그 시대 최고의 숨막히는 역사적 질료인 민주화 구상은 그분에게서 노대표에게로 옮겨졌다.

그 시대 최고의 역사적 질료가 우정의 이름으로 노대표에게 헌정된 것이다.

 

노대표는 이제 그의 능력, 철학, 품성, 기질에 따라 그 최고의 질료를 사용해 자신의 영웅 탄생의 드라마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노대표가 만들어가는 영웅신화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악역을 거침없이 해낼 것이다.

 

그해 6월 19일 저녁. 노대표는 스스로 그의 드라마의 문을 열고 있다.

그날 저녁 만찬에서 노대표는 그분과 마주앉았다. 그가 그분이 전한 민주화구상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사흘 후 노대표는 호기롭게 청와대를 방문하고 있다. 그 방문은 당이 마련한 시국수습방안을 그분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위장돼 있다. 그분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노대표는 몇가지 대담한 건의를 함으로써 그분 허락속에 약속된 자신의 드라마를 전개시키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노대표의 건의에 대한 그분의 반응이다. 그분은 노대표의 모든 건의를 완전 수락하고 있다.

 

노대표에게 내린 「금족령」

노대표의 건의대로 그분은 윤보선, 최규하 두 전직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그 자리에서 그분은 비상조치없이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겠다고 약속한다.

 

김영삼총재를 포함한 야당 총재도 만나고 있다. 야당총재들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그분은 자신의 호헌의지를 바꿔 개헌논의를 다시 열겠다는 언약을 한다.

 

그 다음 언급이 중요하다. 드디어 그분은 노대표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선언한다.

이제 드라마는 상당히 많은 진전을 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무드는 다른 것이 아니다. 민주화조치에 대한 모든 신선하고 파격적인 구상이 노대표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그분은 노대표의 젊고 독창적인 구상에 의해 계몽당하고 있는 수동적 인물로 부각되면 성공인 것이다.

 

어떻든 이제 노대표가 전격적인 민주화조치를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발표할 수 있는, 그 어떤 선언의 충분조건은 완전히 갖추어진 셈이다.

 

노대표는 그분에게 이미 파격적인 민주화 제의를 하고 있고, 그분은 모든 전권을 노대표에게 준다는 선언으로 화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선언의 날, 디데이는 6월29일로 정해졌다.

보안은 완벽했고 준비도 끝이 났다. 그날 이후 노대표는 그분을 만날 수 없었다. 그분은 노대표에게 금족령을 내렸던 것이다.

 

더이상 노대표가 청와대를 드나드는 것은, 민주화선언이 전적으로 노대표 개인의 작품이라는 데 흠을 남길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분은 노대표에게 흠없는 완전한 영광, 완전한 양보를 선물하기 원했다. 그것이 자기 약속에 대한 그분의 열정이고 진심이었다.

 

아무도 그분과 노대표 사이에 오간 이 엄청난 약속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분은 금족령 이후 자신과 노대표 사이의 연락 책임을 큰아이 재국에게 맡겼다. 큰아이는 매년 세배를 다니던 노대표의 집을, 이제는 한 역사적 사건의 심부름꾼으로서 묵묵히 드나들어야 했다.

 

며칠 안되는 그 기간 동안 큰아이 재국은 제5공화국 최고 정치드라마의 목격자가 된 셈이다. 역사가들의 말대로 혁명이란 단지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듯, 정권교체란 단지 앉아 있던 의자나 좌석표의 교환만은 아닌 것이다.

 

평화적 정권교체속엔 임기를 마치고 집무실을 떠난다는 단순한 사건 이상의 그 무엇, 국가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축소시키고, 어떻게 잊혀지고, 어떻게 퇴장시키는가에 대한 엄숙한 밀의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어떻든 그 며칠간 재국은 좋은 경험을 했다. 부친은 왜 꼭 이런 식으로 자신을 왜곡시키고 축소시키고 평가절하시켜야만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년간 그 아이를 지배해온 질서의 힘이, 그 아이를 부친인 그분께 무조건 순종하게 하고 있었다.

 

결국 6·29에 대한 보안은 완벽하게 지켜진 셈이다.

나와 큰아이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6·29가 선언되기 직전, 그분은 다시 한 번 그분 선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27일 오전, 그분은 자신의 집무실로 이종률공보수석과 김성익비서관을 불렀다.

철저한 보안속에서도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노대표가 제의한 6·29를 전폭 수용한다는 공식발표를 해야 할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었다.

 

어차피 노대표의 역사적 선언에 진정한 생기를 불어넣어줄 역사적 담화문을 발표해주는 일까지가, 이 일에 대한 그분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제대로 된 내용을 담은, 올바른 효력의 담화문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철저한 보안속에서도 적어도 담화문 작성자에게만은 솔직하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6·29전야의 짜여진 각본들

그날 아침 그분이 두 비서관을 부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놀라운 소식이 있네』


두 비서관은 그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직선제를 받아들이겠어. 그렇다고 의원내각제에 대한 내 소신이 변한 것은 아니야.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국민들이 지금은 원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지.

국민이 원하니 기꺼이 받아들이자 이거야. 국민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해내는 것이 정치지.

 

군에선 이미 비상출동 준비가 다 돼 있어. 그러나 난 비상조치같은 것은 절대 명령하지 않겠어.

경제가 위축되고 올림픽에 치명상을 주게 될 테니까. 올림픽은 아름다운 돌파구야. 그걸 망칠 순 없지.

 

국민들은 이제 최루탄 냄새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어. 더이상 소요사태, 사회혼란, 최루탄, 독재에 대한 불안으로 국민들을 괴롭힐 순 없어. 유신때 너무 질린 나머지 국민들은 지금 내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고싶다는 기막힌 갈증을 갖고 있어. 이건 절실한 거야.

 

이제 평화적 정권교체에 대해 국민이 내게 원하고 있는 그것을 자신있게 양보해주는 거야.

직선제를 과감히 받아들여 당당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결심이야』

 

그분이 다시 말했다.
『이런 모든 내용의 노대표의 건의가 있고 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담화문을 발표하도록 했으니 이 의미있는 결심이 국민의 심금을 울리도록 좋은 담화문을 서둘러 준비해줘야겠네.

 

그리고 그분은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냈다. 작은 글씨의 일정표였다.
6월29일―노대표가 당 중집위를 계기로 직선제를 받자는 건의를 하게 돼 있다는 것.


6월30일―오전엔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절차를 거쳐 당정각료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는 것.
이 제의는 다시 국정자문회의를 거치게 될 것이라는 것.


7월 2일―이 모든 것을 완전 수용하겠다는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예정돼 있다는 것. 간략하지만 역사적이고 폭탄적인 일정표였다.


그분의 음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활기에 차 있었으므로 두 비서관은 말을 잃었다. 대통령은 지금 너무나 파격적이고 극적인 일을, 너무나 평범한 심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지금 긴장이 감돌고 있는 정국을 당당히 직선제를 받아들임으로써 역전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분을 보좌하는 비서관들조차 예기치 못했던 뜨거운 결정이었다.


더구나 지금 대통령은 그 시대의 정치 상황을 단번에 뒤바꿀 그 뜨거운 용단이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흔쾌히 노대표에게 건네줄 준비를 끝내고 있는 것이다. 지시사항을 받아쓰며 두 비서관은 숨이 막혔다.

 

직선제도 숨막히는 반전이었고, 살신성인도 숨막히는 역전이었다. 이런 드라마,

이런 폭탄선언을 지시사항으로 받아쓰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음성에선 황홀한 활기만이 느껴졌다. 번민도 주저함도 없었다.
대통령의 그 믿을 수 없는 활기, 대통령이 말한 그 믿을 수 없는 내용의 파격에 압도되어, 두 비서관은 그저 겨우 지시사항만 받아썼을 따름이었다.


두 비서관이 대통령 집무실을 물러나올 때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담화문에서 분명히 말해, 4·13을 철회한다고 분명히 말하란 말이야』


디데이 하루 전날인 28일은 조용히 왔다.

아무도 하루 후에 있을 중요한 정치선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전날 그분은 아무도 모르게 노대표를 최종적으로 만났다. 용기와 소신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기위해서였다.
모든 일을 주저없이 계획대로 밀고 나가라고, 그분은 노대표에게 마지막으로 애정에 찬 격려와 지시를 내렸다.


일요일답게 조용히 하루가 열리고 있었다. 아침 열시쯤 그분은 가벼운 콤비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김성익이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내 내려갔다 곧 오리다.

 

어제 아침 불러서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면서 담화문 작성을 지시했더니, 놀라서 정신을 못차려. 놀란 심정으로야 제대로 된 담화문이 나올 리 없지. 내가 가서 잘 설명해 기막힌 명문이 나오도록 도와주고 올테니 기다리시오』
그분은 소년처럼 웃었다.

 

그날따라 난 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산은 이미 진행중인데, 권력으로부터의 하산은 눈보라같이 가차없는 것이라는데, 그분의 소년같은 저 천진한 웃음은 대체 이 하산에 어울리는 것인지 멍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렇게 소년처럼 웃어대는 그분이나, 하루라도 빨리 옛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에 절절 매는 내 자신이나, 권력으로부터의 하산을 너무 철없이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날 쓸쓸하게 했다. 그렇다. 권력으로부터 하산하는 우리 내외의 모습은 어이없도록 무장해제적인 데가 있었다.

 

재국이의 마지막 간청

그날 오후 담화문작성자 김성익비서관이 큰아이 재국을 찾아왔다.

예기치 못한 방문이었다. 보안에 겹겹이 싸인 6·29의 몇 안되는 청취자 중 하나인 그의 방문은 예사롭지 않았다.

 

재국과 마주앉자 김비서관은 진지하게 그러나 다짜고짜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 대통령께선 모든 국민이 소망하는 절호의 호재를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국민 앞에 내놓으려 하고 있다.

 

나라에 대한 각하의 우국충정을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난 이미 각하로부터 두차례에 걸쳐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이유와 당위성을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바로 그 직선제를 통해 다음 정권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절대명제 앞에서, 자신을 던져넣어 나라를 구하시겠다는 용단에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각하를 모셔오면서 각하는 언제나 나라가 최우선이었다는 사실에 감동해왔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때인가. 각하의 표현대로 권력의 갑옷을 벗고 황야로 나서야 하는 순간이 아닌가. 이 순간까지도 자신의 안전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는 각하의 모습은 내겐 충격 이상이다.

 

5공화국 출범과정에서 있었던 문제들을 생각해보라. 불이익을 당해 증오의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국민이 분명 환호하고 감격할 이번 이 선언만큼은, 어떤 이유로든지 정직하게 각하의 이름으로 선언돼야만 한다.

 

그래야만 5공화국이 지닌 역사의 매듭이 풀려지고, 임기 후 정치보복으로 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는 힘이 되며, 그것이 결국 임기 후 각하의 평화로운 삶에 구체적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선언은 각하의 것이며, 필연적으로 각하의 이름으로 선언돼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비서관의 설득은 큰 아이 재국에게 말할 수 없는 격정을 불러일으켰다.
김비서관이 지금 재국에게 다그치듯 쏟아놓고 있는 그 절절한 말들은, 며칠전 자신이 부친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호소했던 바로 그 간절한 간청과 기막히도록 똑같은 것이었다.

 

김비서관의 의견을 듣자 재국은 이 모든 것이 부친의 앞날과 운명적으로 깊이 연결돼 있다는 준엄한 사실에 숨이 막혔다.


『문제는 아버님께선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알고 계시면서도 그렇게 결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아버님에겐 단 한가지 원칙밖에 없으십니다.

 

즉 나라의 이익이 우선하는 결정이야말로 최고의 결정이라는 원칙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노대표께 모든 영광을 내어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자신이 바로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라고 믿고 계십니다.

 

아버님이 그렇게 믿고 계신 한 아무도 그 결심을 바꾸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아버님께서는 노대통령의 영광을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예 만나는 것조차 삼가고 계실 정도입니다』

 

아버님의 결심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정말로 불가능하다고 재국은 허무에 차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재국에게도 마지막 근심, 마지막 반전에 대한 처절한 기대가 있었던 것일까.

 

재국은 그날 오후 아버님과 김비서관의 면담을 주선하고 있다.

그날 오후 3시 40분. 김비서관은 재국과 함께 청와대본관 대식당에서 그분을 만나고 있다.

 

그날 김비서관의 충정을 다한 간청은 그분에겐 가족인 나와 재국이의 목메인 간청 이후 두번째 맞는 중요한 도전이 됐다. 그러나 그 절절한 호소 앞에서도 그분은 요지부동이었다.


『민주주의를 해보자는 것이 내 소신이고 철학이야. 자유당과 공화당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을 조였던, 정치 악순환의 저주를 내 시대에선 끊어버리겠다는 것이 내 마지막 결심이야.

 

민주화조치를 누가 제의하면 어떻고, 민주화 영웅이 누가 된들 그것이 뭐가 그토록 중요해. 국가란 엄숙한 거야. 그 앞에서 감히 개인의 영광을 계산하는 것처럼 저속하고 치사한 발상은 없어』

 

국가란 엄숙한거야. 그 앞에서 감히 개인의 영광을 계산하는 것처럼 치사한 발상은 없어. 그분의 이 마지막 말, 이 기막히고 찬란한 웅변에 두 사람은 말을 잃었다.


그 짧고 불길이 솟는 웅변으로, 그분은 목이 메인 채 식당 가운데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충정을 단번에 무력화시켜버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좀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이 계획을 알았더라면 그분은 훨씬 더 심각한 도전과 사정없는 만류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6·29는 사산되거나 적어도 난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분은 옳았고 결심은 추상 같았다.

 

6·29선언, 완벽한 영웅의 탄생

그날 몹시 늦은밤, 연희동 노대표댁에 그분으로부터 직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수화기 속에서 그분 음성은 강하게 지시한다.


『노대표, 내일 예정된 시간에 차질없이 시행하시오』
6·29선언이 발표됐다. 엄청난 환호가 선언을 뒤따랐다.

 

노대표는 자신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김대중씨를 풀어주는 것은 물론, 직선제를 포함한 8개항에 달하는 엄청난 약속을 선언문 속에 담았다.

훗날 6·29선언이라고 명명된 그 선언은 진실로 혁명적이었다.

언론들은 모든 민주화요구가 포함된 함량만점의 선언이라고 했다.

 

40년 헌정사속에 누적된 과제를 단번에 해소시킨 명작이라고도 했다.

국민과 야당은 물론, 외국 언론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규제가 풀린 김대중씨도 노대표에게 인간적인 신뢰감을 느낀다고 환희의 일성을 보탰다.

하나의 선언이 국민 야당 언론을 그토록 단번에 감격시킨 완벽한 예는 없었다.

 

한 개인의 선언이 그토록 완전하고 신선한 충격으로 사회를 흥분시킨 적은 없었다.

더구나 그 선언이 여당의 대통령 후보에 의해 발표되었다는 형식의 파격이 국민들을 매료시켰다.

 

통속적 기득권자일 수밖에 없는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그토록 대담하고 용감한 개혁을 스스로 부르짖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국민들 가슴에 심겨진 노대표의 인상은 그래서 더 파격적이었다.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와 독창성, 민의를 올바로 읽어내는 정교한 현실감각, 시국의 극한상황을 적기에 풀어나가는 세련성, 이 모든 찬사가 노대표의 것이었다. 그 찬사는 그럴 만했다.

 

그 선언은 국민과 야당이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과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 시절로서는 거의 완전한 명작, 완전한 명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선언은 한 사람의 새로운 영웅을 탄생시켰다.

 

정치적 영웅이 탄생하는 방식으로는, 그 이상 더 완벽하고 더 신선한 방법이 다시 없었다.

최루탄과 화염병은 일시에 사라졌고 거리 위로 떠오른 6월의 창공은 쾌청이었다.

 

그분의 희생이 6월 아래서 뜨겁게, 찬란하게 열매 맺고 있었다. 그분이 노대표에게 던진, 이 폭탄같고 화산같은 우정과 순정에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누가 뭐래도 그렇게 줄 수 있었던 자 그분의 순수는 그 순간 신성불가침이다.

 

6·29선언은 누가 뭐래도 그분 통치의 꽃이었다.

그리고 정치가 공동의 선(善)이라며, 6·29가 과연 누구의 작품인가 하는 것이 왜 그리도 중요하단 말인가.

 

귀 향

야권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그분 예상대로 네 사람의 후보, 노3김의 혈전이 시작됐다.

치열한 대통령선거전이었다.


선거과정은 상처가 많았다. 후보도 국민도 출신도별로 나뉘어진 채 싸웠다.

선거속에는 언제나 사람과 이념이 만들어내는 공허한 말들, 약속들, 냉혹함들이 있다.

 

그러나 선거속엔 또 눈부신 것들도 살아있다.

사람의 집념과 신념이 만들어내는 정열, 활력, 생명력들이 그것이다.

 

노후보는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골고루 득표했다. 그는 추격자 김영삼후보보다 2백만표를 더 얻어냈다.

2백만표라니, 언론들도 놀란 압승이었다. 야권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국민의 선택은 분산됐다.

 

언론은 후보단일화라는 최고의 처방을 외면한 두김씨를 비난했다.

선거의 승자는 단번에 영웅이 된다. 압도적 승리를 얻은 승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 해 선거의 승장인 노태우당선자는 단번에 영웅이 됐다.

모든 뉴스가 그들의 번쩍이는 촉각과 보도능력을 노태우당선자를 향해 쏟아부었다.

 

1987년 12월 17일의 일이다.
그날 우리 정치사도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가 나란히 공존하는 정치의 중요한 한 전형(典型)을 처음으로 보여 주었다.

 

물론 필연적인 과정이기는 했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어떤 공화국, 어떤 통치자도 권력이양기에 생기는 이 당연하고, 상식적인 통과의례를 경험하지 못했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최초로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가 나란히 공존하게 된 그날은 우리의 정치도 제대로 된 순환을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기념비적 시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날 밤 그분은 혼자 대취했다. 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날 그분은 기꺼이 혼자 취했다.
『여보, 이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을거요』


노후보가 당선된 일은 그분에겐 참 많은 것을 의미했다.

운명은 그분을 감히 꿈꾸어보지도 못했던 대통령이란 자리까지 밀어부쳤다.

 

맡기도 어려운 자리였지만, 떠나기는 더욱 어려운 자리였다.

그 자리에 맡겨질 때 운명이 그토록 맹렬하게 그분을 밀어부쳤듯이, 그 자리를 떠날 때도 인간의 의지나 신념이 아닌, 보다 더 높은 차원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정의 절정에서 시작된 몰락

노후보의 당선은 그분에게는 이제 홀가분하게 그 자리를 떠날수 있다는, 떠나도 좋다는 가장 확실한 운명의 결재, 운명의 허락을 의미했다.

 

노후보의 당선속에서 그분은 바로 그 의미를 읽었다.

『그것이 그분을 감격하게 했고 홀로 취하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그분은 바로 그 일을 수십년간 최고의 우정을 나눈 친구와 손을 잡고 함께 성취해냈다는 깊은 감회에 말을 잃었다. 그것은 그분과 노후보, 두 사람의 개인사 속에선 참으로 감격할 사건이었던 것이다.

 

우정이, 컴컴하고 미로같이 복잡한 정치라는 토양위에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주고받을 만큼 그렇게 기적의 꽃을 피운적은 없었다. 어떻든 그일은 두 사람 개인사에 있어선 우정의 절정을 의미했다. 아니, 그날 그분은 그것이 우정의 절정이 아니라 우정의 완성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정의 절정이지 완성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절정에 이른 후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분과 노후보가 나눈 우정이 바로 그 눈부신 절정에서 안타깝게도 몰락을 시작하지만 당사자인 그분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파산상태의 나라를 건져내기 위해 인기없는 일을 너무 많이 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나 노태우는 달라. 태평성대를 이룰거야』


그분이 말한 태평성대란 국가의 이상인 목가적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분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시간은 그분과 노태우 당선자에게 각각 다른 배역을 맡길 것이라는 사실을. 그분은 파산에 직면한 나라를 상속받았었다. 박대통령시해사건이 그당시 나라의 정신적, 육체적 파산을 잘 상징해주고 있었다.

 

거덜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느라, 더 고상하고 세련된 가치에 미처 손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점까지가 시대가 그분에게 맡긴 역할이었다.

 

열정을 바친 올림픽도 그 즈음에서 손을 떼고 미련없이 떠나야 하는 것이 시대가 허락한 그분 역할의 한계였고 그 점에 대한 그분의 인식도 단호한 것이었다.

『케네디가 죽고도 미국은 변함없이 굴러갔어.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독선이야』


이것이 정권교체를 준비하면서 그분이 자신과 가족에게 준 당부였다.
그날밤 기분좋게 취해 자리에 누운 그분은 마치 오랜 출장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절반의 여독과 절반의 기쁨이 그분을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 속에서 난 우리의 시간을 보았다.

그분은 누운 채 어둠속에서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곧 귀향의 시간이라고.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소. 우리 당에서 후임 대통령이 나오고 그가 친구라고 해도 퇴임후 반드시 안락한 생활이 마련되어 있다는 보장은 없소.

 

권력이란 더러운 것인데다, 권력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첫 경험인 만큼 누구도 퇴임 대통령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실험적 상황이오.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던 권력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황야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오.

 

이제부터 권력이양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 알아야하는 한가지 관문이 더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분은 엄숙하게 말하고 있는데 권력의 비정을 실감할 수 없었던 난 그 말을 감미롭게 듣고 있었다.

그날 나는 그분의 그 말을, 권력을 내주고 떠나는 사람의 겸손이나 여유쯤으로 이해했던것 같다.


『여보, 당신이 그토록 믿어온 소영아빠가 새 대통령이 되실텐데 무슨 걱정이세요』

그분의 당부에 대한 내 이 철없는 회답을 보라. 내가 그날밤 그토록 낙천적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즈음 난 벌써 연희동 옛집으로 돌아갈 기대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분이 준 한마디 말이 밤새도록 내 가슴 속 깊이 남았다.


『이제 우리는 권력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황야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오』
왜 하필이면 그분은 연희동집이라고 말하지 않고 황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분의 짧은 충고가 예언이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곳은 백담사 단칸방에서였다.

 

국가에 취해 살았던 청와대 생활

새해가 왔다. 그 해 무진년 새해는 참 많은 의미를 지닌 채 그분과 우리 가족에게 왔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그분이 연희동집을 떠난 것은 1`980년 8월 28일, 오전 여덟시의 일이었다.

 

그것이 그분에겐 청와대로의 첫 출근이었고, 연희동 옛집을 떠나는 첫 출가였다.

출가라고 말하고 보니 종교적 무드가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청와대는 종교적 장소였다는 느낌이 든다.

 

그곳에 사는 동안 그분은 국가에 취해 살았다. 사원의 성직자가 신(神)에 취해 살듯이 그분은 국가에 취해 살았다.

전력투구없이 통치의 사원인 청와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8년전 출가의 날이 있었고 이제 귀향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55일만 지나면 그리운 옛집으로 귀향하게 될 것이다.

그립다는 말은 이럴때 참 적절하다. 아무리 엄숙하고 의미있는 상징으로 가득차 있더라도 청와대는 그분의 관저일 뿐 가족의 보금자리는 아니었다. 공인의 관저일뿐 가족이 깃털을 부비며, 서로의 눈물과 상처를 핥아주는 바로 그 마지막 낙원은 아니었다.

 

청와대가 주는 의미의 중압감 때문이었을까. 청와대 체류자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보이지도, 설명되지도 않는 그 어떤 막연한 격조를 강요받는다. 대통령의 삶이 의무의 삶이듯, 가족들도 대통령의 명예에 흠을 내서는 안된다는 강박감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삶에 철책을 두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추억해보면 그것은 옳은 철학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삶은 안전하고 외교적이지만 도무지 독창적이지 않다. 그래도 그렇게 조용하고, 모나지 않고, 예절 바르고, 숨죽인 듯 사는 것이 그분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참 용케도 참아냈다.

 

그분의 생활방식도 예외는 아니다. 청와대 생활 내내 그분은 마치 투사처럼 살았다. 임기동안 나라를 반드시 선진조국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힘겨운 목표를 스스로 자신의 오른팔에 완장처럼 두르고 살았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역사라는 것이 대통령 한사람의 그 짧은 임기동안 엄청난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일가. 왕조에서의 왕은 자신의 긴 생애를 바쳐 나라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겨우 5년이나 7년 임기 동안 역사의 내용이나 질을 바꾸어 놓겠다는 것은 얼마나 벅차고 숨찬 야심이고 중노동인가. 어떻든 그분은 청와대 시간을 투사처럼 살았다. 미친듯 일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분의 그 모습은 참으로 그시절답다. 그것은 그시절 국가공복에 대한 우리 모두의 철학이고 정서였다. 국가를 위해 짧은 임기동안 전력을 다해 탈진할 때까지 노동하는 것, 그것이 그시절 지도자의 미덕이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그 벅찬 의무 때문에 임기말, 그분은 부쩍 늙어 있었다. 그래도 그분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임기 동안 자신의 추수를 한아름 안을 수 있었으니까. 외교적인 성과, 물가안정, 무역흑자, 올림픽 유치, 평화적 정권교체 등의 구체적 수확이 그의 팔을 휘청이게 했다.

 

그래도 나는 대통령은 역사라는 장거리 경주, 그 이어달리기 경기의 이름없는 한 단거리 주자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바통을 받아 쥔 그 주자가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그가 달릴 수 있는 거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에게 주어진 거리, 주어진 구간만큼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일 뿐이다. 질풍처럼 달렸다 해도 약속된 지점에선 정확하게 바통을 넘겨야만 한다. 휘날리는 옷자락, 머리카락, 쏟아지는 땀 속에서 그의 바통이 다음 주자에게 가차없이 넘어간다.

 

『나는 말이오. 권력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멋지게 멈추고 멋지게 떠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그분의 말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나자 나는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연희동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난 귀가라고 말하지 않고 자꾸만 귀향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우리 가족이 청와대에서 연희동으로 사는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옮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남 새집 거부하고 연희동으로 귀향

그분과 내가 왜 연희동을 단지 여지껏 살아온 단순한 집이 아니라 고향 같은 곳으로, 그것도 마음의 고향으로 느끼며 집착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상하게도 몹시 괴롭거나 외로울 때면 내 마음은 언제나 청와대를 떠나 연희동집으로 달렸다.

 

그분과 결혼한 후 나는 오직 그분과 아이들에게만 몰두해 살았다. 연희동 집터를 사고, 그곳에 난생 처음 우리가 살 집을 짓던 무렵, 난 처음으로 세상을 기웃거리지 않고 그분과 아이들에게만 몰두해 살았던 내 삶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자기확인을 했다. 집의 외진 구석, 마당 한자락까지 내 체온, 내 정성, 내 종종걸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더구나 연희동 시절 그분은 참 청명했다. 나는 아이들도 그분처럼 청명한 정신과 심정으로 살기를 소원했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들은 우리만이 아는 미담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열심히, 옳게 살자고 아이들을 다그치던, 활기찬 내 목청이 바로 그 연희동 집에 남아 있다.

 

삶의 활기와 품질로 보아, 그 시절이 우리 가족에게는 절정이었던 것 같다. 청와대의 삶은 조금 달랐다. 공적 엄숙함과 무엇이든 좀더 잘해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우리 가족을 숨막히게 했다.

 

그즈음 주위사람들이 연희동이 예전같지 않다고 말들을 하여 나를 실망시켰다. 도심에서 너무 가까워 더 이상 한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우리가족을 수용하기엔 너무 비좁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새로운 계획, 인기있는 택지가 천거됐다.

조용하고 쾌적한 강남에 2층으로 설계될 그 집은 퇴임 후 그분 일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진지한 건의를 단번에 거절한 것은 나였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 신중하고 멋있는 건의를 그토록 단번에 거절한 용기가 나왔는지 난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언제나 내 맘속에 대통령직을 무사히 끝낸 후 연희동집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 꿈의 힘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내 귀향철학이었다고 거창하게 말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건 내 소박하고 간절한 본능이었다.
우리의 인생과 가정이 손상을 입는 일 없이 권력의 정상으로부터 무사히 하산해, 정든 그 장소에서 예전처러 소박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향이 단지 떠났던 옛집으로 되돌아가는 장소의 고집,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떠나온 옛집이 변함없이 그곳에 남아있듯, 우리 가족도 옛집에 살던 때와 똑같은, 조금도 변질되지 않은 원래의 모습으로 그곳에 돌아가는 것, 그것이 귀향의 첫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귀향에도 자격이 필요한 셈이다.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귀향은 옛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옛집이란 옛추억, 옛이웃, 옛사람들로 둘러싸인 불가침의 공간이다. 아무리 넓고 쾌적하고 근사해도 낯선 새집은 옛집이 가지고 있는 이런 눈부신 재산들이 없다.

 

한때 대통령이었고, 퇴임했다고 해서 잘 지어진 낯선 새집에서 옛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참 망설여지는 일이라고 난 생각했다. 새집은 우리 가족에게도 옛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낯설고 생경할 것이다.

 

그 낯선 집에서 우리를 만날 때 사람들은, 그집이 낯설듯 우리 내외에게도 옛날같지 않은 낯선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죽어도 귀향이 아니다. 난 이런 느낌이 싫다.

 

아무도 내가 왜 그토록 연희동집을 고집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옛집에 대한 주부의 애착, 주부의 값싼 구식 노스탤지어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희동집에 대한 내 애착은 거의 맹목적이었고, 그런 추측도 맞는 말이다.

보통 평수의 소박한 작은 집이긴 해도 그 집은 언제나 내겐 기막힌 보금자리였다.

 

그러나 내가 연희동집을 고집한 것은, 옛집처럼 조금도 변질되지 않은 가족들과 함께, 바로 그 옛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명예로운 귀소본능이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이 강렬한 감정도 사실은 모성의 일부가 아닐까.

 

연희동 집수리 「귀향」에 대한 자기확인

1986년 봄날로 기억된다. 비워둔 연희동집의 수도관이 녹슬어 파열됐다. 당장 만만찮은 수리가 필요했다.

이 작은 사건은 우리 내외에게 연희동 집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하게 했다. 급한 수도관 수리에 앞서 결정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우리에게 있었다.

 

그즈음 이미 퇴임후 거처에 대한 주위의 진지한 건의가 있었다. 강남 양재동에 집터를 구해 새집을 짓자는 권유였다.

그때 마침 연희동집 수도관이 터졌다. 우리 내외는 곧 그 집에 대한 중요한 두가지 결정을 내렸다.

 

퇴임후 거처는 연희동집이어야 한다는 것과, 단임의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이 기회에 연희동집 수리를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퇴임후 살집을 고치기 시작하는 걸 보니, 틀림없이 임기만 끝나면 옛집으로 돌아올 모양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런 식의 잔 신경을 써야 할 만큼 정권교체에 대한 불신은 깊었다.

 

연희동집 수리는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결국 녹슨 수도관이 파열돼 쏟아져 나온 물난리로부터 우리 가족의 연희동 귀향은 시작된 셈이다.

 

연희동집을 고치던 시절의 추억은 언제나 즐겁다.

집수리를 시작하면서 난 비로소 그것이 청와대를 떠나 옛집으로 돌아가는 우리가족의 자기확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자 그것은 단순한 집수리 이상의 그 무엇으로 내게 다가왔다.

 

집수리의 시작은 그분에게는 대통령에서 범부로 돌아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가족에서 세대주 아무개의 가족으로, 세종로 1번지 청와대에서, 연희2동 95의4번지라는 현주소 주민으로 복귀하는 일의 시작인 것이다.

 

그즈음 그분은 내게 좋은 선물을 주었다. 집수리에 관한 모든 권한을 내게 넘겨준 것이다.
『집안에서 가장 많이 머물게 될 사람이 아무래도 주부이니 주부인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한번 꾸며보시오』

 

그분의 권유는 나를 즐거운 고민에 빠뜨렸다. 그분은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집에 박혀있기 좋아하는 내 성미와 직접 집단장에 몰두하는 취미같은 것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난 혼자서 집꾸미는 일을 어지간히 좋아했었다. 사과궤짝에 도배지를 바르고 장식을 달아 서랍장 대용으로 썼던 신혼의 날부터, 끼니도 잊은 채 방 세칸을 혼자 도배하다 탈진해 병원신세를 지던 날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실 그 당시는 주부들은 모두 스스로 현실을 꾸려나갔다.

혼자 마루에 니스칠을 하고 짧은 팔로 천장도배까지 거뜬히 해냈던 것이 그 시절 살림사는 여자들의 똑같은 열정이었다.

집수리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 연희동집이 내 생애 마지막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는 안식감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사과궤짝, 니스칠, 천장도배로 이어졌던 내 집꾸미기 역사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난생 처음 집안에 그분의 서재를 설계하면서 집수리는 시작됐다. 다시 말하지만 난생 처음 갖게 될 그분의 개인서재였다.

 

이사하면 무조건 그분이 거처할 방부터 먼저 정리해 놓는 것이 내 생활 원칙이긴 했지만, 단 한번도 그분을 위해 제모양을 갖춘 서재를 마련할 여유는 없었다.

 

최초의 그분 서재에는 남쪽으로 커다란 창이 있었다. 그 황홀한 남쪽창 때문에 난 그방을 무조건 그분 서재로 선택했다.
『아아, 남(南)으로 창을 내겠소』


그 남쪽창 앞에서 난 황홀했다.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을 그분을 상상하는것만으로도 난 황홀했다.

서재곁엔 침실을, 침실곁엔 옷방을 만들었다.

 

거실 앞쪽엔 한실방을 따로 한칸 배치했다. 한실방은 참 기능적이다.

대낮엔 사람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는 사랑방으로, 날이 저물면 손님들이 머물고 갈 객실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 한 칸을 여러 기능으로 사용했던 조상의 슬기가, 순한국식 그 공간에서 느껴졌다.

 

대통령 취임사로 가득 채운 병풍

집수리를 하면서 내가 가장 신경을 쓴 곳이 있다. 그분 응접실이다.

퇴임 후 그분은 대부분의 손님을 바로 그곳에서 맞게 될 것이다.

 

그방에 들어설 때 손님들이 한국풍의 격조에 젖길 바랐다.

한국적 느낌 한국적 격조보다 더 미학적인 공간을 난 알지 못한다.

 

침착하고, 고요하고, 명상적인 중에 쾌활한 파격이 있다. 불꽃같은 파격.

설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 안에 그것이 있다.

 

창살무늬와 마루바닥의 문양, 그리고 의미있는 병풍 한 점으로 난 그 응접실을 단장해 나갔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한식창문의 문살무늬는 조용히 기적을 만든다. 창호지 대신 창살에 명주를 바른 것은 잘한 일이다.

 

황금햇살은 명주의 살갗에 닿자마자 꿈처럼 아늑한 채광으로 변한다. 그 광선은 지나치게 연질이고 그래서 어머니 같다. 세월이 지날수록 명주는 몽상적인 노란빛으로 익어간다.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다. 자주 갈아줄 필요가 없어 경제적이다.

 

응접실 벽에 놓인 병풍은 그분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병풍을 그곳에 놓으려고 했을 때, 난 병풍의 내용을 그분 고유의 무엇으로 채우고 싶었다. 결국 그 병풍을 글자수 5백73자에 달하는 그분의 제5공화국 대통령취임사로 채워넣었다.

 

그 취임사 속에는 그시절 국민과 그분이 함께 갈망했던 그 시절의 시대정신과 그 시절의 유토피아가 담겨있다. 말하자면 병풍속에 담긴 그 5백73개의 정갈한 문자들은 그 시절 그분과 우리민족이 함께 꿈꾸던 낙원,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낙원, 유토피아, 무릉도원. 그렇다. 사상가의 말처럼 낙원,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인간의 첫주소다. 한 시대에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꾸었던 그 유토피아의 꿈을 병풍 속에 담아, 응접실 정면에 문자로 된 벽화로 놓아두는 일은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그외에도 그집엔 조그만 방이 두 개 더 있다. 한 칸은 내 공부방이고 다른 한 칸은 막내아들을 위한 공간이다.
내 공부방을 정할 때만 해도 그곳에서 내가 새벽부터 자정까지 자서전 쓰는 일에 몰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엇인가 읽고 무엇인가 쓰겠다는 지성적 다짐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수리된 집은 마당에 나가보면 옛모습처럼 단정한 단층집이다. 마당 아래 비서실이 한 칸 있으니, 단층짜리 미니 이층이 되는 셈이다. 마당에는 소나무들이 어릴 적 뒷동산 같은 옛정취를 풍기며 서있다. 돌틈의 풀 한포기까지 옛화단에 있던 낯익은 것들로 심고 싶어 애썼다. 창포, 작약, 목련, 철쭉, 옥잠화 등....

 

귀향이란 정말로 옛공간으로 돌아가려는 희귀에 대한 정열인가. 나의 귀향 준비는 그토록 연희동 옛집에 대한 맹목적 애착으로 넘쳤다. 집수리가 아니라 차라리 추억의 복원, 추억의 복구라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내 소박한 정열로 꾸며진 이 조용한 집은 한때 격앙된 오해 때문에 「연희궁」이라는 냉소적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삿짐 꾸리는 최초의 청와대 안주인

이삿짐을 싸던 날의 흥분을 나는 고백할 길이 없다. 이제 청와대를 떠나 옛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이 감사의 심정과 뒤엉켜, 난 소녀 같았다. 콧노래까지 불렀으니까.

 

권력의 축이 급하게 옮겨지는 바로 그 순간은 사실 정치에 있어선 가장 엄숙하고 진저리쳐지는 격변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옛집에 가는 일만 흥겨워 콧노래까지 부르며 이삿짐을 싸는 내 모습이 철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당신 참 흥겨워 보이는데, 이런 말로 그 신나는 기분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지만』
그분이 말했다.


『권력이란 더러운 것이니 앞으로 섭섭한 일을 많이 보게 될 거요. 이제부터 죽은자의 심정으로 삽시다.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권력을 넘겨주고 나면 그 사람 처분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 질서요. 세상사란 다.

 

그런 것이지. 생명이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사람은 결국 영원한 순환의 한 부분을 허락받아 사는 존재일 뿐이니까』

 

그분은 그날 운명적인 얘길 했던 셈이다. 권력의 마성이라든가 삶의 순환같은 운명성을. 그러나 그분의 근심은 내 흥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분의 진지한 근심도 옳은 것이지만 그날의 내 흥분도 가치있는 것이었다.

 

옛집으로 가기 위해 이삿짐을 싸는 내손은, 청와대 역사상 처음으로 최초의 이삿짐을 꾸리는 주부의 손이었다.
누구에게 등을 떠밀려 황급하게 꾸리는 이삿짐이 아니었다. 헌법에 적힌 국민과의 약속대로 책임을 다하고 임지를 떠나는, 최초의 이삿짐 꾸리기였다.

 

그날 내 내부에 넘치던 흥분을 그분은 이해해야만 한다.

청와대 안주인이었던 그 어떤 주부도, 나처럼 그토록 순수한 감사와 흥분에 감싸여 이삿짐을 꾸리지는 못했으므로.

흥분 때문에 그날 나는 엉뚱한 말을 하고 한번 더 그분의 충고를 듣고 있다.


『여보. 노총재가 올림픽을 잘 치러내겠지요』
『당연하지. 체육부장관은 물론 올림픽조직위원장까지 맡아 직접 준비해온 장본인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그동안 전력투구해 준비해온 올림픽을 직접 치르지 못하고 나가는 것, 그 한 가지만은 참 섭섭하고 걱정이 돼요』

 

『잘 들으시오. 케네디가 죽고도 미국은 변함없이 굴러갔소.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독선이야.

 

권력의 중독증세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곤 한다고 봐요. 애지중지하던 올림픽을 남에게 맡길 수 없어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면 올림픽 치른 후엔 또다른 일 때문에 떠나지 못하게 될거요.

 

정열을 바쳐 하던 일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고, 솔직히 정치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있소.

그러나 한 나라의 지도자였던 사람이 정치보복이 두려워 계속해서 권력의 갑옷을 입고 있겠다고 버틴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이겠소. 독한 결심 없이는 절대 떠날 수 없는 것이 최고 권력의 자리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소. 사람이건 권력이건 순환하지 않으면 썩는다는 것이요』

 


그분의 그 솔직한 두려움과 단호함, 그것이 날 가차없는 감격 속에 빠뜨렸었다. 그분은 두 가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치보복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예감하고 있는 퇴임자로서, 그리고 그 두려운 예감 속에서도 권력의 자리를 떠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용기있는 인간으로서 말이다.

 

『내가 지난해 경환이에게 새마을회장 그만두고 주변을 정리하라고 할 때 들려준 얘기 한번 들어보시오』
그분의 말이다.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난 나간다. 한 순간도 이 자리에 더 있고 싶어 한 적이 없었으므로 개인적으로는 추호의 미련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은 있다. 내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내 측근이나 가족들이 정치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권력이란 사나운 것이어서 내가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서둘러 맡았던 직책의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거라. 어떤 모습으로든 다음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우리가 입주했을 때 청와대는 그 불행하고 암울한 내력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전임체류자였던 박대통령도 결국 죽음으로 그 집을 떠났다. 그런 사건, 그런 내력들은 청와대에 대한 우울한 선입관을 만들어내는 데 공헌했다. 권력과 몰락이라는 불꽃튀는 두 극단, 두 대극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통치의 집, 청와대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비극 이상의 그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그곳을 떠나기 위해 이삿짐을 꾸리던 무렵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 비극이 지시하는, 비극 저 너머의 무엇을 보았다.

 

그 집의 비극은 그저 비극으로 단순처리될 일이 아니었다. 비극보다 더 높은 차원의 그 무엇, 뒤통수를 내리치던 충격보다 더 높은 차원의 그 무엇을 말하기 위해 비극은 바로 청와대라는 그 특별한 장소에 남겨져 있었다.


챙겨놓은 이삿짐 앞에서 난 생각했다. 전임자는 죽어서 이 집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서 이 집을 떠나려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불운과 행운의 문제인가.


똑같이 이 집에 살면서 어떤 지도자는 황망히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고, 어떤 지도자는 시해됐다. 그것이 우리의 현대정치사 속에서 지도자가 청와대를 떠나는 방식이었다. 역사가 청와대 주인을 순환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난 흥분 속에서 이삿짐을 싸고 있다. 이것은 전임자들과 다르다. 그들중 아무도 이런 행복을 향유하지 못했다. 그분과 내게 바로 이 행복이 허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자 비극은 거듭되긴 했지만 결코 낭비적인 것은 아니라는 엄숙함이 날 사로잡았다.

 

비극은 거듭되면서도 집요하게 한 방향, 한 이정표를 가리켰다. 역사의 진보라는 이정표를.
그것이 그날 내가 보았던 청와대가 지닌, 비극 저 너머의 광채였다. 전임자들의 비극은 부정적이었지만, 결국 그 비극이 만들어낸 교훈의 견고한 교각을 넘어, 그분과 난 최초로 청와대에서 옛집으로, 대통령에서 범부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 최초의 올바른 순환을 위해 우리 현대사는 정부수립 이후 무려 40년의 세월을 지불해야만 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아내였던 한 여자가 순조롭게 옛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삿짐을 싸는 데 필요했던 시간이 무려 만 40년이었다.

 

그날 나는 세상엔 우연한 행운도, 돌연한 비극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청와대 전임자들의 비극과 죽음이 있었으므로 우리가 살아 그곳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비극은 오랜 시간 단단해지고 정화되어 40년 후 한 가족을 청와대에서 옛집으로 귀가하도록 선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익어감이다.


난 챙기던 이삿짐 속에 얼굴을 던졌다. 역사의 도도함이 나를 압도했다.

침착하고 집요한 역사의 힘 앞에서 난 먼지처럼 작아졌고 행복했다.


난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날 밤 난 혼자 기도에 빠졌다.
『신이여, 우리의 이 하산길엔 경험을 가진 안내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난 신에게 말했다.
『신이여, 제 소원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옛집에 돌아가 범부의 아내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음성은 현재에 대한 감사와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가만히 떨렸다.

 

기도 후 잠자리로 걸어가며, 난 나와 함께 내 나이만큼 살아온 내 의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은 멋지게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 일에 온 힘을 쏟아라. 다음 일은 퇴임 후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침울한 내력의 청와대에서 우리 가족이 엮어낸 찬란한 가족애를 난 잊을 수 없다.


겨우 국민학교 3학년때 청와대에 들어온 막내, 중학교와 고등학생이던 둘째와 셋째, 그리고 대학생으로서 고뇌가 많았던 큰애, 모두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었다.


그분은 자기 생애 최고의 일을 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와 자신을 모두 쏟아부어야 할 벅찬 일과 만나고 있었다.

아이들 역시 약동의 시기를 만나 벅차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생 필요한 좋은 친구를 만나고 세상을 느끼며 자기 내면에 천천히 인생관이란 집이 지어져갈 그런 시기들 말이다.

 

「권력의 독성」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고자 이런 약동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청와대는 너무 특수해서 도무지 정서적이지 못했다. 청와대는 정치의 집이고 어른들의 집이 커서 아이들에게는 조금도 적합하지 못하다.

 

이 말은 엄살처럼 들릴지 모른다. 부모 덕에 특별대접받으며 호강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다.

그 아이들이 세습귀족이나 세습왕족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임기후면 지체없이 청와대를 떠나야 하는, 시한부 체류자인 우리는 임기 후엔 단 하루도 더 머물러서는 안되는 집, 청와대를 살아내야 한다. 부친이 대통령에서 보통시민으로 돌아가는 날, 아이들 역시 그렇게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어른도 칼로 자르는 듯한 이 역할의 변화에 익숙해지는 일이 쉽지 않다. 통속적인 상승감, 추락감 같은 것이 그 안에 있다. 아이들은 더 예민하고 더 격렬한 추락감, 이동감을 치러내야 할 것이다.


임기중 종종 세계의 유명한 지도자 자녀들, 그들의 좋지않은 얘깃거리가 신문가십에 오를 때마다 우울했다. 부친의 그 영광, 그 후광 뒤에서 자녀들은 고독, 방황, 중압감, 의욕상실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큰 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작은 나무들을 상기해 보았다. 그분의 임기 7년이 아이들의 일생에 좋든 싫든 어떤 강렬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그것에 대비해야 하는 것은 나의 임무였다.


청와대 체류는 7년에 불과하다. 물론 짧은 세월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내외도 아이들도 그 7년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청와대가 아닌 바깥 세상에서, 대통령 가족이 아닌 일반시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가족은 청와대의 특수한 생활에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 이후의 생활을 정신적으로 강하게 준비해야 하는 셈이다.

 

아이들을 대통령이란 직책의 그 거창한 후광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 난 가족 사진으로 우리 가족의 단란함을 홍보하겠다는 담당자의 제의조차 번번이 사절하곤 했다. 대통령은 권력의 정상이고 중심이었으므로 권력의 그 마성, 그 독성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는 것은 내 임무이며 보호본능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독특한 방법이나 별난 목표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겐 그저 마음속에 저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곧 우리 가족중 누구도 청와대에 사는 동안 그 품성이 변질되어서는 안된다는, 계량의 고집같은 것이었다.


우리 가족의 품성이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 대답은 어렵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다. 청와대로 이사하기 전까지 내가 돌보던 식구들, 내 손에 닿았던 그들 내면의 체온이 내 오관에 남아 있다. 말해지지는 않아도 그것이 바로 내가 아는 내 식구들의 품성이고 저울이다.

 

퇴임 앞두고 여전히 열의에 넘쳤던 남편

퇴임을 위해 이삿짐을 싸던 날. 세아이는 성장해 모두 결혼했고 재만만이 우리 품에 있었다.

국민학생이던 재만은 어느덧 고교 2년생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곳 생활 내내 난 어린 재만을 근심하며 살았다.

큰애들은 밖에서 고생도 했고 세상살이에도 눈떠 있었다.

 

부친이 대통령이 됐다고 해도 변화받지 않을 탄탄한 교우관계와 일상도 있었다.

재만은 달랐다. 미처 간절한 친구도 갖기 전에 주변 사정이 달라지고 만 것이다.

 

형들에겐 적응할 수 있는 변화라고 해도 어린 재만에겐 급변일 수 있다.
그분 직책 때문에 재만이 친구들로부터 고립된다면 끔찍한 일이었다.

 

친구 전재만이 아닌 대통령 아들 전재만으로 특별취급된다면, 그들 사이에 우정이 깃들일 공간은 사라지고 아이는 절해고도에 놓이게 된다.

 

아이가 특별취급이나 특별대우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재만에 대한 내 기본 신조였다.

그것이 아이를 무력하게 하고 고독하게 한다고 난 믿었다. 재만은 잘 자라주었다.

주위엔 좋은 친구들이 많았고 이미 고교 2년생이었다.


일요일이면 아이들의 축구시합 소리가 청와대의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아이들은 제 친구들과 한팀이 되어 상대팀인 경호원 형들과 공을 몰곤 했다.

 

형만큼이나 커진 재만도 합류한 것은 물론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시합소리를 들으며, 난 의사가 청진기로 사람을 진찰하듯 아이들이 변질되지 않은 채 자기 젊음만큼 올바로 고동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귀향 앞에서 돌아다보니 청와대라는 비범한 환경을, 우리 가족은 찬란한 가족애로 꾸려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는 평범치 않은 곳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비범한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 알맞다.

 

그런 비범한 장소에서 평범하고 건강한 가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는 것, 바로 그 평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에겐 중요한 성취였다. 권력의 그 강한 자장(磁場)속에서도, 가족중 그 누구도 변질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난 안도했다. 가정이 그렇게 지켜질 수 있었다니 축복이었다.

 

떠날 날이 눈 앞에 다가왔는데도, 바로 그날이 사무치게 기다려졌다. 옛집에 대한 정이 아니라 옛생활에 대한 간절한 몸살, 7년반짜리 몸살이 거기 있었다.


「그분에게서 배워야지」
그때마다 내가 다짐했던 말이다. 그분은 도무지 떠나는 사람같질 않았다.

권력의 축은 이미 옮겨졌는데도 그분은 일이나 심정에 도무지 동요가 없었다.


『임기중 난 선진국의 문고리를 잡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소. 이제 문고리를 잡고 겨우 문틈을 조금 열어놓은 형편인데 전임자인 내가 정신 차리고 챙겨 인계해야만, 후임자 시대엔 선진국의 안방을 차지할 수 있게 될 거 아니오』


말은 옳지만, 그래도 마치 방금 취임한 사람처럼 열의에 넘쳐 일하는 그분 모습에 난 할말을 잃었다. 대체 앞뒤 계산도 없이 번번이 솟아나는 저 순정과 정력의 원천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임기 마지막 날 밤의 감회

 

마지막 집무의 날이 왔다. 그날도 자명종은 정확히 오전 5시30분에 그분 머리맡에서 울렸다.

7년반전, 그 최초의 날처럼.
그 전날 그분은 기어코 태릉선수촌을 순시했었다.

 

난 그일을 기어코라고 말하고 있다. 올림픽을 그분이 얼마나 아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올림픽, 그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세계 제전인 그 사건을통해, 한국현대사가 지닌 운명의 벽을 뛰어넘어 보이겠다는 야심과 몸부림, 그것이 핵심이리라.

 

임기 중 마지막 날의 정식집무가 시작됐다.
오전 8시30분 등청도 예전같았다. 비서관들의 아침보고가 있었다.

 

10시엔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12대 대통령자격으로 주재한 마지막 국무회의였다.

『오늘 본인에겐 두 가지 기쁨이 있습니다.

단임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다는 기쁨과, 임기 중 세운 국가목표에 구체적 성취가 있었다는 기쁨입니다.

 

오늘 국민이 맡겨준 일로부터 떠나는 나와 여러분은 이제 새로 열리는 시대의 OB팀 응원부대입니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본인을 도와 국가도약의 한 시대를 이루도록 헌신해주신 여러분의 노고와 충정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5공화국의 성공적 마무리를 축하하고 제6공화국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합시다』

 

그 마지막 국무회의를 끝으로 그분의 시대가 새 공화국에게 넘겨준 제5공화국의 상속목록, 그것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일은 새 대통령 취임식이 있을 것이다.


깊은 밤인데 우리 가족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청와대에 들어오던 첫 날이 생각났다. 그 밤도 우리 가족은 그렇게 모여 앉았었다. 새 대통령 취임에 앞서 그분은 작별의 말을 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노대통령 취임, 진심으로 축하

 

출발의 날이 그랬듯 그 작별의 말은 역사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한 개인이 임기를 마친 후 토하는 한마디 말, 그것은 한 시대의 숙제를 푸는 잠언이 될 것이다. 모여앉은 가족들은 그밤이 청와대의 마지막 밤이라는 것과 그 밤이 지나면 옛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잠시 흥분과 감회에 젖었다.

 

『이런 밤이 드디어 왔군요. 아버님 바로 내일이면 정말 옛집으로 돌아간다는 흥분 때문에 가슴 설레는 바로 이런 밤이 정말 왔군요』


『두 분 부모님 모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격에 차, 이구동성으로 아이들이 말했다. 진실이었다. 우리는 모여앉아 꿈꾸는것 같았다.

 

이 밤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왠지 마법에서 풀려나는 듯한 극적 해방감, 감격, 전율에 감싸이게 했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오죽하면 요즘 내가 잠을 다 설치겠느냐. 침묵하고 있었지만 이 아버지도 바로, 이런 흥분의 밤을 갖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했다. 젖먹던 힘까지 바치고 이제 떠날 수 있게 되니 모든 것이 감사해 도무지 잠이 잘 오질 않는구나』


난 그분을 바라보았다. 그분 임기의 결산이 그분 얼굴에 적혀 있었다. 동기생보다 훨씬 늙은 모습이었다.

그것이 임기 동안 그분이 어떻게 일했는가를 보여주는 노동의 증명이었다.

 

기질상 일 앞에서 마지막 힘까지 다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 그분이었고, 바로 그 기질이 그날밤 그분 얼굴 위에 동기생들보다 훨씬 더 늙은 모습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렇다. 7년반 동안 동기생보다 훨씬 더 늙어버린 저 모습이야말로, 그분이 자기 얼굴 속에 남긴 훈장이다』
난 혼잣말했다. 그렇게 맹렬히 일할 수 있었던 부친에 대해, 그렇게 말없이 자신의 임기를 인내해 준 가족에 대해, 우리는 서로 깊이 감사했다.

 

자리에 누우니 가슴이 벅차 잠이 오질 않았다. 청와대에 들어오던 날도, 나가야 하는 날도, 감회가 크기는 마찬가지였다. 내일이면 새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러자 노대통령부인 김옥숙여사가 생각났다.

언제나 사과처럼 빨간 얼굴이었다. 취임식을 앞둔 이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7년전 취임식 전날 밤을 낯선 일,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를 것이다. 그녀는 많은 것을 경험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녀에게 내 경험담을 들려줘야겠다고 난 생각했다.

경험이라곤 도무지 없던 내 시작은 얼마나 실수투성이였던가.


『내일은 새 대통령 내외분을 마음껏 축하해 드려야지』
가슴 속의 화산같은 기쁨을 누르며, 그밤 내가 중얼거렸던 말이다.

 

청와대여 안녕

『국민여러분, 본인은 제12대 대통령의 7년 임기를 마치고, 고별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분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조차 내겐 신성하고 아름답게 생각됐다.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설 때면 누구나 그런 감격, 그런 떨림이 존재 안에 굽이칠 것이다.

 

어떻게 감격 없이, 경건한 두려움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분의 대통령 퇴임선언을 들으며, 난 이미 고인이 된 시부모님 생각을 했다. 찢어지도록 가난했지만 그분에게 최초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소원의 씨앗을 심어주신 그분들을.


『참 행복한 사람이야』
참 오랜만에 난 그분이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이제 고별인사가 끝나면 그분은 책임자의 고독으로부터 해방되고 범부의 소박한 생으로 옮겨갈 것이다. 더 감격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40년간 우정을 나눈 친구가 자신의 후임자로서 새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취임식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가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단상에 울려퍼지는 새 대통령의 음성을 들었다. 7년반전 그분도 바로 그것과 똑같은 선서를 국민 앞에 했었다. 7년반전 그날 난 모든 것이 엄숙하고 조심스럽기만 해서 대통령 선서를 듣고 사색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취임식장에 앉아 새 대통령의 선서를 들으며 나는 그 짧은 선서가 담고 있는 헌법, 국가, 직책이라는 그 우선 순위에 감동했다.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왕에게 끼워지는 대관식 반지는 바로 원칙이라는 굴레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서에서 왜 굴레, 그 헌법준수가 다른 개념보다 먼저 등장하고 있는지, 선서의 치밀함이 돋보였다.

 

마침내 13대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분도 나도 마음껏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했다.

그분과 새 대통령 그 두 사람이 청청한 젊은 시절 즐겨 쓰던 말이 생각났다.


『 조국은 하나, 충성을 바칠 곳도 하나』
이제 그 두 사람이 다시 하나뿐인 그 조국 앞에 서있었다.

 

한 사람은 전임자로서, 한 사람은 후임자로서. 그 모습이 바로 우리 정치사가 만 40년간 학수고대해 온 모습이었다.

평화적 정권교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내외가 취임식장으로부터 다시 청와대로 돌아왔을 때, 청와대 주인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청와대 집무실로 간 그분은 자신이 7년반 동안 일했던 그 자리를 새 지도자가 된 노대통령에게 물려주었다.

그 집무실을 인계하고 두 사람만이 나누었던 그 뜨거운 포옹, 악수, 감격을 난 짐작할 수 있다.

 

『 청와대여 안녕』
「서울 0가 1001호」 검은 승용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는 청와대와 작별하고 옛집으로 향했다. 군악대의 연주가 불꽃처럼 울렸다.

 

청와대 앞부터 줄지어 선 시민들은 우리내외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어 주었다.

바람 속에서 흩날리는 태극기는 꽃밭같았다.


『 할아버지, 어디로 가요?』
손녀딸 수현이가 차 속에서 물었다.


『 연희동 옛집으로. 그곳에서 네 아빠와 엄마, 삼촌들이랑 행복하게 살거야』
대답하는 그분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이 내게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분은 욕설하는 재주가 없다. 그런데도 심하게 욕설을 토할 때가 있다. 경

기의 12라운드를 다 마친 후에도 힘이 남아있는 권투선수, 그런 선수를 보면 그분은 가차없이 욕을 해댄다.

 

경기내용은 시원찮게 끝이 났는데도 기운은 남아있는, 전력투구하지 않은, 덜 치열한 그 모습을 그분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 했다.
『링 위에 서면 목숨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쏟아부어야만 하는 거야』
그분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경영한 7년반의 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차는 어느덧 그리운 연희동 옛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 골목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동쪽에 인생이 우리내외 몫으로 할당한 우리의 근거지인 옛집이 있었다.


문득 이타카의 왕, 오디세이의 10년만의 귀환이 생각났다.

비취색 달이 지평선에 걸리고 불똥같은 밝은 별이 동방으로 꼬리를 감출 때 오디세이는 10년간의 방랑을 담보로 왕국 이타카로 돌아온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 페넬로페가 있는 그의 왕국 이타카로의 격정에 찬 귀환.


귀향, 아름다운 말이다. 나도 그분과 함께 7년반만의 귀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토록 옛집을 그리워 하고, 지척에 다가온 귀향에 목말라 하는 것은 귀향이 주는 그 안일함, 그 안도감 때문인가. 오디세이의 귀향에 대해 시인은 노래한다.

 

『위험하게 살라/
안주하지 말라/
베수비우스 화산 곁에 그대의 도시를 세우라/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바다로 그대의 배를 내보내 거라』

난 혼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에겐 안주가 필요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안도감이 필요했다.
연희동 골목 하늘 높이 걸린 현수막들이 연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현수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수현이 할아버지 할머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상쾌한 바람 때문에 글자들은 마치 노래하는 것 같았다.


난 분명하게, 그 환영의 말 속에서 울려오는 환희의 송가를 들었다. 귀향이었다.

 

[출처] 이순자 회고록|작성자 세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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