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107

재벌, 그들은 누구인가?

3대孫 내다보는 재벌가 ‘墓’한 비밀 증조부모 묏자리가 증손 운명 결정 묏자리로 보는 ‘동네부자-거부-재벌’ 재벌家의 과거·현재·미래까지 점쳐 통계적이고 경험적인 연구에 따르면 묏자리는 묏자리 주인의 3대손(증손)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이의 미래를 점치고 싶다면 증조부모의 묏자리를 보면 된다는 말이다. 롯데가(家)의 경우, 그룹의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의 증조부와 증조모의 묘소가 명당이다. 특히 증조모의 묘소는 거대한 ‘재벌 산’을 거느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거대 기업을 일군 신 회장의 운명을 예고한 묏자리의 형세다. 그렇다면 신 회장의 2세들이 좌우할 롯데그룹의 미래는 신 회장 조부모의 묏자리에 암시돼 있을 것이다. 찾아가 확인해본 즉 조부모 묘소의 지형과 혈(시신을 안치하는 구덩이)의..

강국창(姜國昌)회장 특별 인터뷰

동국전자(주) 강국창(ROTC3기) 회장 한국 가전의 전설, 강국창 회장 특별 인터뷰 ​ 80년대 초 동국전자(주)를 설립한 이래 전자회사를 모체로 수산업과 레저, 관광산업에까지 진출하며 사업의 다각화에 성공한 강국창 회장.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르곤 한다. 힘들고 고되다는 이유로 남들이 흔히 가지 않는 길을 택해왔던 그에게 ‘최초’라는 수식어는 그간의 노력과 열정을 녹여내는 훈장이기도 하다. 1980년대 가전제품의 성능부품을 국산화해가는 과정에서도 그러했듯 강국창 회장은 ‘기본에 충실하자’는 경영방침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움에 도전해나가고 있다. 한국 가전산업의 역사를 새로 써온 강국창 회장, ‘기술보국’이라는 꿈으로 한 우물을 파온 강국창 회장의 특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

안중근 의사의 사형소식을 듣고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딴맘 먹지 말고 죽어라」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안중근(安重根)

■ 안중근(安重根) 1879년(고종 16)∼1910년. 조선 말기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

권동하(權東河)

■ 권동하(權東河) 권동하(1905 - 1987)는 예천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으로, 본관은 예천(禮泉)이다. 경북도립사범학교를 졸업(1회) 하고, 예천공립보통학교의 훈도(現 敎師)로 부임한 이래, 대구 덕산국민학교 등에서 13년 간 교단 생활을 하다가 1940년에 그만두고, 예천주조회사 취체역(取締役)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권동하의 동생 권상하(權尙河: 1916. 12. 29 - 2000. 04. 13) 역시 대구사범학교(제4회) 심상과(尋常科) 5년제를 마치고 진보국민학교를 거쳐 함창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일제 말기에 언론계로 전환하여 해방 전후 7년 간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다가 1947년 경에 경북 경찰계에 투신하여 치안국 근무를 거쳐 경남 함안, 거제, 삼천포 경찰서장, 경남경찰국 공보실장 등을..

황현(黃玹)

■ 황현(黃玹) ↑석지 채용신이 그린 매천 황현의 초상화. 매천은 체구가 작고 병이 잦았지만 기상은 날래고 굳세어 가을매가 꼿 꼿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독립운동가박은식은 매천에 대해 “문장과 기개가 사림 가운데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1855(철종 6)∼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시인·문장가.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라남도 광양 출신. 시묵(時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 놓..

오화영(吳華英) - 독립운동가

1880년. 04월. 05일 ~ 1950년(납북), 호(號)는 국사(菊史). 일명 하영(夏英).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와 미국인 남 감리교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서울의 신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목사로 취임하여, 경성종교교회(京城宗橋敎會)의 주임목사로 재직하였으며, 광성소학교(光成小學校) 부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정춘수(鄭春洙)· 박희도(朴熙道)· 이승훈(李昇薰) 등과 연락하여 고종의 국장을 기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의하였다. 개성 남성병원(南星病院)의 동생 은영(殷英)과 김지환(金智煥) 등의 도움으로 개성지방의 연락을 담당하는 등 3·1운동 때,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일제에 잡혀 2년 6개월간 옥고를 ..

유일한(柳一韓)

■ 유일한(柳一韓) 1895년∼1971년의 실업가. 평양 출생. 아버지는 상인이었던 기연(基淵)이며, 어머니는 김확실(金確實, 개명 후 김기복)로 9남매 중 맏아들이다.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04년 9세 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고학으로 미시간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상학석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스탠포드대학원에서 3년간 법학을 전공하였다. 학업을 마친 뒤 전자회사 사원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1922년 자립하여 숙주나물을 취급하는 라초이식품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25년까지 50여만 달러의 거금을 벌었다. 1926년 3월에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하였다. 그해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1934년에는 독일의 도마크(Domagk, G. )박사에 의하..

독립유공자 명단

■ 독립유공자 명단 그동안 정부로 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약 만명 가까이 됩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공적이 특히 다대하다고 인정되는 1급 29명, 2급 89명, 3급 779명계 897명의 명단만 싣습니다. 단, 독립유공자 한 분 한 분의 애국심이나 희생의 크기는 누가 함부로 잣대로 따지고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이 명단은 말 그대로 단순한 참고용일 뿐 절대적인 평가일 수는 없습니다. ●1급 : 대한민국장(29명) 강우규(姜宇奎). 김구(金九/(舊)安東金氏). 김규식(金奎植). 김좌진(金佐鎭). 김창숙(金昌淑). 민영환(閔泳煥). 서재필(徐載弼). 손문(孫文,중국인). 손병희(孫秉熙). 송미령(宋美齡,중국인). 안중근(安重根). 안창호(安昌浩). 오동진(吳東振). 윤봉길(尹奉吉). 이강년(..

신건식(申健植). 오건해(吳健海) - 부부 독립운동가

■ 신건식(申健植) - 고령신씨 25世 ▲ 신건식·오건해 선생 가족사진(왼쪽부터 오건해, 신순호, 신건식) 1889년(고종 26)∼1963년. 독립운동가. 일명 환(桓)· 두흥(斗興). 호는 삼강(三岡). 본관은 고령(高靈). 예관 신규식(申圭植)의 아우로.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다. 1912년 4월에 중국 저장성(浙江省) 성립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국내에 밀파되어 정보수집과 군자금 등을 모집하면서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취한 뒤 상해로 귀임하다가 신의주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잡혔다.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중에 신병치료를 이유로 낸 병보석이 허가되어 석방과 동시에 상해로의 귀임을 모색하던 중 다시 잡혀 청주에서 복역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