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안중근(安重根)

야촌(1) 2014. 8. 16. 10:16

■ 안중근(安重根)

 

1879년(고종 16)∼1910년. 조선 말기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이다.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字)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 :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郎)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 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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